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우수리스크에 마련된 최재형 기념관. 내부 전시물.
김종훈
이때부터 그가 지향한 방향은 항일구국투쟁이었다. 국가보훈부가 1991년에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9권 장도빈 편은 "1908년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주필로 취임하여 '일인하지(日人何知)',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민족경쟁의 최후 승리' 등의 논설을 1910년까지 집필·게재하면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안창호·전덕기·이동휘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주력하였다"고 기술한다.
그는 국권침탈 직후의 공안조작 사건인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사건(105인 사건)에도 연루됐다. 이 때문에 수배 대상이 된 뒤에는 한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그곳의 한국인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신채호·최재형·홍범도·이회영·이동녕·이동휘·이상설 등과 교류했다.
장도빈이 중추원 참의직을 받아들일 인물이 아니라는 점은 스무 살 전후의 장도빈이 누구와 친했는지를 보면 금방 드러난다. 위 장도빈 전기에 따르면, 그는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이 된 일을 회고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때 신채호씨가 그 신문사의 논설주필로 있어서 불행히 병에 걸려 출근이 여의치 못하므로 대개 내가 논설을 쓰게 되었는데, 그러나 신씨가 혹 신문사에 오고 하여 나를 만나 보고서 깊이 친한 친구가 되어 아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일생에 반가운 분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심산 김창숙과 더불어 꼿꼿하고 불굴하는 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인물들인 만큼, 두 선비의 성격도 상당히 까다로웠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들과 가까워지기 힘들었다. 신채호가 여덟 살 적은 장도빈을 보고 매우 좋아한 것은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도빈은 언론 분야에서도 족적을 남겼지만, 무엇보다 역사학에서 큰 업적을 세웠다. 그는 단군조선보다 기자조선이 강조되던 구한말 역사학계의 풍토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중심에 놓았다. 이는 신채호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는 발해를 무시하고 신라를 정통으로 간주하던 기존 역사학계와도 다른 길을 걸었다. 발해를 우리 민족의 정통 왕조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발해-신라'의 남북국시대에 대한 인식을 갖게 만든 공로자 중 하나다.
<동양학> 2015년 제60집에 수록된 김진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의 논문 '구한말 일제하 장도빈의 활동과 현실인식'은 장도빈이 28세 때인 1916년에 펴낸 <국사>를 언급하면서 "단군을 기점으로 하였으며 남북국시대를 설정한 점이 특징적"이라고 평한다.
단군은 몽골 침략 때 부각됐다가 일제 때 재차 부각됐다. 한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역사학자들은 단군을 집중 연구했다. 그만큼 한민족의 통합과 단결에 꼭 필요한 구심점이 단군이다. 장도빈이 일제하에서 단군조선을 연구한 것은 민족을 해방시킬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런 인물에게 중추원 참의 직을 제의했으니, 역사 연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몸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군에 대한 장도빈의 애정은 해방 뒤에도 계속됐다. 단국대학교 설립에 참여하고 초대 학장도 역임했다. 단국대 교가의 가사도 그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 "영기찬 백두산 정기를 받고/ 한양성 배움터에 모여든 학도/ 젊은 피 끊는 가슴 부등켜안고/ 찬연한 앞을 향해 뛰어나간다"로 시작하는 단국대 교가에는 "거룩한 단군성조 그 얼을 품고/ 배달 땅 이 강산에 태어난 학도/ 학구에 타는 횃불 드높이 들고/ 한줄기 빛을 바라 뛰어나간다"라는 대목이 있다.
단국대 학장을 지낸 뒤 육사 교수로도 활동한 장도빈은 서울시사편찬위원과 고등고시위원 등을 지내다가 75세 때 세상을 떠났다. 1963년 9월 14일자 <동아일보> 6면은 "우리나라의 역사가의 원로 중 한분인 장도빈 선생은 12일 상오 11시에 오래된 병환으로 세상 떠나셨다"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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