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10 19:26최종 업데이트 26.05.10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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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구 공릉동도깨비시장 안에 있는 커피 그라인더 전시관 말베르크노원구청

살다 보면 결정 장애로 고생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많다. 카페도 결정 장애를 지닌 사람을 자주 보는 곳이다. 특히 메뉴에 어려운 이름의 커피가 많은 우리나라 카페에서는 쉽사리 결정을 못 해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많다.

나는 비교적 결정이 빠른 편에 속한다. 익숙한 것을 습관적으로 선택하는 성격도 아니다. 카페에 가면 전혀 마셔본 적이 없는 커피, 아니면 최근에 마신 적이 없는 커피를 주문한다. 간혹 새로운 커피가 없으면 가장 최근에 로스팅한 커피를 물어서 주문하기도 한다. 물론 소문난 시그니처 커피가 있으면 그것을 주문하는 때도 많다. 어찌 되었든 커피 앞에서 선택에 시간을 많이 낭비하지 않는 편이다.

일상생활에서도 나의 그런 태도는 나타난다. 얼마 전에 커피가치평가(CVA)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이었다. 운전 중에 수업 시작이 30분 늦추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업 장소에 차를 주차하고 점심을 먹고 수업을 들으려던 계획이었는데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때 전날 인터넷에서 본 커피그라인더박물관 기사가 생각났다. 위치가 수업 장소에서 멀지 않았다. 문제는 박물관을 관람하면 점심 식사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점심이냐 박물관이냐?

나의 선택은 박물관이었다. 점심은 하루 굶는다고 문제가 생길 일은 아니지만, 박물관은 호기심이 가득했을 때 방문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을 바꾸어 서울 노원구 공릉동도깨비시장 안에 있는 커피 그라인더 전시관 '말베르크'로 향했다.

'말베르크'(Malwerk)는 분쇄기를 뜻하는 독일어다. 우리나라에 커피박물관은 열 개 정도 있지만, 말베르크처럼 한 종류의 커피 도구만을 전시한 전문 박물관은 말베르크가 유일하다. 커피가 유럽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한 1600년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350년 동안 세계인들이 사용하던 수동 그라인더 11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2층에는 카페와 함께 상설전시관이 있고, 3층에는 기획전시관이 있다.

주변에 주차하고 도깨비시장에 들어섰다. 점심을 굶은 사람에게는 조심해야 할 곳이다. 온갖 시장 음식 냄새가 발길을 느리게 만든다. 유혹을 뿌리치고 말베르크에 도착했다. 2층에서 커피와 작은 디저트 하나를 주문했다. 커피 맛이 꽤 좋았다. 바리스타에게 물어보니 커피 리브레 원두였다. 어쩐지 익숙한 맛이었다. 아쉽게도 이승재 관장은 외부 약속으로 자리를 비운 날이었다.

혼자 2층을 보고 3층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누군가 오더니 인사를 하는데 인터넷에서 본 이승재 관장이었다. 약속이 변경되어 일찍 돌아왔다는 얘기와 함께 안내를 시작하였다. 점심을 포기하고 온 걸 하늘이 알고 이 관장님을 보내준 게 아닐까 내 맘대로 생각했다.

세계 역사가 담겨 있는 그라인더

말베르크에 전시된 커피 그라인더이길상

이승재 관장은 독일에서 20년 가까이 살면서 현지 커피 문화에 빠졌고, 그라인더에 관심이 생겨 유럽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동 그라인더를 수집하였다.

다른 커피 기계나 용품과 달리 가정에서 사용하던 수동 그라인더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이라는 특징이다. 하나하나의 그라인더에는 사용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흔적이 묻어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나에게 자기가 살던 시대의 커피 유행과 자기의 커피 취향을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말베르크가 번화가가 아니라 시장 한복판에 자리 잡은 것도 전시품이 지닌 이 같은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유럽에 커피가 처음 유행한 160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절구 형태의 분쇄 도구가 있다. 당시는 향신료나 약초를 빻던 우리가 아는 절구 모양의 도구로 커피를 갈았다. 절구 문화는 특정 지역에서 발생하여 전파된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던 보편적 특징을 지닌 문화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품이다.

두 번째는 모든 수동 그라인더는 만들어진 시대의 커피 역사를 담고 있고, 이를 통해 그 시대의 일반 역사까지 알게 해 준다. 포탄과 탄피를 녹여서 만든 황동 그라인더도 있다. 이는 두 번의 세계 전쟁을 주도하여 고통을 겪은 독일이라는 나라 시민들이 갖고 있던 전쟁에 대한 경계심, 평화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 제품이다. 그라인더에 세계 역사가 담겨 있다.

말베르크에는 독일 레나츠(Lehnartz)사가 제작한 커피 그라인더 시리즈 전체가 전시되어 있다. 2005년에 소장자의 사망으로 경매에 나오자 이승재 관장이 통째로 매입, 소장하게 된 것이다. 2011년에 기네스에 등재되었다. "점심 한 끼를 기꺼이 거르고 관람하길 정말 잘했어"라고 중얼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결국은 이야기였다. 박물관은 물건을 모아놓는 것에 그치는 순간 가치를 반쯤 잃어버린다. 반면, 이야기를 불어넣으면 가치는 두 배가 된다. 말베르크가 그렇다.

열흘쯤 지나서 말베르크를 다시 찾아갔고, 이번에는 공릉도깨비시장에서 맛있는 칼국수를 먹고 들어갔다. 이승재 관장은 지난번에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노원구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경춘선공릉숲길커피축제' 추진위원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새로운 경험인데 결정하는 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었다. 커피는 인연을 맺어주는 음료가 확실했다.

그날 나의 말베르크 방문은 선택의 문제였다. 그것은 단순히 점심과 박물관의 선택이 아니라, 배고픔과 호기심 사이에서 무엇을 먼저 채울 것인가의 문제였다.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질문이었다. 결국 사람은 선택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라는 것을 경험한 날이었다.

커피 공화국에 색깔을 더해주는 장소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에 있는 산천어커피박물관이길상

내가 두 번 이상 방문했던 또 다른 박물관은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에 있는 '산천어커피박물관'이다. 커피박물관 이름에 지역 축제의 상징인 산천어가 붙었다. 미국에 살며 30여 년간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1000여 점의 유물을 기증한 제임스 리의 애정이 담긴 박물관이다. 몇 번 방문했지만 아쉽게도 물품 기증자인 제임스 리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결국 인맥을 동원해 연락이 닿았다.

마침 춘천커피페스타 바리스타 대회가 있는 날 제임스 리를 만날 약속이 잡혔다. 이날은 아침을 포기하고 일찍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 시내 카페에서 제임스 리를 처음 만났다. 친절함과 교양이 몸에 밴 분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춘천 교외에 있는 자택을 방문했다. 2층에 보관하고 있는 미공개 물품들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물품들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그라인더, 1940년대에 만들어져 진공 포장된 채 보관 중인 미개봉 원두, 커피 가루로 그린 초대형 그림도 있었다. 바리스타 대회 참석 일정으로 인해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졌다.

몇 개월 후 여유 있게 일정을 잡아서 다시 방문했다. 이번에는 지난번 방문 때 보지 못한 수집품들을 구경했다. 그런데 더 많은 미공개 수집품을 제임스 리가 충청남도 고향집에 보관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온갖 이야기를 품은 물품들이 창고에 갇혀 박물관을 차리고 싶은 자치단체나 개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제임스 리와의 만남 이후 여러 지방자치단체, 박물관, 대형 카페 등과 제임스 리 소장품을 이용한 커피 박물관 설립을 추진했다. 긴 협의 끝에 김포시에 있는 카페 포지티스페이스566에서 이 소장품을 인수하였다. 수집한 귀한 물품을 제공한 제임스 리, 물품의 가치를 인식하고 인수를 결정한 포지티브스페이스566 이강 대표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포지티브스페이스566은 2023년에 좌석수 2190개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 최대의 카페다. 역사적 물품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듣고, 꼼꼼히 기록하여 전하는 것은 품위 있는 나라의 후손인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이다.

해외에서 수집한 물품을 기꺼이 기증하여 설립한 말베르크와 산천어커피박물관 이외에도 우리나라에는 커피박물관이 정말 많다. 내가 방문한 곳만 해도 경기도 양평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 강릉 '커피커퍼 커피박물관', 강릉 '테라로사 커피박물관', 제주 '커피박물관 바움', 부산의 '부산커피박물관'과 '국제커피박물관', 파주 '헤이리커피박물관', '충주커피박물관' 등이다.

모두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고맙고 훌륭한 박물관들이다. 커피 공화국 대한민국 이미지에 색깔을 더해주는 장소들이다. 이 중에 점심을 반납하고 볼만한 박물관, 재방문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곳이 얼마나 될까?

내가 아침을 포기하고, 점심을 포기하고 찾아간 곳은 박물관이었다. 그러나 내가 진짜 만나고 싶었던 것은 전시 물건이 아니라, 물건이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물품 그 자체로는 죽은 역사다. 물품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살아 있는 역사다. 수집은 개인의 열정이고 선택이지만, 기록은 사회의 책임이다. 죽은 역사를 살릴 줄 아는 우리 민족, 살아 있는 역사의 가치를 아는 우리 민족이 되었으면 좋겠다.

(<커피 한잔에 담긴 문화사>의 저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5). 커피 한잔에 담긴 문화사. 싱긋.
이길상(2023).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역사비평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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