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02 11:02최종 업데이트 26.06.0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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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도서관을 여행합니다. 도서관 노동자가 낯선 도시에서 발견한 도서관의 매력, 그 안에 깃든 웃음과 감동, 삶의 온기를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았습니다. 책과 사람을 잇는 여행이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기자말]
4월 중순 무렵, 도서관 동료에게 서울 영등포구에 '여의도 브라이튼 도서관'이 개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빨리 가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도시적이고 이국적인 이름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촌스러운 내 이름 탓인지, 그런 이름 앞에서는 왠지 움츠러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지인에게서 '여의도 브라이튼 도서관'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매달 '국립수목원'을 갈 만큼 자연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좋다고 하는 도서관이라면, 왠지 나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빌딩 숲 한복판에 숨겨진 숲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지난 5월 20일, 모처럼 세찬 봄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가고 싶은 마음도 빗줄기처럼 굵어졌다. 튼튼한 긴 우산을 쓰고 '여의도 브라이튼 도서관'으로 향했다. 우산 때문에 시야가 좁아진 탓일까.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들은 보이는데 도서관 입구는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여의도 브라이튼 도서관 & 영어 키즈카페'라는 현판이 보였다. 도서관이 아니라 쇼핑센터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처음 가졌던 선입견이 생각났다. 낯설고 편안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서관 입구를 지나 데스크를 지나 안쪽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알 것 같았다.

'아, 지금까지 내가 알던 도서관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구나.'

그 순간 나에게는 초능력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도서관의 감각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능력 말이다. 엄숙하고 정형화된 공공 도서관의 오랜 관성을 비워내야만 이 새로운 세계를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쓰기 취향 테스트도 가능한 공간

자료실을 향해 직진 하려던 나를 처음 멈추게 한 건 'a Day, a Story : 평범한 하루가,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라는 문구였다. 데스크 위에는 자신의 글쓰기 취향을 알아보는 테스트 종이가 놓여 있었다.

성격유형검사(MBTI) 문항에 답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체크하기 시작했는데, 질문들이 예상보다 깊었다.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하루의 가치는 어디서 비롯되나요?' 이후 제시된 세 가지 선택지를 읽는 순간, 모두 체크하고 싶어졌다. 정답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꼈다.

'두근 두근 두근...'

결과가 나왔다. '감정 재봉사'. 순간의 감정을 자유롭고 능숙하게 풀어내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테스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나와 잘 맞는 작가를 연결해, 그의 책까지 추천해 주었다. 추천 받은 작가는 프란츠 카프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집어 들고 소파 자리로 향했다. 그날 도서관에서 만난, 가장 반가운 책이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바퀴벌레로 변해버린다면, 가족들이 나를 밟아 죽이지는 않을까?' 상상하며 읽었던 책을, 빌딩 숲 지하 도서관에서 다시 마주한 것이다.

사서의 엄선된 책과 문장을 선보이는 '북큐레이션'도 인상적이었다. 마치 갤러리에 전시된 예술품 같았다. 사서가 골라 놓은 문장들을 하나씩 음미하다 보니, 책 한 권 한 권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휘황찬란한 광고 문구가 아무리 그럴듯해도, 결국 독자가 책을 선택하게 만드는 힘은 작가의 문장 한 줄에서 나온다는 것을.

북큐레이션서가갤러리야? 도서관이야?이인자

두 눈을 의심하게 했던 '합법적 낙서실'

'합법적 낙서실' 코너는 파격 그 자체였다. 물론 일부 책에 한해서였지만, 도서관 책에 낙서하고 가라니. 내 두 눈을 의심했다.

매일 도서관 데스크에 앉아 대출과 반납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내 일상이다. 가끔 이용자와 얼굴을 붉히는 순간이 있다. 훼손된 책을 반납 받을 때다. 물에 젖거나 종이가 찢어진 책은 비교적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책 속의 은밀한 낙서는 바로 눈에 띄지 않는다.

뒤늦게 책장 사이에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여백에 누군가의 감정이 적혀 있는 책을 발견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수십 명의 대출자 가운데 누가 남긴 흔적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공공도서관 책의 밑줄은 각자의 양심에 맡겨진 금기의 영역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합법적 낙서 책을 펼치며 볼펜을 들었지만, 도무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몸에 밴 금기의 근육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정말 가까스로 어떤 한 페이지에 나만의 문장을 남길 수 있었다.

합법적 낙서실정말 낙서해도 되나요?이인자

여의도 브라이튼 도서관은 대형 서점처럼 A, B, C, D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필요한 공간을 향해 곧장 걸어가게 되지 않았다. 목적지를 찾아 직진하는 공간이라기보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 걷다 보면 그곳이 어느새 목적지가 되어있는 공간에 가까웠다. 그런 의미에서 조용히 오래 앉아 책에 깊이 몰입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조금 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물고 싶은 공간이 계속 생기니 자꾸만 시선과 발걸음이 다른 곳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도시 빌딩숲에서 만난 근사한 산책길

'산책'이라고 쓰인 흰색 노트를 발견했다. '여의도 브라이튼 도서관'의 개관 기획 노트였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 안의 문장들을 읽다 보니, 내가 왜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계속 거닐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도서관이 지향한 공간의 본질은 결국 '산책'이었던 것이다. 노트 속 문장들은 놀라울 만큼 감각적이었다. 읽고 있자니, 이 글을 쓴 사서가 혹시 시인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목적지 대신 여러 갈래의 길을 두고 이정표만 남깁니다.
어디서 멈추고 무엇을 할지는 당신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우리 도서관에서 경험은 '선택'과 '탐색'의 여정입니다.
-여의도 브라이튼 도서관 개관 기념 전시 기획 노트 <머무는 방식> 중에서

개관기획노트, 산책사서가 시인이셨나요?이인자

이제 도서관 산책을 마칠 시간이 되었다. 밖에는 여전히 세찬 봄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꽤 요란했다. 그 빗소리 만큼, '여의도 브라이튼 도서관'이 내게 남긴 여운도 오래 머물렀다.

얼마 전에 즐겨보던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일명 '모자무싸'가 종영했다. 수많은 명대사가 화제가 되었는데, 브라이튼 도서관에 대한 글을 쓰던 중 한 대사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멋지다'라는 건 알겠는데, '근사하다'라는 건 어떤 의미냐는 물음이었다.

새로 지은 도서관은 대부분 멋있다. 거대한 자본으로 지어진 세련된 디자인은 사람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하지만 근사한 도서관은 조금 다른 힘으로 만들어진다. 이를테면 정말 세상에 없던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 사람을 오래 머물게 하는 감각, 도시와 자연을 연결하는 상상력 같은 힘 말이다.

여의도 브라이튼 도서관은 내게 그런 공간이었다. 지나치게 세련되었다는 선입견과 달리, 직진해야만 할 것 같은 삶의 방향과 속도를 잠시 멈춰 세우는 공간. 빌딩 숲 한가운데에서 아무 대가 없이 쉬어갈 수 있는 산책길 같았다. 그래서 이 도서관이, 아주 근사했다. 오래 오래 잊히지 않을 만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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