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18 13:37최종 업데이트 26.05.1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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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인 2025년 5월 18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와 KIA 타이거즈의 경기 시작에 앞서 선수들이 호국영령과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에 대한 묵념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1980년대 내내 최강자로 군림했던 해태 타이거즈의 본거지인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관중들이 함께 부르던 응원가는 '목포의 눈물'이라는 처량하다 못해 애절한 옛 노래였다. 그리고 간혹 승리의 감격에 벅차오른 이들은 선수나 감독 대신 '김대중'이라는 뜬금없는 이름을 연호하기도 했다.

목포의 눈물, 해태 타이거즈, 김대중

프로야구가 시작된 1982년, 광주에서 야구를 본다는 건 좀 민망한 일이었다. 그곳에서 죄 없는 숱한 사람이 일본군도 아니고 북괴군도 아닌 대한민국 국군 장병의, 그것도 오발도 오폭도 아닌 명확히 조준된 공격을 받아 죽고 쓰러진 지 두 해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시내 곳곳 벽이나 길바닥에 남은 탄흔과 혈흔도 미처 다 지우지 못했던 그때,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정열을, 온 국민에게 건강한 휴식을' 주겠다며 벌인 잔치마당에 끼어 앉는다는 게 아주 말끔한 기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야구 경기가 벌어지는 무등경기장은, 도청에서 시민들에게 총질하던 계엄군을 밀어내자며 나선 택시와 차량행렬이 출발한 곳이었다. 80년 5월의 기억과 떨어져 있던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잠시 슬픈 생각은 잊고 가슴 속 울분이라도 풀어보기로 마음먹는다고 해도, 막상 가슴 울컥하게 만드는 극적인 승리의 순간에 예컨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 이렇게 우리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아! 대한민국)를 합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코 용서할 수 없다거나 하는 생각 이전에, 이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물어볼 수도 없고,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무렵 광주 사람들에게는 우선 마음껏 통곡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울고 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필요했으며, 그렇게 일어선 다음 어디로든 걸어가야 할 방향이 필요했다.

그때 '목포의 눈물'은 그들에게 함께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는 잠시의 위로가 됐고, 늘 이겨주던 해태 타이거즈는 작지만 요긴한 격려가, 함께 고난을 겪으며 그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던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은 그 슬픔을 딛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목소리의 구실을 했다. 그 세 가지가 만난 곳이 무등야구장이었고, 그 기괴한 뒤죽박죽은 상상할 수 없이 잔인한 내란세력 앞에서 무너졌던 광주를 민주주의의 성지로 일으켜 세운 하나의 힘으로 작용했다.

질 수 없다면 지지 않는 팀, 타이거즈

1982년 2월 1일 광주 무등 경기장에서 53일간의 스프링캠프를 차린 해태 타이거즈의 모습.연합뉴스

해태 타이거즈가 얼마나 강했는지에 대해 긴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다. 1983년부터 1997년까지 15년간 9번 우승했다. 더구나 한국시리즈에서만큼은 단 한 번도 지지 않았기에 그들보다 훨씬 거대한 모기업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강한 전력을 구축했던 삼성 라이온즈와 빙그레 이글스가 해마다 준우승 횟수만 쌓아 올렸고, 그 '한'이 여전히 팀의 팬덤에 드리워있다는 점만 짚어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타이거즈라는 이름에 얽힌 자부심이란, 한때 '막강'이나 '최강'이라는 구호에 조금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유일한 팀이었다는 뿌듯한 사실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보다 훨씬 크고 강한 무언가 앞에서 짓눌리고, 빼앗기고, 설명할 수 없는 상처를 견뎌야 했던 사람들이 그 팀에 의지해 끝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는 기억에 더 단단히 뿌리박고 있다.

해태 야구에는 다른 어떤 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치열함이 있었다. 객관적 전력의 차이란 간단히 무시해 버리는 기세와 상대가 누구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단 한 번 흐름만 잡으면 끝내 뒤집어버리는 집요함. 선동열의 공은 물론 압도적이었지만 상대 팀들을 더 질리게 만드는 것은, 선동열을 간신히 피해서 만난 김정수나 문희수 같은 투수들에게 더욱 소문나게 짓밟히는 순간들이었다. 선수가 누구고 평소 성적이 어떠냐와 아무 상관 없이 도처에서 튀어나오는 그 치열함은, 거리에서 짓밟히고 기억 속에서 거듭 무너져 내리던 광주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준 격려였고, 그래서 그들이 타이거즈에 느낀 감정은 자랑스러움 이전에 고마움이었다.

그래서 타이거즈 팬들의 감성에는 두 겹의 바탕색이 깔려있다. 누구보다 강한 자부심과 누구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깊은 슬픔의 결이다. 승리에 환호하면서도 처연한 눈물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또 다른 승리를 자신한다. 무등야구장에서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면서 마음껏 울고 난 뒤에야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눈물을 닦으며 신발 끈을 묶었다.

해태와 기아, 변한 것과 변치 않는 것

2008년 6월 6일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벌어진 '2008 프로야구' KIA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서 3루석 관중들이 선동렬 삼성 라이온즈 감독을 응원하는 문구를 준비해왔다. 선동렬 감독은 기아의 전신인 전 해태 투수.연합뉴스

해태 대신 기아가 타이거즈의 주인이 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제 타이거즈가 더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예상은 충분히 그럴 듯했다. 재계 서열부터 비교가 어려울 만큼 더 거대한 기업이 모기업이 되었고, 광주에 고립돼 있던 80년 5월의 기억도 끝내 봉쇄망을 뚫고 국가적 기념의 대상이 되었다. 더 이상 변두리의 설움이나 한(恨)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타이거즈는 예전 같지 않았다. 왕조는 끝났고, 한때 당연하던 우승은 점점 까마득한 일이 되어갔다. 해태 시절에는 그렇게도 쉽게 무너지지 않던 팀이, 기아가 된 뒤에는 중요한 순간마다 허망하게 흔들리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16연패라든가, 두 번의 최하위 같은 낯선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간들이 오히려 타이거즈 팬들의 정체성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해태를 기억하는 팬들은, 자신들이 사랑했던 것은 단지 '강팀'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좀 더 또렷이 깨달을 수 있었다.

2009년, 2017년, 2024년. 기아 타이거즈는 해태가 이룬 우승 횟수 9를 12까지 늘려나갔고,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다시 조금씩 강해졌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시리즈에서만큼은 무패의 전설을 이어갔다. 하지만 타이거즈의 자부심을 이야기할 때 단지 우승 횟수만 세는 것은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일이다.

타이거즈라는 야구팀은 울고 있던 한 도시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한번 살아보자'고 등 두드린 친구였다. 기아가 비록 해태만큼 강하지 못하고 해태의 기억을 모두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들의 이름이 여전히 타이거즈인 한 광주에서 살았던, 혹은 광주의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들을 떠날 수는 없다. 단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도 언제까지나 타이거즈란, 단순한 야구팀의 이름을 넘어 함부로 꺾이지 않겠다는, 언젠가 꺾이더라도 끝내 무너지지는 않겠다는 각오를 뜻하기 때문이다.

검빨유니폼검은 색 하의와 빨간 색 상의. 일명 '검빨유니폼'은 타이거즈를 제외한 모든 팀의 팬들에게 공포심을 각인한,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있다.기아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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