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09 19:04최종 업데이트 26.05.09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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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6일 전남대에서 비상학생총회가 열리고, 8일 이곳에서 조선대·전남대 학생들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14일에는 전남대생 7천여 명이 전투경찰대를 뚫고 교문 밖으로 나가 전남도청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15일에는 시민·청년·교수들이 광주교대·조선대·전남대생 2만 명 이상과 함께 같은 곳에서 집회를 열었다. 16일에도 시민과 학생들이 그곳에 집결했다. 이때는 5만여 명이 운집했다. 5월 초에 광주에서 이런 분위기가 생긴 배경에 관해,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 제1권은 "신군부의 정권찬탈 음모 소식이 전달되면서 위기감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6일까지 민주화투쟁을 고조시키던 시민과 학생들은 잠시 휴식을 갖기로 결정했다. 위 보고서는 "의사가 충분하게 전달됐으니 정부 측의 답변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17일과 18일은 쉬기로 했다"라면서 "만약 정부가 계엄해제와 향후 정치일정 등을 명확히 밝히지 않을 경우 19일부터 다시 성토대회를 벌이기로" 했다고 설명한다.

다시 광주로 돌아온 홍남순

인권변호사 홍남순광주지방변호사회관 1층 로비에 세워진 홍남순(1912~2006) 변호사 흉상. 홍 변호사는 19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시기엔 16명의 수습위원과 함께 시민 희생을 막기 위한 '죽음의 행진'에 나섰다. 5·18 직후 내란수괴 혐의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년 7개월간 복역하다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는 등 고초를 겪었다.김형호

휴식 첫날인 17일, 지역 인사들의 회합에서 강경 대응책이 제시됐다. 하지만 결론은 신중론으로 귀결됐다. 이 지역 민주화운동 지도자 중 하나인 홍남순 변호사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동양정치사상사 연구> 2023년 제22권 제2호에 실린 이희주 서경대 명예교수의 '취영 홍남순의 생애와 사상'은 "취영은 사태의 추이를 보면서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이 회의 뒤에 홍남순은 "예비검속 대상자이니 피하라"는 지인들의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그날 밤 9시 42분, 국무회의는 비상계엄을 제주까지 확대하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했다. 11시에는 '반국가세력'을 체포하기 위한 예비검속이 전국적으로 개시됐다.

계엄을 제주도까지 확대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국 계엄을 통해 계엄사와 신군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행정부를 확실히 장악하며, 사실상 새로운 계엄을 선포하는 것 같은 효과를 만들어 사회통제를 강화하고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일이었다.

68세의 홍남순은 계엄 확대 소식을 라디오로 들었다. "섬뜩한 비수가 가슴에 꽂히는 듯한 느낌"(위 논문)이 그의 가슴에서 일었다. 이 밤이 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지인들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예비검속의 예봉을 잠시나마 피하자는 마음으로 광주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고 위 논문은 기술한다.

그런데 서울에 들어선 전남 화순 출신의 이 민주화운동가는 서울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광주에서 유혈 진압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위 위원회의 보고서는 5월 18일의 광주 상황에 관해 "계엄군은 처음부터 무자비한 진압을 펼쳤다"라며 "대학생이나 청년으로 보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진압봉과 군홧발, 개머리판으로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며 굴복시킨 뒤에 차에 실어 연행했다"고 기술한다. 이런 참상을 전해 들은 홍남순은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위 논문의 설명이다.

"서울에 도착한 날 저녁, 취영은 광주가 불바다가 되어 외부와의 모든 연락이 끊긴 채 고립되었으며 다음날부터는 교통수단도 끊어질 것이라는 비보를 접하였다. 어른으로서 엄청난 위기에 빠진 광주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사지인 광주로 다시 들어갈 것을 결심하였다."

5월 20일 아침, 홍남순은 '사지'를 향해 길을 나섰다. 광주까지 한 번에 가는 대중교통이 끊겨, 광주 북쪽인 전북 정읍까지 간 뒤 택시와 도보로 어렵사리 광주에 들어갔다. 이때가 5월 21일, 광주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한 날이었다. 다음날, 그를 중심으로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질서 유지, 계엄군과의 협상, 무기 관리 등을 위한 기구였다.

21일에 특전사 부대들은 광주 외곽으로 철수했다. 이로 인해 광주는 민주주의의 해방구가 됐다.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한 신군부와 미국의 움직임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25일, 미국 제7함대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부산에 입항했다. 미국이 이렇게 북한을 견제해줌에 따라 신군부는 북쪽이 아닌 남쪽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1989년 3월 6일 자 <광주일보>는 그날 밤부터 '계엄군이 재진입할 것'이라는 소문이 시내에 퍼졌다고 말한다.

26일에는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이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에게 계엄군이 공격을 재개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전남도청을 지키는 광주 시민들과 홍남순 등의 긴장감도 이 시점에 극대화됐다. 위 논문의 설명이다.

"5월 26일 새벽 5시 30분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곧 광주 시내로 진격할 것이라는 급보가 들어왔다. '계엄군의 탱크가 밀려온다!'는 소리에 도청 안에서 진을 치고 있던 학생·시민군·수습위원들 사이에 공포감이 엄습했다."

이런 속에서 계엄군이 정말로 탱크를 몰고 진격해 왔다. 충격에 빠진 대책위원들은 시민군과 계엄군의 극한 충돌을 막고자 스스로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위 <광주일보>에 따르면, 이렇게 외치는 대책위원들이 있었다.

"우리 어른들이 죽음으로 막읍시다. 그래서 광주를 살려야 합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우리들은 불을 뿜을지도 모르는 전차 앞에 나가도 죽을 것이며 여기 있어도 죽을 것입니다."

내란을 저지했던 이에게 '내란죄'라니

5.18민주화운동 진압한 계엄군 탱크들1980년 5월 28일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계엄군 탱크들이 도로에 세워져 있다.연합뉴스

대책위원들은 전차가 불을 뿜어대는 상황을 막고 계엄군과 협상하고자 거리 행진에 나섰다. 이들 중 17명은 26일 새벽에 행진을 개시했다. 그때 시내에는 보슬비가 내렸다. 홍남순과 동료들은 탱크 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도로변의 시민들이 이 장면을 보고 하나둘 가세해 행렬은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현장을 취재하던 외신 기자들은 "죽음의 행진"이라고 본사에 타전했다.

탱크를 향해 맨몸으로 나아가는 시민들과 대책위원들을 목격한 계엄군은 협상을 선택했다. 이에 따라 대책위원 6명이 회담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협상은 결렬됐고, 다음날 계엄군은 전북도청을 공격했다. 그런 뒤 홍남순은 김수환 추기경, 윤보선 전 대통령, 최규하 대통령 등에게 도움을 구해보겠다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그 길에서 그는 계엄군에게 붙들렸다.

홍남순이 광주에 재진입했다가 수습대책위를 이끌고 죽음의 행진을 벌인 뒤 광주를 다시 빠져나가는 과정을 신군부는 내란죄로 규정했다. 1980년 10월 26일 자 <조선일보>는 전남북 계엄보통군법회의 재판에서 그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면서 죄목은 내란죄라고 보도했다. 지휘관 직권에 의해 15년형으로 감형된 그는 1982년 12월 25일 형집행정지를 받고 석방됐다.

신군부 하의 군사법원은 홍남순을 내란 중요임무 종사자로 규정했지만, 88세의 전두환이 재판받으러 광주에 간 2019년에 광주지방법원은 정반대 판단을 내렸다. 그해 4월 4일 자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홍남순 사건의 재심을 맡은 이 법원은 "시기와 동기, 사용 수단, 결과 등을 볼 때 헌정질서 파괴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한 행위"라고 홍남순의 행위를 규정했다.

재심 법원은 홍남순의 행위가 내란을 저지르는 행위가 아니라 내란을 저지하는 행위였다고 평가했다. 신군부가 내란범이자 반란군임을 전제로 하는 판단이었다. 세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홍남순이 무죄임을 알고 있었으나, 대한민국 국가는 39년이 흐른 뒤에야 이 사실을 실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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