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가 사회복지AI컨퍼런스에서 발표하고 있다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가 다음세대재단과 예강키움희망재단이 연 사회복지AI컨퍼런스에서 발표하고 있다.
다음세대재단
- 본인 소개를 부탁한다.
"비영리·공공 분야 기술을 지원하는 IT 에이전시 도토리랩스 대표다. 한국여성의전화 이사이기도 하다. SI(시스템통합) 업체에서 6년 동안 개발자로 일했는데, 육아휴직자라 권고사직을 당했던 사태를 겪으며 1인 시위까지 했다. 다른 동료들은 복직했지만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후 다른 개발 회사를 거쳐 빠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을 거쳐 도토리랩스를 설립했다. 대기업부터 NGO까지 폭넓은 경험을 쌓은 셈이다."
-활동가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있나.
"대학생 때 교제 폭력과 스토킹 피해를 입었다. 학교에 도움을 청할 창구를 찾다가 총여학생회를 알게 됐다. 졸업 후 친구들은 활동가의 길을 갔지만 나는 기업에 취직했다. 그러다 친구들을 도와주게 됐다. 서버가 터지면 봐주고, DB도 봐주고, 프론트엔드부터 백엔드까지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줬다. SI업체 전략 부서에서 일했기 때문에 시스템 전반을 알아야 했는데, IT시스템의 A부터 Z까지 아는 광범위한 지식이 지금은 자산이자 전문성이 됐다."
-대기업에 다니면서 활동가들과 함께 일했을 때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여성주의 블로그 서비스를 운영하던 '언니네트워크'에서 서버 유지 예산이 부족해 DB를 이관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실 돈도 안 되고 유지보수 할 것도 없으니 데이터를 날리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런데 활동가들은 '우리를 신뢰해서 이 콘텐츠들을 쌓아 놓은 것이니, 처음 시작하던 마음으로 끝까지 책임지고 싶다. 서비스를 닫더라도 열람할 수 있도록 유지하고 싶다'고 했다. 민간기업에서 데이터 유지를 주로 비용 측면에서 보고 있었던지라 이런 관점은 충격이었다. 작은 NGO나 스타트업의 책임감을 그때 배웠다."
- 국문과 출신의 개발자이자 작가, 활동가다. 어쩌다가 개발자를 하게 된 건지?
"원래 꿈은 소설가였다. 게임 '바람의 나라'에 7~8년 빠져 있었고, 길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내가 쓴 글을 홈페이지에 올리고 싶어서 중학교 때부터 개발을 배웠는데, 정작 국문과를 졸업해 보니 개발이 더 재미있었다. 만화나 게임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다들 개발을 조금씩 알던 분위기였다. SI기업에서 퇴직한 후 게임 회사 최종 면접까지 갔는데, 실무진 면접에서 '48시간 연속 근무가 가능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임원 면접에서는 기혼이고 자녀가 있는 여성에게 '왜 일을 하려 하느냐'는 부적절한 질문이 나왔다. 임원과 "시대가 어느 땐데 그런 질문을 하느냐"며 논쟁했고, 최종 합격했지만 입사를 거부했다."
-기업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르포집 <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도 펴냈다.
"원래 쓰고 싶었던 소설은 이청준 작가처럼 사회 고발 르포 성격의 작품이었다. 소설을 만드는 재주는 없다고 느꼈지만, IT 회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르포집을 낼 수 있었다."
- '기술 활동가'라는 정체성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십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님과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기술 지원을 넘어 기술로 사회에 기여하는 '기술 활동가'가 될 수 있다는 영감을 받았다. 센터에서 'IT 지원단'을 조직해 3년간 스터디를 한 후 개발자들을 위한 안전한 서비스 개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IT 지원단의 미션은 IT 서비스에서 발생하는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의 원인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구글 정책, 애플 앱스토어 정책, 방송심의위원회 규정 등을 살펴봤다. 법이 허술한 것도 그렇고 서비스 기능-예를 들어 팔로우 관계가 아닌 사용자 간에도 음성 통화가 가능한 메신저 기능 같은 것-이 성범죄를 쉽게 유발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예전 소셜미디어에서는 사용자 가입 시 계정 공개 설정의 기본값을 '전체 공개'로 해서 성범죄에 취약했다. 기본값을 '친구 공개'로 해야 사용자들이 겪는 이런 취약성을 예방할 수 있다."
'피해자 중심 기술'의 필요성

▲작업 중인 조경숙 대표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가 무의 지하철교통약자환승지도 API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SI기업 전략부서 출신으로 프론트엔드, 백엔드, 서버 등 다양한 개발 분야 지식이 있어 NGO들의 기술 자문을 해 주고 있다.
조경숙
- 무의의 지하철교통약자 환승지도 프로젝트를 하면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
"무의가 수백 명의 시민들과 함께 지하철 내 휠체어 환승 데이터를 정말 자세하게 정리해 놨던 터라 처음에는 API(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만 있으면 정말 쉬울 거라 생각했다. 개발 자체에는 이슈가 없었는데 중간에 한번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다. 기존에 무의에서 확보한 국토부 공공 API에 오류가 많아 엑셀로 오류 사항을 정리해 보냈더니 "6월에 종료할 거라 못 고쳐준다"는 답이 돌아왔던 것이다. 무의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전화위복이었다. 고생하긴 했지만 이후 서울교통공사가 새 API를 제공하고 DB를 전면 재구축했다. 다시 갈아엎고 개발해야 하는 부담이 컸지만 결과적으로 속도도 좋아져서 만족스럽다. 힘든 과정이 많았지만 뿌듯하다.
무의 데이터는 발로 뛴 데이터라 정확도가 높다. 더 많은 사람이 사용했으면 한다. 여기에 더 많은 정보를 넣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외국인을 위한 다국어 지원이나 휠체어 이용자가 불편한 환승 경로-예컨대 신당역 2호선- 6호선 휠체어 이용자 환승은 리프트를 3번 타거나 역 밖으로 나가서 우회해야 한다-를 피할 수 있는 회피 경로정보 추가 같은 기능도 넣으면 좋을 것 같다. 수유실, 화장실 위치 등 다양한 공공데이터가 있는데, 업데이트나 추가 기획을 하려면 재원이 필요하다. 무의 입장에서는 데이터 품질 관리를 비롯해 데이터 거버넌스가 프로젝트 진행만큼이나 중요할 것 같다."
- 한국여성의전화에서 디지털 성폭력 피해 지원도 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와 현재 내가 박사과정에 있는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가 MOU를 체결해 피해자 핸드폰 포렌식을 진행하고 있다. 학과장이신 김기범 교수님이 성평등가족부 자문위원도 맡고 계셔서 관련 분야에 지원을 많이 해 주신다. 지도교수이신 정두원 교수는 기기와 장비를 빌려 포렌식을 하면 관리·감독까지 직접 해 주신다. 지금 내가 연구하는 분야는 디지털 포렌식으로 '피해자 지원 기술(Survivor-Centered Technology)'이라고 부른다. 해외에서는 활발히 연구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전무한 분야다. 수사나 추적 기술이 아니라, 피해 현장에서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기술이다.
내 석사 논문 주제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 피해자가 디지털 증거를 수집하는 방법'이었다. 학생 시절 스토킹 피해를 당했을 때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경찰 신고가 어려웠던 경험에서 출발했다. 가해자가 자해 사진을 잔뜩 보냈는데 다 지워버려서 증거가 남지 않았고, 스토킹처벌법도 없던 시절이었다. 경찰은 '해코지가 아니'라고 했다. 어찌 보면 이 연구는 막막했던 스무 살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범죄를 연구하고 있으니 정서적 소진이 클 것 같다. 어떻게 대처하나.
"가장 큰 고민이다. 정서적으로 소진될 뿐 아니라 자칫 사람 자체를 미워하게 된다. 인류애를 어떻게 회복할지가 숙제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우선은 몸의 체력이 마음의 체력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헬스와 러닝을 열심히 한다."

▲책 표지도토리랩스 조경숙 대표가 컴퓨터공학자 한지윤 저자와 지난 2025년 공동으로 펴낸 책 표지. AI가 촉발한 변화가 사람들 마음 속에 일으킨 감정의 요동을 추적한 책이다.
조경숙
-< AI 블루>라는 책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AI(인공지능)가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책에서는 AI 때문에 뒤떨어질까봐 우울해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AI가 초래한 불안감을 많이 다뤘는데, 현재 심정은 어떤가.
"2023년에 책을 집필할 때만 해도 AI 확산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AI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단계까지 왔다. 이제는 이 기술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사람들이 AI 기술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다른 기술도 그렇지만 특히 AI는 거버넌스가 너무 중요하다. 기술이 어떻게 개발되어야 하고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그 방향을 논의할 때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다. 옛날 기술과 달리 AI는 개발할 때 특히 더 규모의 경제로 가고 있어 국가의 대규모 투자와 지원이 불가피하다. 그렇기 때문에 거버넌스가 더더욱 중요하다. 어떤 기술을 어디에 쓰고 어디에는 안 써야 할지, 어떤 데이터는 쓰지 말아야 할지 논의하는 자리에 다양한 의견이 있어야 한다.
여성계도 기술이 성평등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전환되도록 더 적극적으로 거버넌스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현재 성평등가족부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기회 될 때마다 의료 지원, 피해 지원만큼 피해 중심 기술 R&D와 피해자를 위한 디지털 포렌식 지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조 대표의 '피해자 중심 기술' 관련 문제 제기는 성과를 거뒀다. 5월 6일 성평등가족부는 디지털성범죄 해결을 위해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경찰청 등이 함께 참여하는 <디지털성범죄피해통합지원단>을 출범시켜 범정부 대응체계를 가동하겠다고 밝혔다. 원민경 성평등가족부 장관은 페이스북 포스팅을 통해 "피해자가 확실한 불법촬영물 등에 대해서는 통신사업자에게 접속 차단을 요청하는 등 '피해자를 위한', '피해자 중심의' 신속한 대응체계를 마련하고, 삭제불응, 반복게재 사이트에 대해서는 심층 분석을 바탕으로 제재조치, 수사 등 강력한 대응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AI기술은 불 같은 것… 어떻게 조절할지가 관건이다"

▲조경숙 대표가 여성인권영화제 토크에서 발언하고 있다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가 자신이 이사로 있는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영화제 토크에서 발언하고 있다.
조경숙
- 활동가로서 기술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기술은 단순한 도구인가.
"기술 자체가 인류에게 이로울 수도, 해로울 수도 있다. 어떤 관점으로 보고,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게끔 제어 장치를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지나치게 기술중심적 사고도, 전체주의적인 중국의 거버넌스도 현재로서는 정답이 아닌 것 같다. 어찌 보면 AI 기술에 대한 합의가 있기 전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더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AI 거버넌스에서 AI 개발 속도만큼 다양성, 윤리, 민주주의 등을 다루는 게 필요하다."
- AI를 핑계로 자본이 고용을 줄이는 현실이다. 이럴 때 사회초년생들이나 사회에 나오게 될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전처럼 주니어들에게 조언하기가 어려워진 세상이 됐다. 다들 속도가 너무 빠르다. 일 처리도 너무 빠르다. 과잉 정보의 시대에서 쫓아가는 데 급급해진다. 그럴 때일수록 자기 통제가 필요하다. 휩쓸려 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불안하고 우울해도 속도감에 휩쓸리지 말고 '내가 뭘 좋아하고, 어디서 행복을 느끼는지' 사유해야 한다. 사유하기 어려운 시대라지만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돛과 닻에 비유하자면 지금은 돛을 펼칠 시기가 아니라 닻을 내려야 하는 시기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개인적으로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보지 않고 정보를 차단하는 시간을 가져 보길 권한다. 나도 2주 전부터 이를 실천하며 산책이나 청소를 하고 있는데, 쫓기는 마음이 덜해지는 변화가 있었다."
-작가, 개발자의 삶을 거쳐 기술 활동가가 됐다. 활동가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많을 것 같다. 이런 활동을 할 때 나 자신을 움직이는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앞으로의 계획은?
"가장 힘들 때 접했던 우연한 만남들이 점점 '피해자 중심 기술'이란 길로 이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주변 이들의 의지가 나를 이 길로 이끈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친구들이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던 경험은 나 또한 "누군가 힘들 때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동기가 됐다. 올해 계획은… 무의나 녹색연합, 서울여성환경연합 등 현재 기술 지원을 하고 있는 비영리 단체와의 협력 프로젝트에서 좋은 임팩트를 내고 싶다. 또한 피해자 중심 기술 연구도 계속 이어 가고자 한다.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길 바란다. 함께 미지의 세계를 개척할 동료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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