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27 13:57최종 업데이트 26.05.27 13:57
  • 본문듣기
2022년 8월, 나나츠다테갱 붕괴 사고를 다룬 KBS <세계는 지금>의 한 장면KBS

일본 본토인 혼슈 북부에 아키타현이 있다. 일본 서해안의 북부인 이곳에서 1944년과 1945년에 발생한 비극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본에서 계속 나오고 있다. 목소리의 주인공 중 하나는 아키타현 역사교육협의회의 차타니 주로쿠(茶谷十六) 회장이다. 그는 시인·판화가들과 더불어 이 문제를 알리고자 분투하는 일본인들 중 하나다.

그가 알리려고 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아키타현의 하나오카광산에서 벌어진 '나나쓰다테갱 사건'과 '하나오카광산 사건'이다. 26일 자 국내 언론보도에서는 그가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와 함께 당시의 참상을 알리는 판화와 시에 대한 분석 결과를 국내 언론사에 제공한 일이 소개됐다.


차타니 회장은 2014년에는 '나나쓰다테갱 함몰 재해 보고서 - 외무성 소장 하나오카광산 나타쓰다테 관계 자료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썼다. 이 글은 한국 학술지인 <한일민족문제연구> 제26호에 게재됐다.

강제노역 현장에서 한국인들이 당한 참극

광주시립미술관이 펴낸 <잊혀진 사람들, 끝나지 않은 이야기 - 강제연행의 역사, 다자와호수 히메관음상의 비밀과 하나오카사건>에 따르면, 차타니 회장은 2008년에는 일본 문학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김정훈 교수를 찾아가 하나오카광산의 비극을 파헤치는 마쓰다 도키코 작가의 존재를 알리면서 당시의 참상을 설명했다. 차타니 회장이 이 문제를 알리기 위해 꽤 오랫동안 애를 썼음을 알 수 있다.

구리를 캐는 하나오카광산은 일본 정부가 관할하는 강제노역 현장이었다. 위의 <한일민족문제연구> 논문은 "중일전쟁이 개시된 이후 군사적 역할의 중대함을 고려하여 국책회사인 제국광업개발주식회사의 경영하에 들어가 군수성 직할로 증산이 독려되고 있었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광산 안에 있는 나나쓰다테갱은 작업 환경이 특히 위험했다. 이 갱은 강물과 인접한 곳에 있었다. 위 논문의 설명이다.

"나나쓰다테갱은 새로 개발된 유력 광맥으로서, 도야시키갱과 지하 연락갱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연락갱도 위 지상에는 하나오카강이 지나고 있어서 강물이 침투되는 위험천만의 상태에 있었다. 회사는 나나쓰다테갱에 인간 운반용의 독자적인 시설을 설치해달라는 현장의 요구도 수용하지 않았으며, 난굴한 후에 원상복구도 하지 않는 등 갱내 안전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결국 대형 인명참사가 일어났다. 위 논문에 따르면, 군수성과 제국광업개발주식회사의 간여하에 이곳을 관리한 도와(同和)광업주식회사의 <창업백년사>는 1944년에 발생한 나나쓰다테갱 사건을 이렇게 기술한다.

"5월 29일, 나나쓰다테갱이 갱내 복류수(伏流水)의 이상 출수로 갑자기 붕괴, 분출한 지하수는 흙탕물이 되어 순식간에 펌프실을 덮치고 연락갱도로 흘러들어 도야시키 7번 갱 이하를 모두 수몰시키는 예측불가의 재해가 발생, 붕괴 지역에서 22명의 숭고한 순직자가 나왔다."

갱 내부에 잠복해 있던 물이 갑자기 튀어나와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한국인 11명과 일본인 11명이 그대로 갱에 갇혔다. 평소에 우려했던 위험이 현실화됐던 것이다. 현장에서 구조된 피해자는 단 한 명이었다.

1명만 생존한 것은 구조 환경이 험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 조난자의 생명보다 광산의 이익이 우선시된 결과였다. 위 논문은 "주(主) 갱도였던 도야시키갱을 보전하기 위하여 광산감독국·오다테경찰서는 협의 끝에 '조난자들은 순직한 것으로 보고' 갱내 구출작업을 중지했다"고 설명한다.

나머지 갱을 보전하기 위해 구출 작업을 중단하고, 조난자들은 죽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 뒤 "(갱도에) 대량의 토사를 주입"했다. 구조 실패가 아니라 사실상의 학살이었던 것이다.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나은 대우를 받기는 했지만, 위 22명은 일본 국가권력의 착취를 당하는 똑같은 민중들이었다. 이 광산에서 강제노역을 당한 일본인의 경험을 담은 '투쟁하는 조선인들'이라는 시를 읽어보면, 이곳에서 노예처럼 일한 한일 양국 피해자들 사이에 제한적이나마 연대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광주시립미술관 책에 소개된 시다.

조선의 노동자들
농부들도 징용되어 왔지
그 한반도 사람들
마침내 참지 못하고
우루루 사무실로 몰려와
"임금을 올려라!"
"배급을 똑바로 해라!"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손뼉 쳤지
조선인들이지만 용기가 대단해!
모두가 어찌할 수 없던 그때
너무나도 심한 대우에
징용공들은 밤에 도망치기 일쑤였지

갱도 주변으로 물이 흐르는 이 광산의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는 '물'이 특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물이 많아지면 이들의 생명과 안전이 위험해졌다. 그런데 이들은 그 '물' 말고 또 다른 '물'이 넘치는 것도 경계했다. 그것은 밥솥의 물이었다. 피해자들은 밥 지을 때 물을 많이 넣지 말라고 광산 측에 항의했다.

광주시립미술관 책은 "물을 많이 넣으니 저울에 단 밥은 무거워졌으며, 그만큼 쌀의 양이 줄어서 '물을 많이 넣지 말라'고 항의했다"고 기술한다. 이처럼 먹는 것마저 열악한 최악의 환경 속에서 강제노역을 당하던 한·일 양국 사람들이 1944년에 그처럼 비극적인 참변을 당했다.

성의 없는 일본의 태도

2022년 8월, 나나츠다테갱 붕괴 사고를 다룬 KBS <세계는 지금>에서 인터뷰한 차다니 주로쿠 회장. 위령비를 세워달라는 요구가 관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KBS

일본 정부와 광산 당국은 참극의 원인이 강물 때문이었다는 판단하에 강줄기를 바꾸는 공사에 착수했다. 이때 동원된 사람들은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다. 이들 역시 참사를 당했다. 위 미술관 책에 따르면, 마쓰다 도키코 작가가 쓴 <땅밑의 사람들>은 하나오카사건으로 불리는 이 참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986명의 중국인 포로가 군과 가지마구미에 의해 아키타현의 광산 하나오카에 강제연행당해 전시 증산을 위한 수로변경 공사 및 댐 공사에 투입돼 일본의 패전까지 불과 1년 사이에 42.6%에 이르는 420명이 아사·혹사·사형 또는 포로의 집단봉기 후에 일어난 대규모 탄압과 폭력으로 생명을 잃은 참혹한 사건."

나나쓰다테갱 참사의 재발을 막겠다며 중국인 986명을 투입한 일본은 그 절반 가까이를 죽이거나 죽게끔 만들었다. 일본 당국이 막고자 했던 '재발'이 인명 참사의 재발이 아니라 작업 차질의 재발이었다는 점은 중국인 피해자들을 그처럼 함부로 다룬 데서도 역력히 증명된다.

나나쓰다테갱 사건과 하나오카광산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가 책임 있는 태도를 보였다면, 차타니 회장 같은 일본인들이 두 사실을 알리고자 그처럼 오랫동안 절치부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일본 당국의 태도는 무성의 그 자체였다.

참변 직후에 유족들이 강력히 요구한 것은 유해 발굴 및 수습이다. <한일민족문제연구>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유해와 유골을 수습해 합동위령제를 거행한 뒤 고국으로 송환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그 후의 경과를 보면, 이 유해 인양과 유골 송환의 약속은 전혀 실행되지 않고 있다"라고 이 책은 지적했다.

두 사건이 발생한 것은 82년 전과 81년 전이다. 유해·유골 수습의 성과 여하를 떠나 일본 정부가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약간의 성의만 보였다면, 차타니 같은 일본인들이 오랫동안 힘겨운 싸움을 벌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성의가 없다는 점은 이런 데서도 증명된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