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kon EM촬영출하를 기다리는 술들이 자연 토굴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다.
이재필
어스름한 조명 아래서 니콘 EM의 조리개를 f/1.4로 최대한 넓게 열었다. 빛이 부족해 셔터 스피드가 1/30초까지 뚝 떨어졌다. 손이 조금만 떨려도 사진 전체가 흐려져 필름을 버리게 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지만, 카메라를 가슴팍에 가만히 붙이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멈춘 채 셔터를 눌렀다.
'툭-' 하는 기분 좋은 미러 쇼크와 함께 손바닥으로 잔잔하게 전해지는 아날로그의 진동. 한 장 한 장이 귀하고 돌이킬 수 없기에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해야 하는 이 팽팽한 긴장감이 참 오랜만이었다. 찍는 즉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와 달리, 필름 카메라는 현상소의 약품 속에 들어갔다 나오기 전까지는 그 결과를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우리는 풍경을 마음속에 한 번 더 새기게 된다. 숙성실 안에서 익어가는 술처럼, 내가 찍은 사진 역시 필름 통 안에서 조용히 익어가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저녁과 기다림의 미학
숙성실을 나와 다시 밀밭으로 걸어 나오자,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황혼의 붉은 빛이 연둣빛 대지 위로 얇은 실크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낮동안 청량하게 빛나던 초록색 밀밭은 이제 차분한 주황빛 옷으로 갈아입으며 한층 깊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당 한편에 세워진 빛바랜 경운기 바퀴 자국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보며, 카메라의 와인딩 레버를 가만히 돌렸다. 철컥, 하며 다음 장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한 마을의 저녁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오늘도 맹개마을의 양조장은 향긋한 술 향기를 사방으로 품어내며 초여름의 자연 속에 아늑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니콘 EM의 작은 뷰파인더 속에 담긴 그 풍경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를 넘어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는 단단한 생명력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소비되고 쉽게 잊히는 세상 속에서, 이토록 느리지만 정직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소중한 가치를 묵묵히 지켜가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친 일상에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전통과 자연, 그리고 사라져가는 것들을 향한 인간의 따스한 애정이 필름의 거칠고 따뜻한 질감과 참 잘 어울리는 멋진 하루였다. 제습함 속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카메라를 깨워 떠난 이번 안동 여정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기다림의 미학'을 다시금 일깨워준 소중한 출사로 가슴 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트랙터 위에서, 아직 현상 되지 않은 묵직한 필름 통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벌써 초여름 안동의 정취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눈을 감아도 뷰파인더 너머로 보았던 그 싱그러운 연둣빛 파도와 아늑한 술 향기가 여전히 곁에 머무는 듯했다.
▲Nikon EM촬영진맥소주 '시인의 바위'의 모티브가 된 바위. 옛 선비들이 바위 위에 앉아 한시를 읊고, 계곡 바람을 벗 삼아 한가로운 여름날을 보내던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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