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군사반란과 5·18민주화운동 당시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뇌물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오른쪽)·노태우씨가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출석한 모습.
연합뉴스
[#6 그가 잇는 두 세계]
미국 북쪽 끝, 팀의 고향 미네소타. 2026년 초 미네소타의 겨울은 유독 혹독했습니다.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의 남부 지역에서 한 주민을 만났습니다.
에드 복 리(시인,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 거주)
"이곳이 2026년 1월 24일 알렉스 프레티가 사망한 장소입니다. 저는 이 동네를 매우 자주 오갑니다."
이 지역을 겨냥한 이민세관단속국, 아이스(ICE, 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의 국가 폭력은 한겨울 미네소타를 얼리는 아이스(ice)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알렉스 프레티와 르네 굿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이들이 끌려갔습니다.
에드 복 리
"영장 없이, 또는 부적절한 영장으로 집에 침입하는 불법 수색, 불법 체포와 구금이 일반 시민을 상대로 수시로 벌어졌습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해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된 광주 시민들(오른쪽)과 2026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에 의해 연행되고 있는 미네소타 시민들.
5·18기념제단, 벤 루먼 제공
미네소타대학에서 유학 중인 변재원씨는 한동안 집 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장애인이자 유색인종인 그에게 미네소타 겨울의 아이스(ice)와 이민세관단속국 아이스(ICE) 모두 큰 위협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찾아왔습니다.
변재원(미네소타대학 인류학과 박사과정)
"버스 정류장에서 가만히 서서 눈을 맞으며 기다리고 있는데 차 한 대가 갑자기 앞에 서더라고요. 그러더니 '삑삑' 하고 경적을 울렸어요. 이런 경우엔 누가 시비를 걸어도 절대 쳐다보지 않는 게 중요하거든요. 쳐다보면 말을 걸기 시작하고 말을 걸면 보통 인종차별로 이어지니까요. 그런데도 그 사람이 "헤이!"라고 부르기에 결국 '아, 이건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찬찬히 내려간 차창 뒤 사람의 모습은 그의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변재원
"그분의 표현이 그랬어요. "두 종류의 아이스가 모두 걱정된다. 장애인인 네가 미끄러질 수 있는 아이스(ice), 그리고 아시아인인 너를 잡아갈 수 있는 아이스(ICE)." 그러더니 저를 차에 태워 저를 집까지 데려다 줬죠."

▲미네소타대학에서 유학 중인 변재원씨가 지난 3월 2일 취재진과 만나 차에 오르고 있다.
이희훈
그 미네소타 시민의 친절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아니, 친절을 넘어선 연대였습니다.
변재원
"아!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이 바지도 그분이 사주신 거예요. 제가 그때 구멍난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분이 "영하 30도에서 그런 걸 입는 건 말이 안 된다"라면서 친구들로부터 받아온 중고 재킷, 바지, 내복, 심지어 두꺼운 양말과 모자까지 선물해줬죠. 그리고 미국에선 동네 마트에 간다고 다 삼겹살을 팔지 않거든요. 어느 날은 그분이 "이거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아니냐"라며 삼겹살도 사다주셨어요."
변씨는 이것을 "이웃주의"라고 표현했습니다.
46년 전 물과 주먹밥을 나누던 광주와 닮은 모습입니다. 변씨의 가방엔 미네소타 시민에게 받은 호루라기도 달려 있었습니다. 잡혀갈 위기에 처했을 때 언제든 연대를 요청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변재원
"이웃주의는 "남을 무찔러서, 싸워서 이긴다"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살아남아야 한다"에 방점이 찍혀 있어요. 친구가 도서관에 가지 못하면 제가 학교에 간 날 책을 함께 빌려온다거나, '어? 저 차 왠지 우리 동네에서 못 봤던 차인데?'라는 마음이 들면 지역 단체 톡방에 남긴다거나. 저는 5·18을 겪지 못했지만 제가 느끼는 광주의 개념도 마찬가지예요. 광주의 시민들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서로의 주먹밥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던 거죠."
에드 복 리
"저는 미네소타에서의 광주 정신에 해당하는 개념이 시민 정신, 공동체 정신,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적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모두를 돌보도록 선출되고 임금을 받는 이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을 때, 서로를 돌보는 일은 결국 사람들의 몫으로 남게 됩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음식을 나누는 광주 시민들(왼쪽, 이창성 촬영)과 2026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에 저항하는 시위 중 음식을 나누는 미네소타 시민들.
5·18기념재단, 변재원 제공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팀이라면.
서나래
"팀이 지금 만약 살아 있다면, 미네소타의 오늘날을 보고 어떤 말을 할까 생각해봤어요. 그것이 바로 팀이 저희에게 주는 메시지일 것 같습니다."
록산 원버그 윌슨
"팀은 사람들을 돕고 음식을 나눠줬을 것 같아요. 그리고 누군가 실제로 공격당하는 것을 봤다면 개입했을까요? 분명히 했을 거예요.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요."
데이비드 돌린저 (팀 원버그의 평화봉사단 동료, 5·18 목격)
"팀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거리로 나갔을 거예요."
케빈 페이뱅크스
"우리는 아마 미니애폴리스에서 함께 시위에 참여했을 거예요. 팀은 분명 시위에 나가자고 저를 설득했을 거고요. 저와 제 네 마리 반려견까지 데리고요. 하하하."

▲팀 원버그의 고향 친구 케빈 페어뱅크스가 지난 3월 3일 미네소타 덜루스의 자택에서 함께 사는 반려견들을 쓰다듬고 있다.
이희훈
평범했던 청년 팀에게 자신도 모르게 스민 미네소타와 광주의 DNA. 그는 두 세계를 넘나든, 나아가
두 세계가 전 세계에 공유할 수 있는 보편의 가치를 상징합니다.
서나래
"팀이 나고 자란 미네소타는 역사적으로 스칸디나비아 이민자들의 전통이 강한 주입니다. 또 베트남, 라오스 이민자들, 특히 세계 최대의 몽족 이민자들의 집결지이기도 하죠."
변재원
"미네소타의 저항은 2026년에 처음 시작된 게 아닙니다. 굉장히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어요. 원주민 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도 미네소타이고요. 민권운동이 발현된 주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해요."
록산 원버그 윌슨
"팀은 한국 국기를 좋아했어요. 미네소타주 깃발과 한국 국기를 함께 두었고 조카들의 손바닥 자국도 그 위에 남겼죠. 다시 말하지만, 그는 두 세계를 섞고 있었어요. 둘 다 그의 삶에서 정말 큰 부분이었기 때문이죠."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이 설치한 바리케이드(왼쪽)와 2026년 초 미네소타 시민들이 설치한 바리케이드.
박지원 의원실, 변재원 제공
미네소타에서 자란 팀 원버그, 광주에서 성장한 원덕기. 평범했던 그가 품은 두 시공간의 역사와 지금 이 시간에도 전 세계 곳곳을 잠식하고 있는 폭력과 전쟁. 모두가 알고 있지만 또 모두가 모르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팀을 통해 '연결'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유경남
"우리가 동시대 폭력의 목격자로서 어떻게 그 폭력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무엇이라고 이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가. 그런 상황 속에서 팀의 실천은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서나래
"마치 팀이 눈앞에 있었던 환자를 외면하지 않았던 것처럼 저희가 언제든 그러한 감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로버트 그라찬 (팀 원버그의 고향 친구, 전남대 영문과 명예교수)
"물론 그는 용감했지만, 그렇다고 광주에서 그가 특별히 용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올해 미니애폴리스에서의 아이스(ICE)를 향한 저항을 보며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할 때 얼마나 비범한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목격했습니다."
변재원
"미네소타의 세계와 광주의 세계는 그 자체로 만날 수 없어요. 미네소타와 광주가 얼마나 먼데요. 미네소타의 세계와 광주의 세계는 오직 사람을 통해 만날 수 있어요. 그 두 세계에서 일어났던 저항이 서로 다른 저항이 아님을, 그 두 세계에서 발버둥쳤던 이웃들의 목소리와 행동이 서로 다른 형태가 아님을.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팀의 서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5·18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19일, 들것에 실린 환자를 옮기는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체크무늬 셔츠)와 광주 시민들. 전일빌딩에 있던 나경택 당시 <전남매일> 사진기자가 건너편 당시 광주관광호텔(현 무등빌딩)을 지나는 이들을 촬영했다.
나경택 제공
[에필로그: 그가 남긴 노래]
46년 전 인터뷰 영상 속 팀은 가족과 친구들도 처음 마주하는 그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때론 울먹이기도, 때론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록산 원버그 윌슨
"비록 끔찍한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이지만 그렇게 젊고 활기찬 모습을 다시 보는 건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경험이었어요."
케빈 페어뱅크스
"그는 정말 용감하고, 또 용감한 사람이었어요."
데이비드 돌린저
"팀을 다시 보니 참 좋네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다시 보니까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네요."
캐롤린 투르비필
"팀, 네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 못해 정말 미안해."

▲팀 원버그의 누나 록산 원버그 윌슨이 지난 3월 4일 미국 미네소타 라이스에 있는 자택에서 동생의 유품인 병풍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이희훈
팀의 누나 록산의 집에는 여전히 그의 유품이 가득합니다. 그의
유품에는 한국과 광주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침대 머리맡에 걸어둔 병풍을 가리키며 록산이 말했습니다.
록산 원버그 윌슨
"제게 정말 소중하죠. 정말 아름다워요. 우리 가족의 삶, 우리가 거친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져 침대 머리맡에 뒀어요. 마치 팀의 영혼이 저와 함께 있는 것 같아요. 그가 죽기 전 이런 것들을 조금씩 제게 줬어요. 그땐 몸이 많이 아파서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냥 "이거 가져"라고 말하곤 했죠. 이건... 그가 아플 때 들었던 음악이에요. 한국 음악들이요."
우리는 팀의 유품 중 눈에 띄는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가
손수 한글로 적은 노래들, 가수 신승훈의 여러 명곡입니다. 팀이 세상을 떠난 후 33년 만에, 록산이 그가 한 땀 한 땀 녹음해 둔 테이프를 재생했습니다.
'찰칵, 톡'
▲팀 원버그의 유품인 카세트 테이프를 그의 누나 록산 원버그가 지난 3월 4일 미네소타 라이스의 자택에서 내보이고 있다. 팀 원버그가 직접 녹음한 테이프에는 그가 직접 한글로 쓴 노래 제목들이 한 땀 한 땀 적혀 있었다.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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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보태주세요. 오마이뉴스는 다큐멘터리 영화 <내 이름은 원덕기>를 제작하기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펀딩 참여자의 이름을 기재할 계획입니다. 대한민국, 그리고 광주를 사랑한 팀 원버그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기획 소중한 취재 소중한·전선정·김화빈·이진민·유지영
촬영 강상우·이희훈 편집 콘텐츠팜 호미
CG 김수연 타이틀 김소설 음향 DMC 사운드 비전 내래이션 이승준
펀딩 기획 장유정·이기종·봉주영
영상 제공 5·18기념재단·루먼 형제(Ben&Sam Luhmann)
영상 번역 자문 로버트 그라찬
사진·자료 제공 고진석·나경택·서나래·유경남·변재원·안영주·록산 원버그 윌슨·데이비드 돌린저·폴 코트라이트·캐롤린 투르비필·케빈 페어뱅크스·로버트 그라찬·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외교사료관·박지원 의원실
촬영 협조 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전남대병원·전일빌딩245·국가보훈부·별밭·필로스팅하우스
제작 지원 광주광역시·광주광역시 동구 |
*팀 원버그의 누나 록산 원버그 윌슨의 미네소타 현지 인터뷰 기사가 이어집니다.
▲1978년부터 미국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던 팀 원버그가 나주 호혜원(한센인 정착지)에서의 봉사 활동 도중 갓 태어난 듯한 강아지를 무릎에 올려둔 채 웃고 있다.
폴 코트라이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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