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17 10:58최종 업데이트 26.05.1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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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국회의원에 상응하는 것이 일제 때는 중추원 참의였다. 이는 조선총독의 통치를 돕는 일종의 자문위원이었다. 1910년 10월 1일 제정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의 제1조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조선총독에 예(隷)하여 조선총독의 자순(諮詢)에 응하는 바"라고 규정했다.

총독 예하기관인 중추원의 참의들은 봉급을 두둑하게 받았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따르면, 경기도 양평군수 등을 역임하고 부지사 급인 강원도 참여관을 지낸 친일파 홍종국(1885~1951)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중추원 참의로 부역할 때 받은 봉급은 매월 100원에서 200원 사이였다. 1930년대 후반에 서울의 직공 노동자들이 월급 10원도 받기 힘들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고수입이었다.

중추원 참의들은 세금을 축내는 벌레들로 인식됐다. 1922년 5월 11일 자 <동아일보> 톱기사 겸 사설은 "1년 1차 수일간의 회기로 형식적의 개회"만 하는 중추원 참의들에게 "무의의(無意義)한 거액 수당을 급여"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중추원은 한국인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었지만, 친일파들에게는 로망의 대상이었다. 중추원 참의가 되면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식민체제하의 지배층 지위를 향유할 수 있었다. 대신, 식민통치 미화에 앞장서는 활동은 열심히 해야 했다.

중추원 참의직 피해 산으로 간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장도빈연합뉴스

친일파들이 탐내는 그 자리가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언론인·교육자·출판업자인 장도빈에게도 제시됐다. 이 자리를 제시하며 접근한 인물은 제지사업자인 후지와라 긴지로(藤原銀次郞) 전 상공대신이었다.

1888년 생인 장도빈은 서른한 살 때인 1919년에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책을 찍어내는 일도 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종이 공급을 독점한 일본인들과도 교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후지와라 긴지로는 장도빈이 거절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총독부가 그런 인물을 골라 장도빈에게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장도빈은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원이 쓴 장도빈 전기인 <실천적인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은 "장도빈의 대답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거듭된 제안에도 장도빈은 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총독부의 요청을 거절한 마당에 중앙 무대에 남아 있기는 힘들었다. 결국 그는 "원고 뭉치를 싸들고 처가가 있는 영변으로 떠났다"고 위 전기는 말한다.

평양 남쪽인 평안남도 중화군 출신인 그가 고향으로 가지 않고 그보다 더 북쪽인 평북 영변으로 몸을 피했다. 중추원 참의직을 받아들였다가는 그간의 공로가 죄다 허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멀리 도피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집념도 대단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골라 회유 작전을 펼쳤다. 총독부가 내세운 두 번째 사람은 후지와라와 달리 장도빈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위 책은 장도빈이 영변에 은둔 중일 때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장도빈에게 충격적인 경험이 찾아왔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3·1독립선언서의 서명자로 후일 변절하여 중추원 참의로 참여한 최린이 장도빈을 중추원의 참의로 추천하겠다는 편지를 영변으로 보내온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최린(1878~1958)이 중추원 참의직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으니 충격을 받을 만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장도빈은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다섯 살 때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일곱 살 때 지역 백일장에서 능력을 발휘해 일찍부터 신동으로 소문난 그였다. 그때 그의 할아버지 장제국이 데리고 들어갔던 산이 있다. 그 산속으로 그는 들어갔다.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가 데려간 곳은 중화군 수산면 병운리의 깊은 산속이었다. 할아버지의 목적은 스파르타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산중의 초가삼간에서 어린 손자를 3년간 집중적으로 훈련시켰다. 이때의 집중 교육이 그 뒤 장도빈의 학문과 글쓰기의 밑바탕이 됐다. 그런 추억이 있는 깊은 산속으로 그가 도피했던 것이다.

3년간의 산중 훈련을 마친 어린 시절의 장도빈은 평양감사의 추천을 받은 뒤 한성사범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19세 나이로 졸업해 공립학교 교원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곳에 부임하지 않고 대한매일신문사에 들어가 글을 쓰면서 역사학 연구를 해나갔다.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마련된 최재형 기념관. 내부 전시물. 김종훈

이때부터 그가 지향한 방향은 항일구국투쟁이었다. 국가보훈부가 1991년에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9권 장도빈 편은 "1908년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주필로 취임하여 '일인하지(日人何知)',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민족경쟁의 최후 승리' 등의 논설을 1910년까지 집필·게재하면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안창호·전덕기·이동휘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주력하였다"고 기술한다.

그는 국권침탈 직후의 공안조작 사건인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사건(105인 사건)에도 연루됐다. 이 때문에 수배 대상이 된 뒤에는 한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그곳의 한국인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신채호·최재형·홍범도·이회영·이동녕·이동휘·이상설 등과 교류했다.

장도빈이 중추원 참의직을 받아들일 인물이 아니라는 점은 스무 살 전후의 장도빈이 누구와 친했는지를 보면 금방 드러난다. 위 장도빈 전기에 따르면, 그는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이 된 일을 회고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때 신채호씨가 그 신문사의 논설주필로 있어서 불행히 병에 걸려 출근이 여의치 못하므로 대개 내가 논설을 쓰게 되었는데, 그러나 신씨가 혹 신문사에 오고 하여 나를 만나 보고서 깊이 친한 친구가 되어 아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일생에 반가운 분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심산 김창숙과 더불어 꼿꼿하고 불굴하는 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인물들인 만큼, 두 선비의 성격도 상당히 까다로웠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들과 가까워지기 힘들었다. 신채호가 여덟 살 적은 장도빈을 보고 매우 좋아한 것은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도빈은 언론 분야에서도 족적을 남겼지만, 무엇보다 역사학에서 큰 업적을 세웠다. 그는 단군조선보다 기자조선이 강조되던 구한말 역사학계의 풍토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중심에 놓았다. 이는 신채호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는 발해를 무시하고 신라를 정통으로 간주하던 기존 역사학계와도 다른 길을 걸었다. 발해를 우리 민족의 정통 왕조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발해-신라'의 남북국시대에 대한 인식을 갖게 만든 공로자 중 하나다.

<동양학> 2015년 제60집에 수록된 김진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의 논문 '구한말 일제하 장도빈의 활동과 현실인식'은 장도빈이 28세 때인 1916년에 펴낸 <국사>를 언급하면서 "단군을 기점으로 하였으며 남북국시대를 설정한 점이 특징적"이라고 평한다.

단군은 몽골 침략 때 부각됐다가 일제 때 재차 부각됐다. 한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역사학자들은 단군을 집중 연구했다. 그만큼 한민족의 통합과 단결에 꼭 필요한 구심점이 단군이다. 장도빈이 일제하에서 단군조선을 연구한 것은 민족을 해방시킬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런 인물에게 중추원 참의 직을 제의했으니, 역사 연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몸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군에 대한 장도빈의 애정은 해방 뒤에도 계속됐다. 단국대학교 설립에 참여하고 초대 학장도 역임했다. 단국대 교가의 가사도 그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 "영기찬 백두산 정기를 받고/ 한양성 배움터에 모여든 학도/ 젊은 피 끊는 가슴 부등켜안고/ 찬연한 앞을 향해 뛰어나간다"로 시작하는 단국대 교가에는 "거룩한 단군성조 그 얼을 품고/ 배달 땅 이 강산에 태어난 학도/ 학구에 타는 횃불 드높이 들고/ 한줄기 빛을 바라 뛰어나간다"라는 대목이 있다.

단국대 학장을 지낸 뒤 육사 교수로도 활동한 장도빈은 서울시사편찬위원과 고등고시위원 등을 지내다가 75세 때 세상을 떠났다. 1963년 9월 14일자 <동아일보> 6면은 "우리나라의 역사가의 원로 중 한분인 장도빈 선생은 12일 상오 11시에 오래된 병환으로 세상 떠나셨다"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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