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시절의 이종욱 부부1970년대 말 이종욱이 강원도립의료원에 근무할 당시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와 찍은 사진.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이종욱은 2003년 5월 21일 세계보건총회에서 차기 사무총장으로 추인받은 뒤 2005년까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보균자와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AIDS) 환자 300만 명에게 치료제를 제공하자는 '3 by 5' 캠페인을 선언했다. 미국에서는 3×5인치 단어장을 흔히 '3 by 5'로 부르기 때문에 기억하기 좋도록 정한 것이다. 목표치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치료제 보급을 대폭 확대해 아프리카를 에이즈의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이종욱이 2003년 7월 21일 취임하기 직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이 유행했다. 비슷한 시기 조류 인플루엔자(AI)도 겹쳤다. 이종욱은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전략보건운영센터(SHOC)를 만들었다. WHO 본부와 6개 지역사무처가 화상회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30분 안에 긴급회의를 열어 신속한 대응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쇼크룸이라고도 불린 이 센터는 2009년 신종 플루(H1N1),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창궐했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40개국 이상의 비준을 얻어내 담배 규제 기본 협약을 발효하도록 한 것도 이종욱의 큰 성과였다.
2004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꼽았다. 훗날 이종욱이 '영원한 WHO 사무총장', '가난하고 소외된 인류의 주치의'란 찬사를 받은 것은 탁월한 업적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자세, 발 빠른 추진력, 검소한 생활 태도 등으로 주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친화력이 뛰어나 친구가 많았고 스키와 자전거 등 취미도 즐겼다. 주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는 한국과 전 세계 주요 언론에 난 뉴스를 빠짐없이 챙겨보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도 맡은 일을 잘해내기 위해서였다. 2002년 레이코가 페루 빈민촌으로 봉사하러 떠난 뒤에는 더욱 일에 몰두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모국의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말을 남겼다.
"화려한 외교관을 상상하지 마라. 편협한 인종주의와 속 좁은 애국심 같은 것으로는 국제기구에서 견디기 힘들다. 더욱이 열정 없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종욱은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으로 불렸다. 평소 직원들에게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하라"라고 강조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룰 것이 아니라 일단 착수해야 회원국도 따르고 후원자도 도와준다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라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경우에는 책망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고 우리가 그 누군가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는 연간 30만㎞를 비행하며 150일을 출장 다녔지만 1등석에는 한 번도 타지 않았고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는 적도 많았다. "가난한 나라가 낸 분담금도 섞여 있는 돈으로 호강할 수 없다"라는 지론 때문이었다. 관용차도 "세계인의 건강을 책임지는 WHO 사무총장이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준중형 하이브리드로 바꿨다. 공용 목적 이외에는 관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외부인도 태우지 않았다. 주말에는 10년 된 낡은 볼보 승용차를 직접 운전해 다녔다. 각국에서 받은 선물과 기념품도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연말 자선행사에 내놓거나 직원들에게 경품 추첨을 통해 나눠준 뒤 모금액을 보육원에 전달했다.
5월 20일 제네바 WHO 본부에서 20주기 추모 행사

▲이종욱 20주기 추모 행사이종욱 WHO 사무총장의 20주기 추모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이종욱이 세상을 떠나자 애도와 찬사가 줄을 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고등급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고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했다.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KOFIH)은 '이종욱 펠로십 프로그램'과 '이종욱 글로벌 영프런티어'를 개설해 개발도상국 보건의료 인력과 국내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고 있으며, 2009년부터 해마다 이종욱 기념 공공보건상을 시상하고 있다. 서울대는 의과대에 이종욱글로벌의학센터를 설립했고, WHO는 쇼크룸을 '이종욱 전략보건운영센터'로 명명했다.
파라다이스그룹의 파라다이스상, 대한의사협회와 한미약품이 선정하는 자랑스러운 의사상, 세계한센포럼의 한센공로상도 뒤늦게 주어졌다. 생전에도 국민훈장 모란장, 적십자인도장 금장,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등을 받긴 했으나 "상을 주려면 WHO 사무총장 퇴임 후 잘잘못을 가려 결정하라"라며 사양한 적이 많았다.
2019년 말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 WHO가 초기 대응해 실패하자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의 정치적 편향성과 비전문성을 지적하는 비판이 쏟아지며 많은 의료인이 그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이종욱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사태가 악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WHO는 5월 18~2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제79회 세계보건총회의 공식 부대행사로 보건복지부·KOFIH와 함께 20일 오후 6시 30분(현지 시각) WHO 본부 EB룸에서 '이종욱 박사의 유산을 기리며: 글로벌 보건 형평성을 향한 20년의 여정'을 마련한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의 환영사,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의 축사, 김민석 총리의 영상 추모사, 레이코 여사의 인사말 등의 순서로 진행되고 각국 대표들의 추모 연설이 이어질 예정이다.
▲인사하는 레이코 여사2016년 5월 24일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서 열린 이종욱 사무총장 10주기 추모 행사에서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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