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10 11:10최종 업데이트 26.05.1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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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두루마기를 입은 임창순 선생님. 뒤에 지곡서당 현판이 보인다.청명문화재단

한자를 쓸 일은 있지만, 한자로 문장을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 현대 한국인들의 문자 생활이다. 하지만 한문 문법에 대한 지식은 한국 사회에 여전히 긴요하다. 백 년 전까지 생산된 대부분의 문서가 한문으로 적혔으므로 우리 사회가 그 정보를 이해하려면 이 문법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모든 한문 서적들을 한글로 몽땅 번역해 둔다 해도, 몇 십년이 흐르면 다시 번역해야 된다. 수십 년 전에 한글로 번역된 외국 서적은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한문을 자기 시대의 감각에 맞게 한글로 번역할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매세대 배출돼야 한다.

역사학자 겸 한학자인 청명(靑溟) 임창순(1914~1999)은 우리 사회의 그 같은 수요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지곡서당과 태동고전연구소의 설립자인 그는 한문 전문가들을 우리 사회에 대거 배출하는 공로를 세웠다.

비문 해석을 통해 한민족의 역사를 밝혀낸 사람

78세 된 임창순과의 인터뷰를 담은 1992년 2월 14일 자 <한겨레>는 "30여 년 동안 청명을 거쳐간 수료생은 비정규적 수강생을 포함해 줄잡아 5천여 명이 넘는다"고 알려준다. 그 일부는 1990년대 초반인 이 시기에 학계의 중추적 위치에 있었다. "지곡서당에서 3년의 정규과정을 마친 40여 명이 학계에 진출해 그들 중 10여 명은 중견 교수로 활약하고 있으며 나머지 수료생들도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이수 중이라고 이 기사는 말한다.

박정희 정권 때는 한글 전용화 정책으로 인해 한자 교육이 많이 위축됐다. 이런 시기에 임창순은 한문 전문가들을 대거 양성했다. 그렇다고 그가 한글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했던 것은 아니다.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그가 사재를 털고 장학금을 주면서까지 한문 전문가들을 배출한 것은 그것이 한국 역사의 이해를 위해서도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목표가 '한문 보급의 대중화'는 아니라고 밝혔다. 일반 대중은 한글을 전용하더라도 한문 전문가들은 남겨둬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문을 현대적 의미에 맞고 정확하게 뜻풀이할 수 있는 유능한 전문가가 있으면 돼요. 지곡서당을 차린 것도 한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과거의 정보를 현재의 언어로 전달하는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그의 사업은 엄밀히 말하면 국가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일을 위해 한 개인이 자기 평생을 바쳤던 것이다.

대규모 교육사업가인 임창순은 어린 시절에는 가난 때문에 학교도 가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성리학자 홍치유 등으로부터 한학이나 성리학은 배웠지만 일반 학교에는 취학하지 못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상한 논리로 손자의 학교 불취학을 정당화했다. 서예가인 김성장 시인의 '옷깃을 여미며 임창순의 삶을 더듬어보다'(<충북학> 2013년 제15집)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학교는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곳"이라며 가지 못하게 했다. 성리학처럼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탐구하기보다는 기능 습득을 중시하는 서구식 교육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담은 말이기는 하지만, 가정형편과도 무관치 않은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충북 옥천 출신인 임창순은 짐승을 운운하는 할아버지의 그 말씀을 절반은 지키고 절반은 건너뛰었다. 그는 신식 학교에는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짐승을 만드는 교육'은 받아들였다. 위 인터뷰 기사는 그가 20세 됐을 때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대구로 간 그는 날품을 팔고 공사장에서 막일꾼 노릇을 하는 등의 고단한 생활을 하면서도 독학으로 신학문과 한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학과 달리 신학문과 관련해서는 기초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독학을 통해 상당한 경지에 올라섰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그는 서른 무렵부터 학교 교사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는 길을 걸어나갔다. 위 인터뷰 기사의 내용이다.

"청명은 광복이 되면서 생애의 새 전기를 맞게 된다. 중등교원 자격시험에 합격한 그는 경북중학교의 역사교사로 교육계에 몸을 담으면서 가난에 빼앗긴 학문적인 열망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 후 대구사대와 경희대 한의대 전신인 동양의약대학에서 한문을 가르치다 교수자격심의위원회의 논문 심사를 거쳐 55년부터 성균관대에서 국사학과 교수로 본격적인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전문적으로 배운 일은 역사학자인 그가 고대의 비문을 쉽게 해석하는 무기가 됐다. 지금의 한국인들이 일부 고대 비문들의 내용을 쉽게 알 수 있게 된 데는 그의 공로가 크다. 위 <충북학> 기고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민족의 역사를 밝혀내는 데 금석학을 활용해 새로운 길을 열어놓았다. 전국 각지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 등 금석문을 해석·판독하여 <한국 금석집성>(1980)을 펴냈으며, 특히 단양 적성비를 판독하여 삼국시대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 자료를 제공한다."

충북 단양 적성비는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 영토였던 이곳을 점령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들을 포상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존재했던 시절의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 비문이 임창순에 의해 해독됐던 것이다.

4.19 혁명에 앞장선 어른

4.19혁명 당시, 교수단 시위 현수막 글씨를 쓰고 있는 임창순 선생.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4.19혁명기념도서관

임창순은 공사 일을 해가며 교사·교수가 되고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그랬던 그가 현대식 서당을 차리고 교육사업가로 인생 방향을 튼 데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의심도 작용했다. 그가 세운 청명문화재단의 홈페이지에 적힌 프로필에 따르면, 32세 때인 1946년에 대구사범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다가 사표를 쓴 것은 친일파 학장과의 대립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1960.4.26.)을 발표하도록 만든 4·25 교수단 시위 행렬에도 그가 있었다. 이 상황을 담은 그달 26일 자 <동아일보>는 "이날 데모의 첫 횃불을 올린 258명의 대학 교수단은 하오 5시 45분을 전후하여 서울대학교 교수회관 앞을 4열 종대로 편성하여 출발, '각 대학 교수단'이란 이름 밑에 '학생 피에 보답하라'는 푸라카드를 들고 거리를 나섰다"고 보도했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쓴 주인공이 임창순이다.

그는 5·16 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에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에서 통일운동을 한 일로 인해 중부경찰서에 구금되고 성균관대에서 쫓겨났다.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격렬했던 1964년에는 이 운동의 배후 세력을 허위로 조작한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에 엮여 옥고를 치렀다.

임창순은 4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에 정권과 충돌하는 일이 많았다. 이는 그가 대학을 떠나 서당과 연구소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됐다. 그가 세운 이런 교육기관들은 대학원 수준으로 운용됐다. 대학을 졸업해야 이곳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3년간 공부할 수 있었다.

이곳 학생들은 한문으로 문학과 사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동아시아 인문학의 3대 토대인 문사철 지식을 토대로 한문을 공부했다. 또 옛날 사람들이 마구 흘려 쓴 글자를 해독하기 위한 과정도 이수했다. 75세 때의 인터뷰를 담은 1989년 6월 16일 자 <매일경제>에 따르면, 그는 교육방식 중 일부를 이렇게 소개했다.

"사서삼경은 외우는 과목으로 돼 있습니다. 강독을 하는 과목은 <춘추좌씨전>과 <예기>를 비롯해 <장자>·<노자> 등이 있고, 이 밖에 문학 관계, 역사 관계 과목도 있습니다. 또 한문을 잘 아는 사람도 초서로 쓴 것은 모르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초서도 공부합니다."

활자로 인쇄된 한문 서적을 읽는 역사학자는 많아도 흘려 쓴 한문 편지를 읽는 역사학자는 많지 않다. 역사학을 가르치는 일반 대학원에서도 이 분야 공부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임창순은 이런 면에도 신경을 썼다.

학자가 부모 돈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학문적 토대를 쌓는 것도 어렵지만, 교육기관을 세우고 그 운영까지 책임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훨씬 어렵다. 공사장에서 일하면서 교사가 되고 교수가 된 그는 지곡서당과 태동고전연구소라는 교육기관까지 세웠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는 우리 사회가 한자로 적힌 과거의 지식들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는 현대 한국과 과거 한국의 '대화'를 수월하게 만든 공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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