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02 16:11최종 업데이트 26.06.0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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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탄 딸아이를 처음 받아준 어린이집은 공동육아 형태였다. 밟히면 책임 못 진다며 다른 여덟 군데에서 퇴짜를 맞은 뒤였다. 부모들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이곳에서 딸은 다른 엄마 등에 업혀서 나들이도 가고 물놀이 모래놀이도 마음껏 했다. 이층집 형태의 어린이집은 그 자체적으론 휠체어로 접근하긴 어려웠지만 사람들, 공동체가 보완한 거다. 이런 공동체를 만나고 싶었지만 '휠체어로 접근가능한 집'조차 만나기 어려웠다. 그 많은 아파트 중에 휠체어로 쓰기 편하게 애초부터 지어진 집은 찾기조차 어려울까?

그러다가 서울 성북구 종암동 개운산 자락에서 가로주택정비사업을 통해 공동체 가치가 담긴 아파트를 짓는 커먼즈 종암을 만났다. 건설사 브랜드에 의존하는 대신 '공동체' 상징 브랜드를 직접 만들고, 공간 설계부터 운영까지 주민들이 조합에서 고민하는 곳이란다. 130가구 규모로 조성되며 2028년 완공 예정이란 이 아파트는 뒷산 공원으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와 구름다리를 지어 동네에 개방하겠단다.

건축을 전공했다는 이원형 조합장에게 "휠체어로 접근 가능하도록 일부 아파트 설계를 수정할 수 있으신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즉석에서 손으로 쓱쓱 도면을 수정했다. 이원형 조합장과 '접근가능한 집과 공동체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커먼즈 종암' 이원형 개운산마을 가로주택정비사업조합장(오른쪽)과 무의 홍윤희 이사장이 커먼즈 사무실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건축을 전공한 이원형 조합장은 커먼즈를 공동체 아파트로 만들기 위해 공간과 운영을 설계하는 작업을 여러 파트너들과 함께 하고 있다.홍윤희

- 종암동에 산 지는 얼마나 되었는가?

"2015년에 왔으니 10년 정도 됐다. 처갓집이 이 동네라 자주 오다가 정착했다. 2017년에 단독주택을 매입해 리모델링을 하고 들어갔다. 살아보니 인프라가 너무 좋다. 교통, 개운산, 학교, 지하철역(길음역), 마트까지 편의시설이 촘촘하다.

주변에 재개발사업으로 아파트가 지어진 건 30년 전쯤이다. 사업 당시 시점으로 보면 이 주변은 잘 정비된 단독주택지였다. 당시 주민들이 '우리는 안 한다'고 빠졌고, 섬처럼 남았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노후된 주택지가 되었고, 이 단독주택을 산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다시는 아파트로 못 들어올 거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 그러다가 정비사업을 하게 됐다. 정비사업조합을 처음 만들자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아파트가 '부동산'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같이 살아가는 동네'여야 하지 않나. 이 동네에서 이웃이 함께 잘 살아가는 마을 같은 아파트를 지어보고 싶었다. 기존에도 공동체 주택 개념은 있었지만 빌라 정도의 규모라서 이렇게 아파트 정비조합 규모로는 사례가 없었다.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면 보통 정비업체나 시공사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데 이렇듯 공간을 기획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정비사업을 남에게 맡기면 운영에 공동체적 가치를 반영하기 어렵다고 평소 생각해 왔다. 그러다가 2020년 정부가 지원하는 '공공참여형 가로주택정비사업'을 알게 됐다.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가 공동시행자 역할을 하는 공공참여형사업이었다. 공공이 함께해주는 사업이니 이로써 아파트를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

집 리모델링 때 앞집 아저씨가 철거 공사를 해주셨고 옆집 할머니와도 알고 지냈다. 이 마을엔 늦게 이사왔지만 눈이 오면 같이 치우는 등 늘 마주치니까 동네 주민들에게 제안할 수 있었다. 이웃들에게 SH 안내문을 보여드렸고, 법무와 회계 일을 하는 이웃들을 만나서 집행부를 꾸렸다. 이후 이러저러한 이유로 SH와의 협업은 중단됐지만 다행히도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사업비 지원보증을 유지하면서 금융 리스크를 거의 해소할 수 있었다."

- '커먼즈' 브랜드는 어떻게 만들었는가?

"우리 조합은 단순한 재개발조합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공간'을 함께 상상하는 이들로 구성돼 있다. 이런 가치를 품은 이름을 직접 결정해 보기로 했다. 브랜드 회사인 더워터멜론과 작업해 '공유지' 또는 '공동체'라는 뜻의 '커먼즈'를 브랜드로 정했다(도시정비사업조합이 대형 건설사 브랜드 아파트가 아니라 자체 브랜드를 선보인 건 커먼즈 사례가 처음이다)."

개운산마을 커먼즈 종암 가로주택정비사업 착공식에 참석한 조합원들.이원형

- 1층에 세대를 넣는 대신 커뮤니티 공간을 만든다. 개운산 중턱을 잇는 엘리베이터와 구름다리를 짓겠다는 계획이다. 이런 결정은 어떻게 이뤄졌는가?

"개운산에는 스포츠센터, 잔디구장, 무장애 데크 산책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무장애 산책길을 가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해 접근성이 나쁘다.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사람과 셔틀버스를 탈 시간과 여력이 있는 사람만 갈 수 있는 거다. 동네 이사 왔을 때 아이가 어렸는데 유아차를 끌고 개운산에 갈 수 없었다.

산 정상부까지 이어지는 엘리베이터와 구름다리가 생기면 어르신들을 비롯해 우리 조합 주민들의 접근성은 당연히 좋아지는데, 기왕이면 온 동네에 개방하자는 생각을 조합원과 공유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저층부에 집이 있으면 남의 집에 침범하는 느낌이라 이용하기 어려워지니 1층에 세대를 넣지 않고 공동 공간으로 만들어서 누구나 편하게 방문하도록 설계한다.

네덜란드 건축가 헤르만 헤르츠버거의 '건축 수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헤르츠버거는 매개공간, 즉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공간을 연결하는 중간 지대를 잘 활용하면 공간을 오가는 이들의 상호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어린이집 앞 계단 난간에 걸터앉을 수 있게 만들면 부모들이 하원하는 아이를 기다리며 자연스럽게 앉아 대화할 수 있는 식이다. 그런 공간을 마을에 디자인하는 게 건축가의 일이라는 거다.

아파트 1층에 이런 매개 공간을 조성할 예정이다. 입구에는 시니어 센터, 맞은편에 씨앗도서관, 옆엔 유치원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쓸 공간을 마련했다. 공간 사용 시간대가 포개지면서 늘 누군가가 그 공간에 있도록 계획했다. 오전엔 어르신, 오후엔 아이들, 저녁엔 스터디 카페에 공부하러 오는 사람 등 다양한 세대의 주민들이 어울릴 수 있다는 공동체적 장점 외에도 방범 측면에서도 좋다. 방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의 눈'이다. CCTV보다 훨씬 뛰어나다."

커먼즈 브랜드 이미지. 서울 성북구 종암동 개운산마을 가로주택정비사업조합은 공동체 마을을 나타내는 '커먼즈'라는 자체 브랜드를 따로 만들었다.커먼즈

- 공동체적 공간 외에도 에너지 효율이 뛰어난 '패시브' 아파트를 추구하고 있는데 이것도 공동체 정신과 맞닿아 있는 것인가?

"패시브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건물에서 에너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기밀성능을 높임으로써, '능동적(액티브)'으로 에너지 공급을 과하게 하지 않아도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기 때문에 패시브(수동적) 건축이라고 부른다. 흔히들 어떤 집에 살면 이러저러한 하자가 발생하기도 하고, 겨울이면 웃풍도 있고, 뽁뽁이로 창문에 셀프 단열도 할 수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아파트 생활에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건축의 공학적 성능에 대한 이해 그리고 기대치가 낮아서 하는 말이다.

패시브 건축에서는 '웃풍이 좀 있다는 건 공학적으로 있을 수 없고, 용납하기 어려운 품질수준'이라고 말한다. 이런 건축이 널리 보급된 독일에선 20~30년 전에 끝난 얘기다. 단순히 관리비만 절감하는 수준이 아니라 에너지 자체를 덜 쓰도록 건물 자체를 건전하고 건강하게 짓는 것이다. 패시브 아파트와 커먼즈는 같은 맥락에서 만난다. 결국 포용적인 아파트로 이어진다."

커먼즈 종암 조감도. '커먼즈 종암'은 서울 성북구 종암동 개운산마을 가로주택정비사업을 통해 공동체 가치가 담긴 아파트를 짓고 있다. 건설사 브랜드에 의존하는 대신 ‘공동체’를 상징하는 브랜드를 직접 만들고 공간 설계부터 운영까지 주민들이 조합에서 고민하는 곳이다. 130가구 규모로 조성되며 2028년 완공 예정이다.이원형

- 이런 기획에 반대한 조합원은 없었는가?

"구름다리 건설엔 반대가 좀 있었다. 보통 정비사업은 이렇게 기부채납을 하면 용적률 인센티브로 세대를 늘릴 수 있는데, 우리 비용으로 구름다리를 놓는데도 인센티브를 받는 게 없어서다. '왜 그 돈을 쓰냐'는 얘기가 많았다.

사실 구름다리를 놓으면 주민들의 삶이 쾌적해진다. 개운산스포츠센터를 편리하게 가 볼 수 있고, 공원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 15~20분 정도의 개운산 숲 데크길을 가로질러 소음과 매연 없이 산 건너편 개운중학교에 갈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옆 초등학교 교장선생님도, 성북소방서에서도'소방·구급 활동에 큰 도움이 될 거라며 공문을 보내주셨다. 어떻게든 성북구청, 서울시와 협의를 잘해서 실현시켜 보려 한다."

- 사실 큰 건물들의 공개공지가 그렇게 공동이 사용하는 공간을 기부채납한다는 취지 아닌가?

"원래는 그런 취지인데, 공개공지가 취지대로 잘 운영되는 경우가 드물다. 건물주 입장에서는 공개공지를 내놓는 건 용적률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서다. 어떻게 운영할지는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작 공개공지를 허가하는 구청은 촘촘하게 운영까지 관리하긴 어렵다. 그래서 많은 공개공지에 의미 없는 화단 몇 개만 있고 아무도 쉬지 않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 공개공지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이 났는데, 일본에서 활발한 '타운 매니지먼트'란 개념을 들은 적이 있다. 민간(주민, 기업, 상인 등)이 주체가 되어 지역 공간이 지역 주민들에게 이롭도록 잘 관리하고 활성화한다는 개념인데, 커먼즈는 일종의 '주거형 타운 매니지먼트'같다.

"타운 매니지먼트가 상업 공간 중심이라면, 커먼즈는 그걸 주거에 적용한 일종의 '주거형 타운 매니지먼트'로 볼 수도 있다. 정비조합이 공간 기획부터 운영까지 결합해 고민하기 때문이다. 타운이 '마을'이라는 뜻이니 사실 타운 매니지먼트는 주거를 포함해야 의미가 완성되는 것 아닐까."

커먼즈 종암 무장애 아파트 설계 변경 메모. 필자(무의 홍윤희 이사장)가 제안한 무장애 아파트 설계를 위해 이원형 조합장과 함께 구조도에 손글씨 메모를 남겼다.홍윤희

- 장애당사자들은 집을 구하면 화장실 문을 하는 수 없이 떼고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조합장님을 만나 뵈면 휠체어 사용자를 고려해 화장실은 넓히고 싱크대나 세탁실도 휠체어로 쓸 수 있는 무장애 세대 설계를 부탁드려야겠다 싶었다. 그 자리에서 직접 연필로 그려가며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감사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먼저 해봤을 텐데 미처 생각을 못했었다. 애초부터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과 가족이나 돌보는 이가 함께 지내는 용도로 생각했던 복층형 세대에 무장애 공간을 적용하면 효과적일 것 같다. 요즘 아파트 화장실들이 전반적으로 작게 나온다.

말씀대로 설계를 바꿔보기로 했다. 사실 사단법인 무의와 첫 미팅을 한 후 어머니가 급성 폐렴으로 입원하셨는데, 링거 폴대를 끌고 다니면 단차가 조금만 있어도 이동이 힘드신 것을 보며 가족들끼리 시골집을 무장애 구조로 바꾸자는 얘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접근성 좋은 무장애 주거공간의 필요성을 개인적으로도 실감하게 됐다."

커먼즈 종암에서 무장애 건축을 적용할 세대. 구조도 휠체어 턱이 없고, 화장실도 휠체어로 쓸 수 있게 공간을 넓히며, 싱크대도 하부가 뚫려 있어서 휠체어로 사용하기 쉽게 만든다.이원형

- 무장애 세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계되는가?

"공동현관을 거칠 필요가 없으며 개별 현관문이 따로 있는 복층형(69제곱미터) 세대에 조성한다. 어르신들은 현관을 여러 개 통과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어서 공동현관 비밀번호나 안면 인식 없이 들어갈 수 있게 했다. 그중 4세대를 무장애 설계로 만든다.

휠체어 턱이 없고, 화장실도 휠체어로 쓸 수 있게 공간을 넓히며, 싱크대도 휠체어 다리가 들어가게 하려고 한다. 거실은 1인용 소파를 두어 휠체어 사용자와 함께 나란히 TV를 볼 수 있다. 설계사가 처음엔 '무장애 세대인데 계단이 있느냐'고 했지만, 동거인들끼리도 공간이 구분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더니 공감했다. 여러 세대가 살면 무장애가 기본형이고, 무장애가 아닌 공간이 옵션이다."

이원형 조합장은 아파트 공사 현장을 한 바퀴 보여준 후 아파트 근처의 마을버스 이야기를 꺼냈다. 마을버스를 휠체어가 탈 수 있는 저상버스로 교체하는 걸 구청과 협의해 볼 예정이라고 했다. 이 조합장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커먼즈의 '자산을 넘어 삶의 방향을 담는 집'이라는 슬로건이 겹쳐졌다.

장애를 가진 딸을 양육하며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비단 장애 자녀 뿐이겠는가. 커먼즈처럼 어우러져 사는 공간의 설계부터 운영까지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더 많아지면 모두가 좀 더 편리하고 편안해질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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