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20 11:56최종 업데이트 26.05.2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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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인공지능(AI)에 관한 말들이 나온다. 나도 최근에 AI에게서 꽤 도움을 받았다. 개인적인 일로 내가 접근하고 정리하기가 어려운 데이터 분석이 필요했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AI에게 여러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으면서(그 과정에서 구체적 질문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앞으로 명확한 데이터가 존재하고 그것을 종합해서 패턴을 분석하고 그 분석 결과에 대한 추론이 요구되는 분야에서는 AI의 활용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고, 점점 사람의 일을 대체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조심스러운 판단이지만, 의료, 법률, 회계 등이 그런 분야이다. 내가 일하는 인문학의 통번역 분야도 이제는 AI 활용은 외면할 수 없는 큰 흐름이 되었다. 이런 흐름이 노동, 고용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경제를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도전, 정확히 말하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사람은 편리함을 포기하지 못한다. 19세기 산업혁명이 가져온 기계의 도입을 외면하지 못했듯이 AI가 가져올, 누구의 표현대로 '딸깍'하면 결과물이 나오는 AI의 편리성에 압도될 것이다. 글쓰기, 그림, 음악 등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미 AI가 만들어낸 수많은 생산품이 보인다(나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작품이 아니라 생산품이라고 썼다).

그렇다면 인간만의 고유한 문학예술 활동은 어디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건가? 이런 질문을 하면서 얼마 전 일본 여행에서 우연히 봤던 전시회가 떠올랐다. 규슈의 오이타 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스웨덴 출신 디자이너 스티그 린드베리(Stig Lindberg, 1916–1982)의 특별 전시다.

AI가 만드는 예술? 진부함은 오래가지 못한다

규슈의 오이타 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스웨덴 출신 디자이너 스티그 린드베리(Stig Lindberg, 1916-1982)의 특별 전시오길영

나는 이 전시를 보면서 AI와 문학예술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디자인에 문외한이라서 린드베리에 대해 찾아봤다. 전시회에서는 주로 그가 평생 몸담았던 구스타브스베리(Gustavsberg) 공장 안에 별도로 두었던 작업 스튜디오에서 그가 거의 수공업으로 제작한 작품을 보여줬다. 린드베리는 수공업으로 만든 디자인 아이디어에 기반해서 기계를 이용한 대량 생산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제작 방식은 대중적으로 팔리면서도 나름의 독특한 품격을 지닌 북유럽 디자인의 모델이 되었다.

린드베리는 전시회에서 강조한 작품인 도자기 외에도 텍스타일, 일러스트, 그래픽까지 넘나든 종합 디자이너였고, 북유럽 디자인을 세계적 브랜드로 만든 핵심 인물로서, 작품의 아이디어와 원형은 직접 손으로 만들었지만 생산은 산업 시스템을 이용했다. 전시회에서는 린드베리가 손수 했던 다양한 스케치, 드로잉 패턴 디자인, 유약과 색채 테스트 작품이 눈에 띄었다. 린드베리는 구스타브스베리 공장 내부에 자신의 전용 작업장인 지스튜디오(G-Studio)를 만들었다.

이 스튜디오에서 린드베리는 생산성이나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수공업적 방식으로 디자인 실험, 기괴한 조각, 유약 실험을 했다. 스튜디오에서 초벌구이한 도자기에 직접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파이앙스 기법이 나왔고, 예술적 희소성을 유지하기 위해 소량만 생산했다. 전시회에서 눈길을 끌었던 것도 이런 수공업적 작품이었다.

규슈의 오이타 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스웨덴 출신 디자이너 스티그 린드베리(Stig Lindberg, 1916-1982)의 특별 전시오길영

린드베리의 작품을 보면서 문득 떠올렸던 건 19세기 말에 활동했던 영국의 사상가, 작가, 예술가, 낭만적 사회주의자였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의 사례였다. 그는 린드베리보다 더욱 철저히 산업혁명 이후에 득세하게 된 기계문명에 저항했다. 모리스가 만약 우리 시대에 활동했다면 격렬하게 AI가 만들어내는 예술작품의 모방품을 거부했을 것이다. 모리스의 핵심 입장은 '기계는 인간의 기쁨을 빼앗는다'라는 강력한 반(反)기계주의다. 그는 린드베리처럼 직접 공방을 운영하면서 수공 직조, 염색, 제본을 하는 중세 시대의 길드 방식을 되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제품이 너무 적고 비싸서 상류층만 소비했다.

모리스는 대중을 위한 예술을 원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그 실패는 역설적으로 '인간만이 창작하는 예술'과 기계가 모방해서 대규모로 생산하는 물건이 지니는 가치의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모리스는 자본주의 이전 중세 시대의 수공업적 작업 방식을 고수하면서 벽지, 커튼, 가구 덮개용 원단, 스테인드글라스, 태피스트리(대형 직조 벽걸이), 카펫, 도서, 서체, 건축, 가구 등 공예의 모든 분야에 걸친 작품을 창작했다. 그 모든 작품을 다 손으로 제작했다. 그리고 당연히 수공업 작품이기에 작품 수가 매우 적다. 지금도 작품 하나당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의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그 가치는 기계적 모방이 아닌 인간의 손길을 통해 만들어진 창작의 고유성을 인정한 데서 나온다.

린드베리와 모리스를 떠올리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앞으로 AI는 인간 정신 노동의 영역, 특히 문학예술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AI가 만들어낸 기계적 복제품이 '예술의 대중화'라는 이름으로 범람할 것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의 개성과 고유성보다는 AI가 생산하는 평균적이고, 무난하고, 매끈한 글쓰기를 평가하면서 글쓰기의 장벽을 허물었다고 누군가는 광고할 것이다. 벌써 그런 AI 홍보업자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렇게 기계가 만들어내는 대량생산품이 온라인, 오프라인을 지배할수록, 모리스와 린드베리가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이 자신의 몸을 갖고, 그 몸에 밴 정념을 쏟은, 발터 벤야민에 기대면 그것만의 '아우라'를 지닌, 인간이 쓰고 만들어내는 수공업적 작품은 더 희소해질 것이고, 그 가치는 높아질 것이다. 다른 분야와는 달리 문학예술에서 평균성은 진부함과 같은 말이고, 진부함은 오래가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시인 김수영의 오래전 발언을 떠올린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1968)

김수영은 비슷한 생각을 이렇게 시로도 표현했다. "우리는/ 이제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다/ 어제 국회의장 공관의 칵텔 파티에 참석한/ 천사같은 여류작가의 냉철한 지성적인/ 눈동자는 거짓말이다/ 그 눈동자는 피를 흘리고 있지 않다" (김수영, <이혼취소> 부분) 앞으로 김수영이 구분한 글쓰기의 차이,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고, "피를 흘리"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의 차이가 앞으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당연히 점점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글은 드물어질 것이다. 바로 그런 선택지 앞에서 작가들은 고민을 할 것이다. 어떤 길을 고를지를.

'고통 없이 쓴 글은 반드시 표가 난다'는 믿음

서울 도봉구 '김수영문학관'에서 관람객들이 시인 친필원고 등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박정훈

얼마 전 어느 TV 인터뷰에서 김애란 작가는 AI와 구별되는 인간의 모습을 '망설임'이라고 정리했다. 무엇이든지 요구하면 딸깍 하고 생산품을 내놓는 AI에게는 망설임이 없다. 고통과 불운과 불행에 대해서 질문을 해도 AI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해서 바로 그럴싸한 답을 내놓는다.

들려오는 얘기에 요즘은 많은 이들이, 특히 젊은 세대가 AI에게 심리상담을 한다고 한다. 사람이 아니라 기계이기에 더 편하게 AI에게 묻고 위로를 얻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고통, 불안, 좌절, 절망감을 느낀다. 몸을 갖고 생활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질문은 이것이다. AI가 유려하게 정리해서 말해주는 고통, 불안, 좌절, 절망에 대한 답변이 정말 이런 정념들을 느끼고, 이해하고 한 말일까? 아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느낄 뿐이다. 의인화(擬人化)의 함정이다.

AI는 자신이 학습한 언어 패턴과 모델링에 따라서 그 상황에 적합한 말을 정리하고 조립해서 제시할 뿐이다. 그것은 고통을 경험하고 마음에 새기는 몸의 경험과 공감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답변에는 김수영이 말한 "냉철한 지성적인/ 눈동자"의 흔적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거짓말"이다. "그 눈동자는 피를 흘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AI는 질문을 하는 인간의 질문에 맞춰서 상황에 맞는 적절한 언어의 조립을 할 뿐이다. 왜 현재 수준의 AI를 대규모 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인간이 쓰는 글도 종종 그렇다. 인간도 몸으로, 살면서 스스로 경험해 본 고통의 경험 없이, 유려한 말로 고통, 좌절, 몰락, 불행에 대해 쓸 수 있다. 근거 없는 말이지만, 비평가로서 나는 이렇게 쓴 글과 직간접적으로 몸으로 겪은 고통의 체험이 담긴 글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차이를 예민한 독자는 느낄 거라고 믿는다. 글은 종종 사람을 속이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내가 현란한 문체, 화려한 수식으로 치장하면서 고통을 말하는 글, 특히 그런 시를 대체로 불신하는 이유다. 고통과 화려함은 양립하기 어렵다.

김수영이 말했던 "온몸으로 쓰는 글쓰기"의 의미를 AI 시대에 바꿔서 적고 싶다. 사람의 "온몸"과 마음이 글쓰기 과정에서 겪는 고통스러운 싸움의 흔적이 담기지 않은 글은 반드시 표가 난다. 물론 이건 내 희망적 예측이고 바람이다. 하지만 인간이 기계에게 종속당하면 당할수록, 어디선가는 그 기계에 맞서는, 저항하는 소수의 정신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아는 인류의 문화예술사는 그 점을 보여줬다. 내가 린드베리와 모리스의 작품을 생각하면서 다시 확인하는 점이다. 창작과 비평에서 전환점이 되는 시대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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