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1월 23일 자 <조선일보> 기사 "학원침투간첩단 21명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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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발생한 1975년 당시에는 재일교포 유학생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장학금 지원이 없었다. 그래서 그 대다수는 자비 유학생이었다. 1976년 9월 6일 자 <경향신문> 사설은 이런 현실을 지적하면서 "겨우 한 해 3백 명 내외의 자비 유학생이 있을 따름"이라고 전했다.
김기춘이 수사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대서특필한 1975년 11월 23일 자 <조선일보> 기사는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에 따라 모국 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 암약해온 재일 유학생을 주축으로 한 간첩단 일당 21명을 검거"했다고 보도했다. 당시의 재일교포 유학생 규모를 감안하면, 꽤 많은 학생들이 하나의 간첩 사건으로 엮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 관련자인 백옥광(1975년에 27세)은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뒤 1990년에 가석방되기는 했지만 사건 당시에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최연숙(24세)과 강종건(24세)은 징역 및 자격정지 각 5년, 김동휘(21세)는 징역 및 자격정지 각 4년, 장영식(26세)은 징역 및 자격정지 각 3년을 받았다.
전체 재일교포 유학생 중의 상당수가 연루됐고 피고인들의 형량이 위와 같았던 데서 나타나듯이 이 사건은 비중이 높은 공안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김기춘의 핵심 공로로 평가됐다.
그가 1990년에 5·16민족상 안보부문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도 이 사건이 거론됐다. 그해 5월 3일 자 <경향신문>은 "공안사범 등의 수사에 헌신, 자유민주체제 수호와 국가안보에 이바지"한 인물이라면서 그의 핵심 공로를 이렇게 열거했다. 아래 기사 속의 "19명"은 "21명"의 오기다.
"특히 70년대 중반 이후 급증한 북한의 우회침투 간첩 색출에 수사력을 집중, 75년 국내 대학 유학생으로 위장 침투, 학원 시위를 배후 조종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19명을 검거하고, 77년에는 재일교포 간첩 강모 등 지금까지 간첩 58명과 반국가·안보위해사범 2백 40명을 검거, 북한의 대남공작 역량을 분쇄하는 데 공헌해왔다."
김기춘의 이 사건 수사는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수사 방식은 상식적으로 납득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9권 '재일동포 유학생 김동휘 간첩 사건' 편에 인용된 당시의 판결문 요지에 따르면, 수사 과정에서 밝혀졌다는 김동휘의 주요 행적은 이렇다.
"1973. 2월 말 백옥광과 회합하여 한국유학 계획을 통고하고, 이른 시일 안에 국어를 해독하고 교우와 학교 당국으로부터 신망을 얻도록 노력하라는 내용으로 이른바 동조세력 규합 활동을 하라는 지령을 받는 동시에, 의학개론 1권을 수수한 후 1973. 3. 30. 대한항공기 편으로 입국"
일본에서 백옥광은 김동휘에게 "한국어를 빨리 해독하고 교우와 학교의 신망을 얻도록 노력하라"고 격려했다. 선배가 후배에게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이처럼 평범한 조언이 "동조세력 규합 활동"에 관한 지령으로 해석됐다는 것은 위의 판결문 요지에서 확인된다.
3주간 고문한 결과로 얻어낸 자백

▲1989년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이 검찰청에서 현안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백옥광이 김동휘에게 건넨 것은 암호명이나 난수표 같은 간첩의 표식이 아니라 <의학개론>이라는 한 권의 서적이다. 김기춘 수사팀이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갔다고 파악한 것은 그것뿐이다. 물증으로 내밀 만한 것이 마땅치 않으니 선물 받은 책을 제시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판결문 요지에 적시된 김동휘의 또 다른 행적은 이렇다.
"1973. 6월 중순 대학생 30여 명으로 구성된 영탑회에 가입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백옥광에게 활동 사항을 보고."
영탑회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성균관대·이화여대 학생 30명 정도가 참여한 친목 서클이었다. 이곳에 가입한 김동휘가 백옥광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이것도 간첩활동에 대한 보고 행위로 해석됐다.
김동휘의 서울 시내 산책도 그런 식으로 포장됐다. 판결문에는 "1974. 9월 초 청량리역 주변, 청계천 7가와 미아리 등지를 배회하면서 서울의 서민 생활상, 학생 동향, 경제정치 정세 등에 관한 국가기밀을 탐지·수집·간첩하고"라는 대목이 있다. 지금의 도로 사정을 기준으로 하면, 청량리역에서 미아리고개까지는 도보로 1시간 10분에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김동휘가 그 시간 동안 거리를 배회하면서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수집했다는 것이 당시의 수사 결과다.
김동휘가 국가기밀을 보유한 기관이나 당국자에게 접근했다는 내용은 판결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출입국 기록 자체와 일상적인 언행 등이 간첩행위의 증거로 해석됐을 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가혹행위의 결과물이다. 김동휘의 신청을 받고 진실규명에 나선 진실화해위원회는 "중앙정보부는 신청인을 영장 없이 연행하여 20일 동안 불법으로 구금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차단한 채 허위로 자백할 것을 강요하며 구타 등 가혹행위를 하고 잠 안 재우기 등 강압적 조사를 하였음이 확인"된다고 위 보고서에서 밝혔다.
약 3주간이나 고문한 결과로 얻어낸 자백이 위와 같은 내용들이다. 이를 과감하게 간첩활동으로 포장할 수 있는 수사관이나 수사 검사들이 반공정권하에서 출세했다. 셜록 홈스처럼 용의자를 신사적으로 대하고 증거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며 추리를 합리적으로 하는 수사 전문가들은 이런 환경에서 성장하기 힘들었다.
김동휘 등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것은 재심 재판을 통해 확인됐다. 2013년에 서울중앙지방법원이 '국가는 김동휘의 피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할 수 있었던 것은 재심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됐기 때문이다. 셜록 홈스를 기죽이는 수사 환경을 조장한 대한민국의 잘못으로 인해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진실이 파묻혔고, 그 사이에 피해자들의 한과 응어리는 국가배상금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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