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01 12:13최종 업데이트 26.06.0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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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의 팬들은 역설적으로 가장 많이 상처받고 가장 많이 단단해진 사람들이다.연합뉴스

"배가 고팠어. 경기 후반이 되면 힘이 없어서 뛸 수가 없었다고."

우용득, 천보성, 권영호, 배대웅.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멤버들이 입을 모아 회상하는 1982년의 가장 강렬한 기억은 '배고픔'이다. 물론 연봉이 적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국가대표 경력을 앞세워 대한민국 1등 대기업 삼성에 'A급' 선수로 스카우트되면서 강남에 아파트를 살 수 있을 만큼의 거액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런데도 힘이 없어 경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배가 고팠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저녁 식사로 구단이 제공한 것이 각자 바나나 2개씩이었기 때문이다. 마라톤에 조예가 깊었던 그룹 고위 임원 누군가가 '배가 부르면 오히려 경기력이 저하된다'며 경기 전 선수들에게 바나나를 먹이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얼마 뒤부터 선수들이 경기장 구석에, 안 보이는 곳에 모여서 몰래 짜장면을 시켜 먹었어.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경기를 뛸 수가 없으니까." (권영호)

삼성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1982년, 한국 야구의 수준보다도 훨씬 낮은 것이 야구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었다. 다른 구단의 모기업 임원은 '한 경기에 공이 왜 여러 개 필요한가' 따져 물었고, 또 다른 이는 경기를 관전한 뒤 '굳이 멀리 치려고 하게 하지 말고,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로 적절히 치는 타법을 교육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팀의 간판선수들은 경기에서 팀을 이끌어야 할 사명 외에, 감독과 모기업 임원들 사이를 오가며 무지한 지시를 완충하고 선수단의 애로사항을 청원하는 메신저의 역할도 떠맡아, 때로는 버거운 술자리에서 몸을 혹사시켜야 했다.

문제는 그런 시절에 그런 일들이, 삼성만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삼성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세상 모두가,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도 '삼성만은 예외'라고 생각했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선진 삼성. 첨단 삼성. 1등 삼성. 하지만 그 삼성의 야구팀 라이온즈에는 선진적인 관리도 첨단의 노하우도 없었고, 다만 화려한 경력에 노쇠함이 가려진 선수들이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고 있었을 뿐이다. 1등은 애초에 당연한 것이 아니었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보이게 하는 데는 더 많은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실상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리에서 허둥대며 싸우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삼성이 애초부터 훨씬 높은 곳에서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있을 수 있는 패배조차 뜻밖의 사고처럼 받아들여졌다. 어쩌면 삼성 라이온즈 팬들의 마음속 제일 밑바닥에 쌓여있는 단단한 비애는 바로 그쯤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보다 더 강하다고 여겨지는 팀. 그래서 다른 팀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갈 장면들이, 삼성에게는 늘 설명이 필요한 실패가 되어버리는 갑갑함 말이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다윗들 앞에서, 거듭 쓰러진 골리앗

삼성의 준우승라이온즈는 8번 우승했고, 그 횟수는 12번의 타이거즈에 이은 2위다. 하지만 준우승 횟수 11번은 가장 많다. 그들의 눈앞에서 베어스가, 타이거즈가, 자이언츠가, 또 트윈스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연합뉴스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첫 공식 경기 역시 그랬다. 삼성은 MBC 청룡을 상대로 초반부터 7점을 몰아치며 손쉽게 승부를 결정짓는 듯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내려온 '잔칫날다운 모양을 갖추라'는 메시지에 선수단 전체가 느슨해졌다. 투수는 힘을 빼고, 야수들은 집중력을 잃었다. 그래도 승부라는 게 어디 그런가라는 당연한 의문이, 어차피 이미 이긴 경기 아니냐는 자만에 덮여 더그아웃에 퍼졌다.

그리고 모두가 보지 않고도 기억하는 그 장면이 나왔다. 이종도의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 삼성은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도 또 한 번 우승을 결정짓는 역전 만루홈런을 허용해 '최강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더니, 결국 만루홈런 맞으며 시작해서 만루홈런 맞으며 마무리한 팀'으로 각인되고 말았다.

그렇게 꼬이기 시작한 운명은 끈질기게 반복됐다. 1984년에는 두 해 전의 불길한 기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굳이 '고의패배'의 무리를 감수하며 만만했던 롯데 자이언츠를 한국시리즈 상대로 낙점하고도, 최동원의 역투에 말려 무릎 꿇으며 비난과 비웃음을 한 몸으로 받아냈다.

또 그 뒤로 80년대와 90년대 내내 모기업 규모가 비교도 되지 않는 해태 타이거즈의 강력함을 돋보이게 만드는 덩치 큰 조연으로 맴돌았고, 국제금융위기가 덮친 세기말에는 좌초한 해태와 쌍방울의 선수들을 쓸어 담아 '돈성'의 위력을 과시하고도 뒤늦게 뛰어들어 꼭 한 술씩 더 뜬 현대에 밀리며 헛기침을 해야 했다. 삼성이 늘 골리앗의 자리에서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동안 너도나도 돌아가며 다윗 행세를 했고, 줄 서 있던 다윗들이 모두 지쳐 돌아가자 숨어있던 또 다른 골리앗이 나타나 흙 묻은 빵마저 가로채며 골탕을 먹인 셈이었다.

결국 그 현대마저 무너지고 흩어진 2010년대에 그들은 4연속 통합우승의 위업을 이루었고, 그들의 기나긴 도전의 세월을 기억하는 10개 구단의 팬들은 애잔한 동정과 위로의 훈훈한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삼성이라면, 그들이 받아야 하는 것은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라 공포와 좌절의 시선이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악의 제국'이라는 악명이고 '리그 전체가 똘똘 뭉쳐 타도해야 할 사우론의 탑' 같은 위압감이었다.

한 번도 꼴찌를 경험하지 않은 단 하나의 팀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삼성 라이온즈통합 4연패를 비롯한 통산 8회 우승, 삼성 라이온즈는 과거 해태 타이거즈 외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금자탑을 쌓았다.연합뉴스

한국프로야구에서 단 한 번도 꼴찌를 경험하지 않은 팀. 4년 연속 통합우승의 위업을 비롯해 8번의 우승을 경험했고, 1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기록을 비롯해 가장 많은 가을야구 경험을 가진 구단.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그런 강팀 라이온즈의 곁을 지켜온 팬들은 늘 마음이 불편하다. 어지간히 강해서는 강한 티가 나지 않는 팀의 1승을 마음 졸여 기원하며, 그 팀이 준우승이라도 하면 큰 이변이라도 생긴 듯하는 다른 팀 팬들의 호들갑에 무뎌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강한 팀의 곁에 모여있는 가장 결연한 투지의 팬들이다. 그리고 비난이건 조롱이건 비아냥이건, 그 무엇이건 다 덤비라고 조용히 소리치며 버티는 단단한 사람들이다. 팥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기가 필요하니까. 골리앗을 응원하기 위해서는 물결을 거스를 각오가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남들이 몰라주는 만큼 내가 더 알아주겠다는 끈끈한 의지가 그들에게 있다.

그래서 삼성 라이온즈가 그런 팬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결국 하나다. 뻔뻔하게, 눈치 볼 것 없이, 인정사정 없이 강해지는 것.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 정도는 해야지' 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 강해지는 것. 그래서 팬들이 온갖 시비와 논란은 가볍게 무시하고, 호탕하게 '악의 제국' 시민의 기분을 즐기게 하는 것이다.

그나마 요 몇 년의 삼성은, 충분한 속도인지는 모르지만 착실히 쌓아올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 그래서 이제 누구도 '골리앗'이라고도 '돈성'이라고도 비아냥대기 민망해진 지금쯤, 한 번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팬들의 조용한 기대가 익어가는 2026년 전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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