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권우성
평택을 단순한 지방도시라고 부르면 절반만 본 것이다. 평택은 국제정세가 생활비와 일자리로 번역되는 도시다. 평택항은 에너지 가격과 물류비에 민감하다. 고덕의 반도체 산업은 인공지능 반도체 수요와 공급망 경쟁의 파도 위에 서 있다. 캠프 험프리스가 있는 팽성 일대의 상권과 주거, 교통은 한미동맹이라는 큰 말이 생활 공간으로 내려앉은 자리다.
그래서 후보들은 "반도체를 키우겠다"고 말하기 전에 협력업체 인력난, 통근 동선, 산업재해 예방, 전력·용수·주거 문제를 말해야 한다. '안보도시'를 말하기 전에 기지 주변의 교통, 소음, 상권, 교육 문제를 어떻게 조정할지 밝혀야 한다. '평택항 발전'을 말하기 전에 항만 노동자의 안전, 화물차 기사들의 동선, 배후단지 물류망, 유가 급등 때 지역경제를 지킬 방법을 써야 한다.
거대한 비전은 필요하다. 그러나 비전은 주민의 생활로 내려올 때 힘을 갖는다. 평택의 세계성은 후보의 연설문을 장식하는 말이 아니라, 평택 시민의 식탁과 통근버스와 전세금과 병원 대기시간에 이미 들어와 있는 현실이다.
특별법 연장은 환영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5월 7일 평택에 중요한 뉴스가 있었다. '주한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평택시 등의 지원 등에 관한 특별법'의 유효기간을 2030년 말까지 연장하는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평택시로서는 환영할 일이다. 고덕국제학교 설립, 산업단지 조성 등 주요 현안을 중단 없이 추진할 법적 기반도 확보됐다.
그러나 특별법 연장은 "누가 환영했다"는 논평으로 소비될 일이 아니다. 2030년까지 무엇을 끝낼 것인지, 어느 사업이 늦어졌는지, 주민에게 직접 돌아가는 생활 인프라는 무엇인지 후보들이 숫자로 내놓아야 한다. 국가안보를 위해 평택이 감당한 부담을 말한다면, 그 보상이 도로와 학교와 병원과 상권 회복으로 어떻게 바뀌는지 보여야 한다.
경기도가 승인한 2040년 평택 도시기본계획은 목표 계획인구를 105만 4000명으로 잡았다. 반도체 산업 확대, 평택항 물류 기능 강화, 동부와 서부의 균형발전도 큰 방향으로 제시됐다. 큰 그림은 이미 있다. 선거가 할 일은 그 그림을 주민의 언어로 쪼개는 일이다. 어느 길을 먼저 넓힐 것인가. 어느 생활권에 병원과 학교와 돌봄을 보강할 것인가. 동부와 서부의 격차를 어떤 예산표로 줄일 것인가.
공약은 선물이 아니라 계약서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당의 정책공약집과 공약가계부 발표가 늦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표현은 점잖지만 뜻은 세다. 정책과 지방이 사라진 지방선거가 되고 있다는 경고다.
평택을에서는 이 경고가 더 무겁다. 후보의 체급이 클수록 정책은 더 쉽게 가려진다. 후보 사진은 커지고, 예산표는 작아진다. 손 흔드는 장면은 반복되지만, 사업의 우선순위는 흐려진다. 그럴수록 시민은 공약가계부를 요구해야 한다.
공약가계부는 거창한 책자가 아니다. 언제까지 하겠다는 일정표, 얼마가 든다는 예산표, 어느 기관이 책임진다는 역할표다. 국비인지 도비인지 시비인지, 법을 고칠 일인지 예산을 확보할 일인지, 국토부·국방부·산업부·경기도·평택시 중 누구를 설득해야 하는지 적어야 한다. 이 질문은 까다로운 유권자의 트집이 아니다. 표를 달라는 사람에게 계약서를 요구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절차다.
평택형 안전사회 매니페스토가 필요하다
평택을의 매니페스토는 결국 안전으로 모여야 한다. 여기서 안전은 사고 뒤 대책회의를 여는 말이 아니다. 사고가 나기 전에 위험을 찾고, 예산을 배치하고, 제도를 바꾸는 일이다. 치안, 교통, 산업재해, 항만 물류, 응급의료, 기후재난, 기지 주변 생활 문제를 선거의 첫 장에 올려놓는 일이다.
후보들이 내놓아야 할 것은 두꺼운 홍보 책자가 아니다. 한 장짜리 평택 위험지도면 충분하다. 평택항과 산업단지의 노동 안전, 고덕과 서부권을 잇는 교통, 신도시 통학로와 돌봄, 서부권 응급의료, 미군기지 주변 생활 문제, 폭염과 침수에 대비한 도시 기반, 반도체 협력업체의 고용 안정까지 표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표는 시간표를 가져야 한다. 100일 안에 할 일, 1년 안에 할 일, 임기 중 법안으로 풀 일, 예산으로 풀 일을 나눠야 한다. 이것이 안전사회로 가는 제도전환이다. 구호가 아니라 절차다. 이미지가 아니라 점검표다. 후보의 말이 아니라 주민이 들고 따질 수 있는 문서다.
6월 3일, 평택을이 물어야 한다
평택을 유권자는 이번 선거에서 더 큰 이름을 고르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더 구체적인 약속을 골라야 한다. 안중오거리의 펼침막이 크다고 좋은 후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고덕을 말한다고 반도체 도시의 위험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다. 평택항을 외친다고 물류와 노동 안전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팽성의 안보를 말한다고 기지 주변 주민의 생활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토론회가 열린다면 질문은 단순해야 한다. 평택지원특별법 2030년 연장으로 첫해 무엇을 하겠는가. 동부와 서부의 균형발전을 어떤 예산표로 설명하겠는가. 고덕, 팽성, 서부 5개 읍면의 생활권 문제를 어떤 순서로 풀겠는가. 반도체 경기가 좋아도 노동자와 협력업체가 불안하지 않도록 무엇을 제도화하겠는가. 미군기지 주변 주민에게 국가가 져야 할 책임을 어떻게 더 분명하게 만들겠는가.
민주주의는 거대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런 질문에서 살아난다. 주민이 후보에게 영수증을 요구할 때, 선거는 축제가 아니라 책임이 된다. 후보가 중앙정치의 전사로만 남으면 평택은 배경이 된다. 반대로 평택의 길, 항만, 학교, 병원, 일자리, 안전을 놓고 겨루면 평택을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실험장이 된다.
6월 3일 평택을의 경쟁은 그래서 중요하다. 누가 이기느냐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으로 이기느냐의 문제다. 인물로만 이기면 하루 뉴스가 된다. 공약가계부로 이기면 다음 4년의 기준이 된다. 사과문 다음의 예산표, 공방 다음의 실행계획, 현수막 다음의 계약서. 평택을 유권자가 그것을 요구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다시 손에 잡히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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