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27 12:08최종 업데이트 26.05.2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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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46주년 및 위르겐 힌츠페터 10주기를 맞아 다큐멘터리 영화 <내 이름은 원덕기>를 제작하기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펀딩 참여자의 이름을 기재합니다. 대한민국, 그리고 광주를 사랑한 팀 원버그(한국 이름 원덕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펀딩 바로가기 https://omn.kr/2i36q[편집자말]

평화봉사단원으로 각각 광주와 나주에 머물다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팀 원버그(왼쪽)와 폴 코트라이트가 항쟁 이전 한센인 정착마을인 호혜원에서 찍은 사진.폴 코트라이트 제공

평화봉사단원으로서 팀 원버그와 함께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폴 코트라이트가 지난 18일 오후 복원 후 처음 문을 연 옛 전남도청 내부에서 46년 전 항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강상우

팀 원버그가 "온 감각과 마음(his whole being)을 다해 국가폭력을 증언했"던 전남대병원 옥상. 1980년 5월 그 현장에 함께 있었던 동료가 46년 만에 같은 자리에 다시 섰다.

항쟁 5일차인 1980년 5월 24일,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의 전경을 담고 싶다"고 했고 팀(Tim Warnberg, 만 25세에 5·18민주화운동 경험 후 1993년 작고) 평화봉사단 동료들은 그를 전남대병원 옥상으로 안내했다. 그곳에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 71)도 있었다. 힌츠페터의 인터뷰 제안에 팀은 "광주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며 기꺼이 응했다.


그때의 인터뷰 영상이 46년 만에 세상에 공개됐다. 5·18 46주기인 지난 18일, 폴은 1980년 5월 이후 처음으로 다시 전남대병원 옥상에 섰다. 그 영상의 배경인 금남로는 참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한편으론 또 그대로였다. 폴은 우뚝 솟아 시야를 가린 고층 건물 사이로 여전히 남은 옛 전남도청과 전일빌딩 인근을 한참 응시했다.

어렵게 입을 뗀 그는 "여러 감정이 밀려온다"며 "팀도 이 모습을 함께 봤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어 취재진을 향해 "여러분과 만났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팀이었어야 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5·18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팀이 정말 결정적인(critical)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시 팀이 인터뷰로 묘사한 것들, 제가 본 것들 모두 결코 잊지 못할 것들이었습니다. 5·18은 그의 삶의 일부가 됐고, 제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평화봉사단원으로서 팀 원버그와 함께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폴 코트라이트가 지난 18일 광주 동구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46년 전 같은 곳에서 찍힌 사진을 보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강상우

폴은 46주기 기념식 참석을 위해 지난 4월 10일 한국에 입국했고, 지난 5월 17~19일 광주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마이뉴스>는 사흘 간 그와 동행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폴은 한글이 적힌 넥타이를 맨 채 처음 기념식에 참석했고 항쟁의 복판이었던 금남로와 복원 후 처음 개관한 옛 전남도청, 그리고 희생자가 잠들어 있는 구·신묘역을 차례로 찾았다.

폴은 지난 2020년 출간된 회고록 <5·18 푸른 눈의 증인>의 저자이기도 하다. 1979년 미국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전남 나주의 호혜원(한센인 정착촌)에 파견돼 약 2년 간 근무한 그는 이후 평생을 안과 의사로 살았다. 폴의 광주 방문은 회고록 출판 전인 2019년 현장 답사를 위해 찾은 이후 이번이 두 번째다.

광주 곳곳 팀과의 추억

평화봉사단원으로서 팀 원버그와 함께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폴 코트라이트가 지난 18일 광주 동구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46년 전 같은 곳에서 찍힌 사진을 보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강상우

폴이 추억하는 '팀과 함께한 장소'는 전남대병원만이 아니었다. 팀은 항쟁 초반 광주역 인근 자신의 하숙집에 머무르며 다른 평화봉사단원들과 "방패"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또 "평범한 광주시민"을 "폭도"로, "시민들의 항쟁"을 "북한이 배후"라고 왜곡하는 TV 뉴스에 분노해 불탄 광주MBC 건물(당시 전남여고 맞은편)도 찾아갔다. 계엄군이 잠시 물러간 뒤 시민들의 행진과 집회가 이어졌던 금남로와 분수대도 팀은 꾸준히 찾았다. 아직 노랗게 물들지 않은 은행나무와 도청 계단 또한 외신기자와 시민수습대책위의 통역을 위해 그가 지나쳤던 곳이다. 이 모든 곳에 폴도 함께 자리했다.

"5월 19일에 저는 팀의 하숙집으로 갔습니다. 그때 팀은 저와 주디(또다른 평화봉사단원)에게, 그 집에 있던 젊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머물러 줄 수 있겠냐고 요청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계엄군들 사이에 "방패(barrier)" 역할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군인이 집에 오게 되면, 저와 주디는 젊은 학생들 대신 앞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팀은 다른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곳에는 또 다른 젊은 학생들이 머물고 있었고, 군인이 그 집에 들어오려고 할 경우 자신이 그들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평화봉사단원으로서 팀 원버그와 함께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폴 코트라이트가 지난 16일 서울 은평구 이호철북콘서트홀에서 열린 책 <5·18 푸른 눈의 증인>의 북콘서트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은 해당 책을 번역한 최용주 전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1과장이고, 가운데 사진은 1980년 5월 24일 전남대병원 옥상에서의 위르겐 힌츠페터(왼쪽 카메라를 든 인물)와 팀 원버그(가운데 체크무늬 셔츠)의 모습이다. 그의 뒤편에 또다른 단원 폴 코트라이트와 데이비드 돌린저가 서 있다.전선정

폴은 "또다른 평화봉사단원 에릭"에게 들었던 팀의 행적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는 "그때 팀은 군인들이 사람들을 쫓아가 때리기 시작할 때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그만두라'고 말하며 상황을 멈추게 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같은 날, 나도 광주버스터미널(현 대인교차로 인근)에서 군인이 젊은이를 진압봉으로 내리치는 것을 봤는데, 팀이 (직접) 군인들을 말렸다는 것을 듣고 (그렇지 못한 내 입장에선) 당황스러웠고 죄책감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폴은 "광주를 떠나라는 주한 미대사관의 지시를 받았을 때 팀이 가장 단호하게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던" 순간 역시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우리 모두가 광주에 머무르는 게 중요하다고 느꼈지만, 그중에서도 팀이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남기를 원했다"고 강조했다.

"우리 모두 광주를 떠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시민들에게 매우 잔혹한 폭력을 저지르는 한국 군대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떠났다는 사실을 광주 시민들이 알게 됐을 때 '친구를 버렸다'고 느낄 수 있었으므로 그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광주에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시민들에게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걱정하고 있고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 필요했습니다."

외신기자 통역 자처한 이유

46주기 기념식 직후, 폴과 함께 옛 전남도청 앞에 섰다. 그는 도청 입구 앞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그때도 친구들과 한국어로 '은행나무'라고 불렀다"고 회상했다. 도청 안에서 폴은 팀과 외신기자 통역을 도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외신기자들이 왔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안도감과 고마움이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이곳에서 실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기록해줄 사람들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광주로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보고 매우 기뻤고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기자들이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난 기자들이 위르겐 힌츠페터(ARD), 로빈 모이어(타임), 테리 앤더슨(AP통신) 등이었다. 5월 24일은 평화봉사단원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외신기자들을 데리고 도청으로 향했고, 2층 부지사실에서 진행된 시민수습대책위의 논의 내용을 외신기자들에게 통역해 전달했다. 46년 만에 그때 그 자리를 다시 찾은 폴은 "그중 가장 뛰어났던 팀의 한국어 실력"을 이야기하며 "당시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한 팀의 의무감과 책임감(이 컸다)"고 강조했다.

평화봉사단원으로서 팀 원버그와 함께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폴 코트라이트가 지난 17일 광주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강상우

팀을 상대로 한 힌츠페터의 전남대병원 옥상 인터뷰는 이 직후에 이뤄졌다. 힌츠페터는 전날 도청 인근 숙소에서 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팀은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며 이에 응하기로 결심했다. 폴을 비롯한 다른 평화봉사단원들도 "팀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인터뷰를 하는 것에 모두 동의"했다.

폴은 영상 속 팀이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것을 두고 "사전에 동료들과 팀이 무엇을 입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논의한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선글라스를 쓴 건 최소한의 익명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며 "한국 군부가 팀의 신원을 알아차릴 경우 매우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인터뷰를 취재진을 통해 46년 만에 본 폴은 "팀에게도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을 이렇게 다시 보는 게 반갑고 뜻깊다"라고 말했다.

"팀이 자신의 온 감각과 마음(his whole being)을 다해 직접 목격한 것들을 증언하고 있네요. 이런 건 숨길 수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가 실제로 본 것이었고, 그 시기 그의 삶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폴은 "영상 속 팀의 떨리는 목소리가 분명히 느껴진다"며 "그런 폭력을 목격하고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더해 "팀은 사람들과 아주 잘 어울리고 인간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일이 그에게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라며 "무엇보다 팀의 친구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당시 구타당하고 살해당한 젊은 학생들은 그의 친구들이자 공동체였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팀이 오늘날 광주와 한국 사회가 5·18을 기억하고 기리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정말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했을 것"이라며 "그래서 이 인터뷰 영상을 보며 여러 감정이 동시에 밀려온다"라고 말했다.

평화봉사단원으로서 팀 원버그와 함께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폴 코트라이트가 지난 17일 광주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던 중 46년 전 항쟁 당시 팀의 인터뷰 영상(위르겐 힌츠페터 촬영)을 바라보고 있다. 강상우

선명한 그들의 추억 '전남 반찬'

폴의 기억 속에서 팀은 항쟁의 순간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팀보다 1년 늦은 1979년 중순 한국에 입국한 폴은 한센인을 대상으로 의료봉사를 할 때 팀의 도움이 컸다고 회상했다.

그는 "팀이 나주의 한센인 정착마을 두 곳 중 한 곳(현애원)을 지원해 주겠다고 해서 나는 나머지 한 곳인 호혜원으로 이사해 그곳에 집중할 수 있었다"며 "내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 호혜원 마을 이장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을 때도 팀이 유창한 한국어로 나의 봉사활동을 도왔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팀이 얼마나 배려심 깊고, 헌신적인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해주면 좋겠다"라며 "광주에서 내가 만난 팀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폴은 "가끔 광주를 경유해 서울·대구 등 한국 곳곳을 방문할 때에 팀의 하숙집에 머물렀다"며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하며 거의 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관에 머물 돈이 충분하지 않았는데, 팀은 항상 자신의 하숙집에 머물 수 있도록 내게 자리를 내어주곤 했다"라고 떠올렸다. 이어 "함께 '전남 반찬'을 즐겨 먹었던 기억도 생생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전남의 반찬 문화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다양한 음식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김치와 여러 가지 생선들 등 식탁을 작은 접시로 가득 채우는 것들 말입니다. '전남 반찬'이야말로 우리가 이곳 음식 중 가장 좋아했던 것이었습니다."

평화봉사단원으로 각각 광주와 나주에 머물다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팀 원버그(왼쪽)와 폴 코트라이트가 항쟁 이전 한센인 정착마을인 호혜원에서 찍은 사진.폴 코트라이트 제공

서로를 믿을 수 있도록 해준 사람

폴에게 "매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내일이 오늘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던 항쟁의 한 가운데에서 어떻게 팀의 결정을 지지했는지" 물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5·18 중 그의 결정이 한국과 광주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폴은 당시 평화봉사단원 중 팀이 긴 기간(1978년~1980년) 광주에 머물렀던 점을 언급하며 "광주는 팀에게 자신의 집이자 고향같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더해 "그래서 팀은 광주에 대해 매우 강한 책임감을 느꼈고, 광주의 일부(to be part of Gwangju)처럼 행동했다"며 "때문에 팀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리더 같은 존재가 됐다. 그는 우리를 이끌었다"라고 말했다.

"팀의 동기는 언제나 사람들을 돌보는 것(caring for the people)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중심에는 항상 '우리가 광주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았습니다. 그는 함께 있으면 확신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견이 거의 없었고, 팀의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점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폴은 이번에 처음 본 팀의 인터뷰 영상과 팀이 1987년 쓴 논문(The Kwangju Uprising: An Inside View (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을 되짚으며 "당시 광주에 있던 외국인 공동체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도, 광주의 이야기를 가장 온전히 기록해낸 사람도 역시 팀"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내가 2020년 5·18 회고록을 쓴 이유는 내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는 팀이 세상을 떠나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쓸 수 없게 됐기 때문"이라며 "만약 팀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었다면, 아마 회고록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팀은 실제로 시민들의 항재와 군의 잔혹한 폭력을 훨씬 더 가까이에서 긴 시간 겪었다"라며 "그의 5·18 이야기는 그 어떤 평화봉사단원이 쓸 수 있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넓고 풍부할 것"이라고 답했다.

끝으로 폴은 "팀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46년 전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언젠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있을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할 것인지 말입니다. 1980년 5월, 저와 주디 그리고 또다른 평화봉사단원 데이비드는 팀 덕분에 자연스레 광주 시민들과 외신기자들에게 '우리가 돕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팀은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확신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내리는 결정이 결국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평화봉사단원으로서 팀 원버그와 함께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폴 코트라이트가 지난 18일 오후 복원 후 처음 문을 연 옛 전남도청 내부에서 46년 전 항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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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소중한 취재 소중한·전선정·김화빈·이진민·유지영
촬영 강상우·이희훈 편집 콘텐츠팜 호미
CG 김수연 타이틀 김소설 음향 DMC 사운드 비전 내래이션 이승준
펀딩 기획 장유정·이기종·봉주영
영상 제공 5·18기념재단·루먼 형제(Ben&Sam Luhmann)
영상 번역 자문 로버트 그라찬
사진·자료 제공 고진석·나경택·서나래·유경남·변재원·안영주·록산 원버그 윌슨·데이비드 돌린저·폴 코트라이트·캐롤린 투르비필·케빈 페어뱅크스·로버트 그라찬·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외교사료관·박지원 의원실
촬영 협조 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전남대병원·전일빌딩245·국가보훈부·별밭·필로스팅하우스
제작 지원 광주광역시·광주광역시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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