▲2018년 5월 4일 대한항공 직원들과 가족, 지지하는 시민 등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에서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일가 및 경영진 퇴진과 갑질 근절을 위한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이희훈
나는 이런 일들을 뼈아프게 경험한 사람이다. 2014년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을 기억한다. 당시 국민은 재벌 권력이 조직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그 권력 앞에서 구성원들이 얼마나 쉽게 입을 다무는지 목격했다.
기내 서비스 문제가 끝나지 않고 더 큰 문제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많은 국민이 기억하는 대로, 돈에 기반한 권력이 시민의 상식을 압도하는 순간을 고스란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기업 전체가 얼마나 큰 신뢰를 잃고 구성원들이 고통을 겪었는지는 다 알려진 일이다.
몇 해 전 한 기업의 임원으로부터 ESG(기업 경영이 지속 가능하기 위한 3가지 핵심 요소, 각각 환경, 사회, 지배구조) 강연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사회(Social) 분야를 주제로 임원 교육을 하고 싶다 했다. 땅콩 회항 사건을 사례로 이야기해 달라는 제안에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오너 한 사람의 행동이 기업에 얼마나 큰 손실을 입히는지, 조직 문화가 왜 중요한지 전하고 싶었다. 기업이 어떻게 신뢰를 잃는지 알리고 싶었다.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다음 날 다시 연락이 왔다. 내부 사정으로 강연 진행이 어렵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확인해 보니 강연자는 다른 교수로 변경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많은 기업이 진심으로 배우고 바뀌고 싶어 하는 것일까. 조직의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 채 형식적으로 교훈만 들으려는 건 아닐까?
어쩌면 지금도, 우리 사회의 상당수 기업은 '벌거벗은 임금님'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아닌가 싶다. 오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참모는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리더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 한다. 그 대가는 조직 전체가 치른다.
진정한 리더십은 책임지는 태도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의 핵심은 승리가 아니라 '불태(不殆)', 즉 위태롭지 않음에 있다.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의미로 이해하지만, 손자가 강조한 점은 '위험을 피하는 지혜'였다. 최고의 장수는 백 번 싸워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애초에 싸울 필요가 없게 하는 사람이다.
기업 경영도 다르지 않다. 전쟁은 승리하더라도 수많은 상처와 희생을 남긴다. 민심과 싸워 이기는 기업은 없다. 고객과 논쟁해서 승리하는 브랜드도 없다. 설령 '이겨도' 출혈이 엄청나다.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면 먼저 이유를 듣는 게 좋다. 억울함을 설명하기 전에 상처를 살피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자기 체면보다 조직 구성원들과 고객 신뢰를 생각해야 미래가 위태롭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는 민심을 읽어내는 능력이 부족했고, 리더십이 부족했으며, 위기 관리를 못 한 거다.
'오너리스크'가 무서운 이유. 단기 손익계산서에만 결과가 반영되지 않는다. 신뢰를 깨고, 브랜드의 상징성을 훼손한다. 소비자와 지금껏 쌓아온 '관계'가 사라진다. 그 비용은 숫자로 환산하기 어렵다. 오랫동안 지속된다. 나는 이전에도 기업이 손해 보는 과정을 직접 봤다. 이번 사태가 더욱 안타까운 이유다.
기업은 개인 소유물이 아니다. 수많은 노동자의 삶과 고객의 신뢰, 그리고 사회의 기대 위에 존재하는 공동체다. 그렇기에 리더의 책임은 권한보다 무겁다. 진정한 리더십은 책임을 감당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부디 이번 논란이 특정 기업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기업 문화 전반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민심은 약하지 않다. 물 한 방울은 연약해 보이지만 수많은 물방울이 모여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어떤 리더도 자기 권위를 가지고 국민의 힘을 막을 수 없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오래된 경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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