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16 18:53최종 업데이트 26.05.16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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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권은 '선제 타격, 미사일 요격, 대량응징보복'의 3축 체계로 주적 북한을 제압하겠다고 운운했다. 그러나 윤 정권은 북한과 장렬히 싸우다가 무너진 게 아니라, 국내의 반윤석열 세력과 싸우다가 무너졌다. 윤 정권의 주적이 정말로 북한이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과거의 냉전정권들에서도 나타났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에 대해 큰소리쳤지만, 김일성 군대의 공격을 받고 부산까지 밀려갔다. 박정희 정권 역시 북한을 당장에라도 어찌할 것 같았지만, 북한 무장공비들의 지속적인 남파로 홍역을 앓았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총력을 다해 맞선 상대방은 국내의 정적들이었고, 이·박은 이 싸움에서 패해 몰락했다.

전두환 정권 1년 차인 1980년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혼란스러웠다. 아프가니스탄의 친소련 쿠데타(1979.12.28)로 인한 소련의 영향력 팽창이 세계적 차원의 긴장을 낳아 모스크바 올림픽이 반쪽 올림픽으로 개막(1980.7.19)됐고, 이슬람혁명 2년 차인 이란에서는 미국대사관 점거 사태가 진행되고 있었다. 4월 7일에 미국이 단교를 선언하고 25일에 인질구출 작전을 벌였지만, 허사였다.

9월 22일에는 이란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와 전면전에 돌입했다. 11월 5일에는 강경파인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돼 세계정세의 격화를 전망케 만들었다.

공안당국의 과잉대응

계엄법, 반공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김명인 인하대 교수가 2020년 9월 2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두 번째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연합뉴스

이런 시국에 그해 연말의 전두환 정권이 집중한 것은 대북 안보가 아니었다. 8월 27일에 출범하고 9월 1일에 취임식을 가진 이 정권이 그해 12월에 중점을 둔 것은 학생들과의 전쟁이었다. 공안당국이 조만간 무림(霧林)으로 부르게 될 서울대 운동권 학생들이 정권의 핵심 관심사였다. 진실과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25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31권은 이렇게 설명한다.

"서울지방검찰청의 '1980.12.11. 서울대 무림사건 수사현황 종합보고'에 따르면, 무림사건 수사 당시 서정화 내무부장관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서울대 불온유인물 수사 상황을 보고하면서 '서울대 핵심 조직원 80명을 모두 검거하여 처단하는 것이 향후 학원 내의 소요사태를 방지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정책 건의를 하였다."

위 장면을 보면 내무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건의할 정도의 중대 사태가 서울대에서 발생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실상은 과잉 대응이었다. 위 보고서의 내용이다.

"1980. 12.11. 서울대학교 학생 김○경, 남○○, 남○○, 윤○○는 서울대 학생회관 앞에서 유인물 '반파쇼 학우투쟁 선언'을 뿌리며 시위하였다. 당시 학생운동은 이념 서클, 학회 대표자 등이 모인 비공개 조직(일명 언더)이 주도하면서 불필요한 시위를 자제하고 있었는데, 5·18민주화운동이 폭력적으로 진압되자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공개적인 시위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통령 부인 이순자의 사돈인 장영자가 '단군 이래 최대의 어음사기'로 구속(1982.5.5.)된 일을 계기로 전두환 정권의 기가 한풀 꺾이기까지의 2년 동안에는 전 정권의 폭력이 극을 달렸다. 그런 시기에 학생들이 5·18 학살에 대한 분노를 표하고 전두환 집단을 파쇼 정권으로 규정하면서 교내에서 유인물을 뿌렸다. 당시 상황에서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체제 안전에 영향을 줄 만한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전 정권이 학생들의 동향에 얼마나 민감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당시의 공안당국은 학생운동권을 마치 재야의 고수들을 부르듯 림(林)으로 지칭했다. 35세의 노무현 변호사가 맡은 1981년의 부림사건(부산학림사건)도 그런 배경에서 명명됐다. 공안당국은 서울대 운동권이 안개 속의 오리무중처럼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고 하여 무림으로 불렀다. 자신들이 수행하는 공안전쟁에 무게감을 싣고자 상대방에 대한 호칭에도 신경을 썼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이 재야의 무림들을 잡아들이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위 보고서는 내무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80명 검거'를 제안한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치안본부·안기부·보안사로 하여금 서울대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검거·수사하도록 지휘하였다"고 말한다.

10·26사태 직후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이 설치를 건의해 자신이 본부장으로 취임한 합동수사본부는 그의 정권 찬탈에 악용됐다. 그런 합수부의 지휘하에 내무부 산하의 치안본부(경찰청)는 물론이고 정부와 군대의 정보기관들까지 서울대 무림들의 검거에 참여했다. 이들의 목표는 내부무장관이 건의한 것보다 많은 98명을 잡아들이는 것이었다.

이 같은 대규모 작전으로 인해 1981년 3월 20일까지 총 70명이 검거됐다. 그중 11명은 구속되고 24명은 강제입영을 당했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구속된 11명은 계엄법·반공법·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에서 3년을 선고받았고, 그중 5명은 집행유예를 받았다. 공안기관들이 총출동한 점을 감안하면 전두환 정권이 상당히 과장된 마인드를 갖고 사건 수사에 착수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사건은 한국 학생운동의 향방에도 영향을 끼쳤다. 공안당국이 무림으로 지칭한 학생운동진영뿐 아니라 그 반대편의 학생운동진영도 이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향도부산> 2020년 제40호에 실린 정승안 동명대 교수의 논문 '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과 부림사건의 현재적 의미'(1981년 부림사건에 관한 논문)는 "무림파는 학생운동의 주류로서 다수파였다면, 학림파는 소수파"였다면서 "무림 쪽은 아직 대중운동의 역량이 미성숙하였기 때문에, 군부독재와의 전면적인 투쟁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고 설명한다.

학림파와 달리 무림파는 당장의 전면투쟁보다는 운동역량의 강화를 중시했다. 그랬던 무림파가 당국의 집중 탄압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1981년 학생운동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학림 쪽으로 옮겨갔다"라며 학림 쪽인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이 한동안 학생운동을 주도하게 됐다고 위 논문은 설명한다.

북한보다 학생들을 더 신경 쓴 전두환 정권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수사를 맡아 '고문 기술자'로 널리 알려진 이근안연합뉴스

무림사건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영예를 높여줬다. 위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신청인들은 당시 수사 과정에서 폭행 및 협박 속에서 진술서 작성을 강요당하였고, 잠 안 재우기, 통닭구이나 관절꺾기, 심지어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라면서 "더욱이 신청인 중 일부는 자신을 고문한 경찰을 특정하였고, 당시 해당 경찰은 수사 공로로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라고 기술한다. 이근안이 무림들 속으로 들어가 고문 기술을 과시했던 것이다.

관련자가 많은 만큼, 이 사건에 관한 재심 재판이 많았다. 각각의 재판에서 조금씩 다른 결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공통적인 것은 피해자들의 행위가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반대한 정당한 행위"였다고 재심법원이 인정했다는 점이다.

재심 재판과 관련해 위 보고서는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무림사건 관련자들이 청구한 재심에서 법원은 5·18특별법 제4조에서 정한 특별재심에 의거하여 재심을 개시하고, 계엄법 위반 범죄사실은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반대한 정당한 행위였다고 판단하고 모두 무죄를 선고하였다"고 알려준다.

무림사건은 냉전·반공 정권들이 국가안보에는 신경 쓰지 않고 정권안보를 위해 공안사건 조작에만 골몰했음을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다. 군인 출신들이 주도하는 집단이었는데도, 북한보다는 학생들을 더 신경 썼다. 무림사건은 냉전·반공의 허상을 보여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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