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25 19:48최종 업데이트 26.05.25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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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인력과 물질만 착취해 간 것은 아니다. 일제는 식민지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들어갈 지식과 정보의 흐름도 차단했다. 식민지 시기의 정규대학은 경성제국대학뿐이었다. 지금의 이화여대·고려대·연세대로 계승될 이화여전·보성전문·연희전문이 있었지만, 이 학교들은 대학이 아닌 전문학교였다.

일제가 인문교육을 제한하고 주로 기술교육만 허용했다고들 하지만, 기술교육에서도 민족 차별이 많았다. 전문가 수준의 기술교육이나 과학교육은 한국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1960년대 중반에 노벨화학상 수상이 가능했던 세계적 학자 중 하나가 고 이태규(1902~1992) 카이스트 명예교수다. 대한화학회가 펴낸 이태규 전기인 <나는 과학자이다>에 따르면, 중등학교인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한 그는 알파벳 글자가 12개보다 많은 현실 앞에서 당황했다.

그가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접했던 알파벳은 ABCDEFGHI와 XYZ뿐이었다. 그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의 물리 교사가 첫 수업 때 인트로덕션(introduction)이라는 단어를 칠판에 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무슨 철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중등학교만 나온 사람들은 독학을 하지 않은 한은 외국어로 적힌 과학 지식을 접할 수 없었던 식민지 한국의 교육 현실을 반영하는 장면이다.

<초등과학교육> 2022년 제41권 제2호에 실린 이면우 춘천교육대 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교사 윤재천이 본 조선의 초등과학교육'은 구한말 때인 1895년 상황을 언급하면서 "이 시기에 3가지 종류의 이과 교과서가 출판되어 조선 나름의 근대 과학교육이 실천"됐다고 설명한다. 이런 흐름이 일제 강점으로 단절돼 한국의 과학교육이 세계 수준과 동떨어지게 됐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화학공학을 위해 해방 직후부터 분투한 학자 중 하나가 고 이재성(1924~2016) 서울대 교수다. 이태규가 이론 분야에서 두드러졌다면, 이재성은 산업 실무 쪽에서 두각을 보였다.

새로운 화학 지식을 한국에 보급

화학공학자 이재성과학기술유공자지원센터

1924년 4월 27일 지금의 황해북도 수안군에서 출생한 이재성은 만주제일신경중학교-여순고등학교를 거쳐 19세 때인 1943년에 도쿄제국대학 응용화학과에 입학했다가 2년 뒤 중단하고 귀국했다. 이로부터 5개월 뒤 8·15 광복이 있었고, 그해 12월 경성대학 응용화학과에 편입해 이듬해 7월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서울대 교수요원이 된 그는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을 며칠 앞두고 컬럼비아대학 화학공학과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뒤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고국의 학계에 강한 인상을 주는 행보를 걸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발행한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백과> 이재성 편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학위를 받자마자 전쟁의 포화에 휩싸인 조국으로 돌아와 임시수도 부산에 설립된 전시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4년 서울대학교는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남은 캠퍼스로 환도했다. 공과대학은 교사(校舍)는 물론이고 모든 실험기기가 도난당하거나 파괴되어 문자 그대로 공대(空大) 인 상태였다. 이재성은 파괴된 실험기기를 일부 수리하고 공대 주변 마을을 돌며 형태가 온전한실험용품 몇 점을 수거해서 대학교육의 명맥을 이어갔다."

전쟁 중에 귀국한 그는 새로운 화학 지식을 한국에 보급하는 데 힘썼다. 그가 박사과정 입학을 보류하고 이렇게 한 것을 두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운영하는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 사이트의 이재성 편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부산에 피난 중인 서울대로 복귀했다"고 평가한다.

과학자를 평가하는 글에 '살신성인'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지는 않는다. 그에게서 공부했거나 그를 아는 지식인들은 그가 자신을 희생해 인(仁)을 성취했다고 평가했다. 인간과 세상을 향한 책임감을 갖고 학문에 임하지 않았다면, 그가 성인(成仁)했다는 평이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유학 2년 만에 '성인'하는 바람에 그는 박사과정에 입학하지 못했다. 이때 못다 한 박사과정은 12년 뒤인 1964년부터 4년간 컬럼비아대학에서 이수했다.

임시 수도에서 활동했던 그는 휴전 뒤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지금의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서울공대 캠퍼스로 복귀했다. 그 직후에 그가 주력한 일은 텅 빈 공대(空大)를 내실 있는 공대로 채우는 일이었다. 위의 유공자 백과에 언급됐듯이, 공대 주변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학교 실험기기를 돌려주시라는 부탁도 하고 다녔다.

이재성의 화학교육은 식민 지배로 인해 억압된 화학교육을 재생시키는 의미가 있었다. 동시에, 전쟁 때문에 피폐된 화학교육을 복구하는 의미도 있었다. 고국의 화학교육에 열정을 가진 학자가 전쟁 중에 2년간이나 태평양 건너에 있었느니, 그 기간 동안 그가 얼마나 애를 태웠을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화학공학 교수로서 그가 남긴 대표적 업적은 기술 인력의 대거 양성이다. 위의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 사이트는 "국내 최초로 서구식 화학공학 강의를 시작하며 향후 중화학공업 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재를 육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한다.

그러면서 "그의 노력으로 전후 복구사업에서 꼭 필요했던 비료·시멘트·판유리 등을 생산하는 화학공장을 설계하고 건설 및 운전할 수 있는 화공 엔지니어들이 양성되었다"고 기술한다. 그런 뒤 "화공 인력들의 활약으로 정유 및 석유화학공업이 중화학공업의 중심 산업이 되었고, 한국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효자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덧붙인다.

화학공학이 탈식민지화 이루는 데 기여

제3회 아시아·태평양 화학공학회의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는 이재성 교수과학기술유공자지원센터

이재성은 화학 발전의 토대가 될 기념비적 성과들도 생산했다. 그중 하나는 지금처럼 중동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누가 이기든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한국의 에너지 현실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었다.

그가 34세의 서울대 교수였을 때 발행된 1958년 12월 26일 자 <동아일보>는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1957년에 발사한 일을 상기시키면서, 한국 과학의 낙후된 상태를 "세계 과학무대하고는 격리된 20세기의 고도(孤島) 한국의 과학계"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런 뒤, 낙후된 한국이 1958년에 거둔 화학공학의 획기적 성과로 이재성의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서울공대 이재성 교수는 무연탄의 깨스화와 액화에 2년 여를 두고 연구해오던 중, 시험적인 규모나마 무연탄 깨스에서 휘발유를 추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공업화에 성공만 한다면 가정 및 공장의 연료 문제를 비롯하여 막대한 외화를 소비하고 있는 깨소린의 국산화도 가능시되며"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펴낸 또 다른 책자인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 이미지책> 제1권 이재성 편은 국산 무연탄으로 인조석유를 합성해 낸 위의 성과와 더불어, 이재성이 이뤄낸 여타의 실용적인 성과들을 이렇게 열거한다.

"그는 의료용 마취제인 아산화질소의 합성 및 분해 특성을 규명해 한국화공기술연구소에 기술을 이전하여 아산화질소의 대량 생산을 가능케 했다. 그의 기술력 덕분에 아산화질소의 전량 자급생산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1972년에는 원자력발전의 냉각에 활용될 수 있는 알칼리 금속증기의 열전도도 측정에 관한 연구 결과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서울시문화상(학술부문)을 수상했다."

화학 발전에 대한 그의 기여는 이 외에도 많다. 위 책은 "한국 최초의 정유공장인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와 충주 및 나주에 세워졌던 비료공장의 건설에도 참여하여 국가 기간산업의 발전을 지원했다"고 기술한다. 또 "신재생에너지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석탄·정유·원자력·태양열 등과 관련된 연구성과로 경제성장에 이바지"했다고도 평한다.

해방 직후부터 화학공학자로 활동한 이재성은 한국 화학공학이 일제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탈식민지화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 이는 한국 화학공학이 독자적 길을 걷는 토대가 됐다. 그는 한국 화학산업이 지금의 세계적 경쟁력을 갖는 데 밑거름을 깐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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