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우리들의 농경사회>(이소정)
민음사
문복과 선지, 주인공 '나'는 기도원에서 함께 자란 사이. 얼마 전 죽은 기도원 동기 '주경'이 남긴 유산이 있는 산속으로 셋은 다마스를 끌고 도주한다. 그곳에서 이들은 '구순태'라는 말이 짧고 강직한 어른을 만나 땅을 고르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둬들이는 일에 합류한다.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는 이곳에서 유튜브를 보는 대신 콩을 고르며 '기도하는 사람'에서 '일꾼'이 되어간다.
기도원에 갇힌 채 한 일이라곤 기도와 포교 활동이 전부였던 세 사람. 12월 소한부터 11월 대설까지 구순태의 '농경사회'를 살아낸다. 소설의 묘미는 모든 이야기의 챕터가 계절 변화를 나타내는 '절기'로 되어 있다는 것인데, 가령 1월 우수엔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 6월 소서엔 "썩은 풀이 반딧불이 된다" 등 목가적인 소제목들이 독특해 소설이 더욱 궁금해진다.
그러나 속지 마시라. 목차는 '페이크'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자연의 풍요 속에서 먹고 일하고 쉬는 생태적 서사가 펼쳐질 것 같지만 소설은 추적과 죽음, 생존이 난무하는 서스펜스가 또아리를 틀고 독자를 긴장케 한다. "아주 단순한 일들이 우리를 버티게" 하는 농부의 계절 아래, 이들은 '겨울'로 상징되는 기도원에서 끓는 오지의 '여름'으로 삶터를 옮겨와 생존의 몸부림을 시작한다.
논밭엔 있고 물류센터엔 없는 것, '계절과 시간'
생면부지의 땅에서 멸치를 씹으며 허기를 달랜 세 사람. 밤엔 황토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엔 구순태를 따라 작물을 심는 삶을 반복한다. 애초 죽은 주경이 남긴 유산을 처분하러 오지에 왔던 세 사람은 "여기 시세가 어떻게 돼요?" 구순태에게 묻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별안간 한옥을 짓는 레시피들. 급기야 순태는 말한다. "팔려고 집을 짓는 사람은 없다, 살려고 짓는다. 내 사람들과 살려고."
어딘가 현자 냄새가 나지만, 순태와 함께 사는 오지 생활 역시 녹록지만 않다. 김 폴폴 나는 잔치국수를 나눠먹고, 잡초를 뽑으며 더 이상 기도는 안 해도 되는 불안에선 벗어났지만, 땅 위로 붉은 기운이 불안하게 엄습해온다. 구제역이 발발한 이후, 세 사람이 있는 산 근처 동물들이 생매장 당한 것. 생생한 계절에 살아있음을 느꼈던 이들의 '농경사회' 또한 아슬아슬해진다.
그 무렵, 세 사람이 정착한 오지 근처에 대형 물류센터가 세워지고, 주민들은 이를 '로켓'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주인공과 친구 문복은 '로켓 버스'를 타고 산 아래 물류센터 알바 일에 뛰어들지만 "시절 인연"도 아닌 "시간제 인연"이 오가는 익명의 노동 속에서 점점 피폐해진다.
어느 날, 주인공과 문복은 정가의 반값에 파는 음료 자판기의 정체를 알게 된다. 점심시간마다 '음료수 쟁탈전'이 벌어지고 쟁탈전에 낙오돼 일주일째 음료수를 못 마신 두 사람은 시위를 감행한다. 기계를 늘려 무한정 음료를 제공할 것을 물류센터 측에 요구하지만 "시간제 인연" 속에서 관심을 주는 동료는 없고, 이들은 안전화로 자판기를 부숴버린다. 그리고 분노한다.
"잘 생각해 봐.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적이 만든 이 시스템의 핵심. 엄밀히 말하면 자판기가 우리 일자리를 뺏은 거야. 기계화, 자동화. 그것부터 제거해야 해. 그래야 우리의 노동이 정당하게 대우를 받아."
- <우리들의 농경사회> '한로: 국화가 노랗게 피고 초목이 누렇게 진다' 장 중에서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노동은, 있다
물류센터에서 쫓겨난 이들은 다시 '농경사회'로 돌아와 가을을 살아낸다. 가족이 떠나고 티브이가 고장나 고독에 몸부림쳤던 구순태가 "새 티브이를 사러 하이마트"에 가는 대신, 이곳에 정착한 사연도 책 말미에 드러난다. 이윽고 밭에 스며든 오물을 추적하다 생매장 당한 동물이 묻힌 구덩이를 찾아낸 인물들은 목도하고 만다. 끔찍한 고통이 '재림'해 붉게 엉킨 죽은 가축들의 세계를.
소설은 숨을 곳이 필요해 오지에 정착한 이들의 불안과 가끔 소박하게 깃드는 평온을 날씨처럼 그려낸다. 기도원 동기 주경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 기도원의 '어머니'가 교주가 된 과정, 구순태가 일군 땅 위에 주인공이 씨를 뿌리는 이유를 독자는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소설은 꼭 농경 방식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사회가, 이 세계가 지금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묻는다.
"나무는 나무, 모이면 숲처럼 보이게 한다. 산은 그래서 한 사람의 얼굴이다. 사람만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닮았다는 걸 모른다."
- <우리들의 농경사회> '대설: 범이 교미를 시작한다' 장 중에서
인간은 매일의 노동 가운데서 유독 보지 않는다. 비 오고 눈 내리는 자연의 이치만큼, 매일 벌어지는 '타인의 감정'이라는 닮은 세계를. 한나 아렌트는 이야기한다. '공론의 장'에 자신을 드러낼 때, 즉 노동으로 생명을 유지하며 '세계'를 만들고, 타인과 관계 맺을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고.
주인공은 도통 구원이 어려운 이 세계에서 사람에 기대 이제 인간으로 서려 한다. 그 인간됨의 기술은 작가가 건넨 질문,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노동'의 모양과 다르지 않다. 소설가 이소정은 "잊힌 생존의 기술과 살아 있는 리듬,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독자와 생각해보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현실 노동 속에서 개인의 자아가 사라지는 세태를 꼬집는 기존 소설들 사이에서 이 소설은 독보적이다. 우리 삶을 살리는 노동의 자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차갑고도 시원하게 숙고하므로. 일터에서 자기 증명과 속도전 사이에서 조금씩 미쳐가는 기분이라면, 이 묘한 사회에 진입해보길 바란다. 사시사철 절기와 시간을 알아차리는, 본래 '삶의 회복'을 꿈꾸자는 제안이 알싸한 우화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시스템에 온몸을 구겨온 산업 속 우리를, 관계 맺음과 타인의 감정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 마음을, 남몰래 경직될 수밖에 없었던 고통을 깨트려주는 이야기가 이제 막 당신 곁에 도착했다. 겨우내를 뚫고 깨어나는 개구리처럼, 소설은 먹고 일하는 삶 속 '경칩'의 기쁨을 타진한다.
우리들의 농경 사회
이소정 (지은이), 민음사(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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