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18 17:18최종 업데이트 26.05.1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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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29일 고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의 유해 안장식이 대전국립묘지에서 유족과 지인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돼 영송병들이 영정과 후장 등을 봉송하고 있다.연합뉴스

2006년 5월 22일 오전 10시 20분(현지 시각)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 유럽본부. 세계보건총회 의장을 맡은 엘레나 살가도 스페인 보건장관이 개회를 선언한 데 이어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의 갑작스러운 타계 소식을 전하자 회의장은 충격에 휩싸였다. 각국 대표와 WHO 직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살가도 의장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그분을 기리기 위해 2분간 묵념하자"라고 제안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오늘 세계는 위대한 인물을 잃었다"라고 안타까워했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가 헌신한 덕에 전 세계 수천만 사람의 삶이 개선됐다"라고 평가했다. WHO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건강하고 평등한 세계를 만든 그의 공은 인류의 영원한 유산이 될 것"이라고 추모했다. 이틀 뒤 제네바 노트르담 성당에서는 유족과 WHO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이 치러졌다.

이종욱은 한국인 최초의 국제기구 수장이었다. 이종욱이 테이프를 끊은 덕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장, 김용 세계은행 총재 등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는 역대 WHO 사무총장 가운데 처음으로 지역사무처 말단 자문관에서 시작해 20년 만에 최고책임자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격무와 과로가 겹친 탓에 5월 20일 세계보건총회 관계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허혈성 뇌경색증(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혈전 제거 수술을 받았으나 깨어나지 못한 채 세계보건총회 시작 직전인 22일 오전 7시 43분 절명했다. 임기 5년 가운데 3년도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WHO 사무총장이 '세계 보건 대통령'으로 불리는 까닭

WHO 휘장유엔 마크 위에 의술의 신을 상징하는 뱀과 지팡이를 그려 넣었다.WHO

WHO는 국제기구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다. 1817년부터 주기적으로 콜레라가 창궐하자 1851년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 12개국 대표가 모여 방역 대책을 논의한 것이 기원이다. 교통의 발달은 전염병 전파 속도를 가속화해 나라 간 협력 필요성이 절실해진 것이다.

1902년 미국 워싱턴에서 출범한 범미보건기구(PAHO)와 1907년 파리에서 발족한 국제공중보건처(IOPH)가 국제연맹 산하 보건기구와 합쳐진 뒤 1948년 4월 7일 유엔 전문기구로 재탄생했다. 세계 보건의 날은 WHO 설립을 기념한 것이다. WHO는 194개 가입국에 연간 예산 53억 달러(약 7조 7600억 원), 직원 수 9000여 명을 헤아리는 세계 최대의 유엔 전문기구다. WHO 사무총장이 세계 보건 대통령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이종욱은 1945년 4월 12일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서 4남 2녀 중 넷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바로 위에 형과 누나가 하나씩 더 있었으나 일찍 숨졌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경성부(서울시) 공무원을 거쳐 해방 후 서울 마포·서대문·종로구청장을 두루 지냈기에 6·25 전쟁 때 고초를 겪은 것을 빼면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다. 하지만 1960년 4·19 혁명 직후 아버지가 공직에서 물러나고 그해 8월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세도 급격히 기울어 어머니가 생활 전선에 나서야 했다.

이종욱은 경복중고 재학 시절 보이스카우트, YMCA(기독교청년회), RCY(청소년적십자) 등에서 활동하며 봉사 정신과 리더십을 길렀다. 고교 3년 내내 반장을 맡을 정도로 급우들의 신망도 높았다. 서울대 공대에 지원했으나 연거푸 떨어졌다. 재수 후 한양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해서도 두 차례 서울대에 더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육군 보병으로 복무한 뒤 또래보다 7년 늦은 197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1976년 2월 의대를 졸업하고 의료 봉사를 하려고 경기도 의왕시의 천주교 복지시설 성라자로마을을 찾았다가 인생 행로가 바뀌었다.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사는 길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한 것이다. 이곳에서 4년째 상주하는 일본인 자원봉사자 가부라키 레이코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운명적이었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가 비자 발급이 늦어지자 이종욱은 서울 도봉구보건소를 거쳐 춘천의 강원도립의료원(현 강원대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며 레이코에게 청혼했다. 레이코는 "내가 한센병에 걸렸으면 어쩌려고 그러냐"라며 거절했으나 이종욱은 "내가 고쳐주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라며 밀어붙였다.

반대하는 어머니와 누나도 설득한 뒤 1976년 12월 노기남 대주교의 주례로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 하와이대 공중보건학 석사과정에 입학한 것은 1979년 9월이었다. 부인 레이코와 아들 충호를 데리고 미국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아시아의 슈바이처'를 거쳐 '백신의 황제'로

2003년 9월 아프리카 앙골라를 방문한 이종욱 WHO 사무총장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다.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아이에게 투약하는 이종욱이종욱 WHO 사무총장이 어린이의 입에 약을 직접 넣어주고 있다.WHO


석사과정을 마치고 1981년 6월 남태평양의 미국령 사모아로 떠났다. 린든존슨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다가 2년 뒤 피지의 WHO 남태평양지역사무소 한센병 담당 자문관으로 옮겨갔다. 당시 남태평양에는 한센병 환자 5000여 명이 여러 섬에 흩어져 있었다. 이종욱은 경비행기와 보트를 타고 1년에 5개월 가까이 출장을 다니며 치료법과 치료제를 보급하고 실태를 점검하는 한편 직접 환자들을 진료했다. '아시아의 슈바이처'란 별명은 이때 붙었다.

1986년 12월 필리핀 마닐라의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처로 전보 발령이 나 만성질환 지역고문으로 일하다가 1990년 6월 질병관리국장으로 승진해 소아마비 퇴치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취임 당시 6000건에 육박했던 지역 내 소아마비 발병 건수는 4년 만에 74건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홍역과 B형 간염 예방접종 프로그램도 성공적이었다.

1994년에는 WHO 본부의 국제 백신·면역 프로그램 및 어린이 백신사업 총괄국장으로 부임했다. 의외의 인사라는 세평이 많았으나 얼마 가지 않아 입방아를 찧던 이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백신 사업과 관련한 업무를 일원화하며 선진국에서만 주로 사용되던 5가 혼합백신(디프테리아·백일해·파상풍·뇌수막염 등을 예방)을 개발도상국에 보급하고 소아마비 유병률을 1만 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리는 등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세계적인 과학 전문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1995년 1월호에 '예방의학의 동향'이란 특집 기사를 게재하며 그에게 '백신의 황제(Vaccine Czar)'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소탈한 그의 스타일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가 가진 권한이나 그가 이룬 업적에 걸맞은 별명이었다. 2002년 12월 결핵퇴치사업국장을 맡고 나서는 글로벌약품조달기구를 조직해 가난한 나라를 지원하며 북한에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그는 2003년 1월 치러지는 WHO 사무총장 선거에 도전장을 냈다. WHO에서의 경력과 성과는 흠잡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낮았고 경쟁 후보들의 면면이나 지역별 표심을 따져봐도 전망이 밝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 한국 정부는 전남 여수 해양엑스포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어 외교적 지원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이 같은 어려운 여건과 비관적 전망을 뚫고 이종욱은 당선됐다. 1~4차 투표에서 총리나 장관 등을 지낸 쟁쟁한 후보들을 차례로 누르고, 영국 출신의 피터 피오 유엔에이즈계획 대표와 5~6차 투표에서 연거푸 16대 16 동률을 이룬 뒤 마지막 7차 투표에서 17대 15로 극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으나 누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적임자였다.

"2005년까지 300만 명에게 에이즈 치료제 보급하겠다"

신혼 시절의 이종욱 부부1970년대 말 이종욱이 강원도립의료원에 근무할 당시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와 찍은 사진.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이종욱은 2003년 5월 21일 세계보건총회에서 차기 사무총장으로 추인받은 뒤 2005년까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보균자와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AIDS) 환자 300만 명에게 치료제를 제공하자는 '3 by 5' 캠페인을 선언했다. 미국에서는 3×5인치 단어장을 흔히 '3 by 5'로 부르기 때문에 기억하기 좋도록 정한 것이다. 목표치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치료제 보급을 대폭 확대해 아프리카를 에이즈의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이종욱이 2003년 7월 21일 취임하기 직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이 유행했다. 비슷한 시기 조류 인플루엔자(AI)도 겹쳤다. 이종욱은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전략보건운영센터(SHOC)를 만들었다. WHO 본부와 6개 지역사무처가 화상회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30분 안에 긴급회의를 열어 신속한 대응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쇼크룸이라고도 불린 이 센터는 2009년 신종 플루(H1N1),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창궐했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40개국 이상의 비준을 얻어내 담배 규제 기본 협약을 발효하도록 한 것도 이종욱의 큰 성과였다.

2004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꼽았다. 훗날 이종욱이 '영원한 WHO 사무총장', '가난하고 소외된 인류의 주치의'란 찬사를 받은 것은 탁월한 업적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자세, 발 빠른 추진력, 검소한 생활 태도 등으로 주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친화력이 뛰어나 친구가 많았고 스키와 자전거 등 취미도 즐겼다. 주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는 한국과 전 세계 주요 언론에 난 뉴스를 빠짐없이 챙겨보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도 맡은 일을 잘해내기 위해서였다. 2002년 레이코가 페루 빈민촌으로 봉사하러 떠난 뒤에는 더욱 일에 몰두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모국의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말을 남겼다.

"화려한 외교관을 상상하지 마라. 편협한 인종주의와 속 좁은 애국심 같은 것으로는 국제기구에서 견디기 힘들다. 더욱이 열정 없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종욱은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으로 불렸다. 평소 직원들에게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하라"라고 강조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룰 것이 아니라 일단 착수해야 회원국도 따르고 후원자도 도와준다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라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경우에는 책망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고 우리가 그 누군가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는 연간 30만㎞를 비행하며 150일을 출장 다녔지만 1등석에는 한 번도 타지 않았고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는 적도 많았다. "가난한 나라가 낸 분담금도 섞여 있는 돈으로 호강할 수 없다"라는 지론 때문이었다. 관용차도 "세계인의 건강을 책임지는 WHO 사무총장이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준중형 하이브리드로 바꿨다. 공용 목적 이외에는 관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외부인도 태우지 않았다. 주말에는 10년 된 낡은 볼보 승용차를 직접 운전해 다녔다. 각국에서 받은 선물과 기념품도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연말 자선행사에 내놓거나 직원들에게 경품 추첨을 통해 나눠준 뒤 모금액을 보육원에 전달했다.

5월 20일 제네바 WHO 본부에서 20주기 추모 행사

이종욱 20주기 추모 행사이종욱 WHO 사무총장의 20주기 추모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이종욱이 세상을 떠나자 애도와 찬사가 줄을 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고등급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고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했다.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KOFIH)은 '이종욱 펠로십 프로그램'과 '이종욱 글로벌 영프런티어'를 개설해 개발도상국 보건의료 인력과 국내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고 있으며, 2009년부터 해마다 이종욱 기념 공공보건상을 시상하고 있다. 서울대는 의과대에 이종욱글로벌의학센터를 설립했고, WHO는 쇼크룸을 '이종욱 전략보건운영센터'로 명명했다.

파라다이스그룹의 파라다이스상, 대한의사협회와 한미약품이 선정하는 자랑스러운 의사상, 세계한센포럼의 한센공로상도 뒤늦게 주어졌다. 생전에도 국민훈장 모란장, 적십자인도장 금장,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등을 받긴 했으나 "상을 주려면 WHO 사무총장 퇴임 후 잘잘못을 가려 결정하라"라며 사양한 적이 많았다.

2019년 말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 WHO가 초기 대응해 실패하자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의 정치적 편향성과 비전문성을 지적하는 비판이 쏟아지며 많은 의료인이 그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이종욱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사태가 악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WHO는 5월 18~2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제79회 세계보건총회의 공식 부대행사로 보건복지부·KOFIH와 함께 20일 오후 6시 30분(현지 시각) WHO 본부 EB룸에서 '이종욱 박사의 유산을 기리며: 글로벌 보건 형평성을 향한 20년의 여정'을 마련한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의 환영사,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의 축사, 김민석 총리의 영상 추모사, 레이코 여사의 인사말 등의 순서로 진행되고 각국 대표들의 추모 연설이 이어질 예정이다.

인사하는 레이코 여사2016년 5월 24일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서 열린 이종욱 사무총장 10주기 추모 행사에서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 WHO 사무총장, 백신의 황제 이종욱 평전 >
<영원한 WHO 사무총장, 이종욱 평전>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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