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05 19:38최종 업데이트 26.05.05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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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과 1991년에 노무현 등과 함께 '꼬마민주당'을 이끈 이기택(1937~2016)은 열아홉 살 때인 1956년에는 건강문제 때문에 미래가 불투명했다. 부산상고의 성적 우수생이었던 그는 1학년 때부터 앓은 십이지장궤양 때문에 졸업을 앞두고 홍역을 치렀다.

이기택 회고록인 <우행(牛行), 내 길을 걷다>는 "3학년 2학기 입시준비 막바지 시기에 십이지장궤양이 재발"했다면서 "상태가 심각해 입시 준비는커녕 학교도 나갈 수 없게 되어 출석 일수가 모자라 졸업까지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라고 말한다.

학교 측은 그의 성적과 건강을 고려해 연세대 무시험 특례입학생으로 추천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서울대 화학공학과 출신인 그의 형은 일단 요양한 뒤 다시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라고 권했다.

형의 권유에 따라 재수를 선택한 그는 "머리에 이부자리를 인 어머니를 따라 쌀자루를 등에 지고 양산 통도사에서 좀 더 들어간 곳에 있는 백련암이라는 암자를" 찾아갔다. 어머니가 하산한 뒤에는 그 홀로 산중에 남아 죽을 끓여 먹으며 지냈다. 고시생들이 많았지만 환자들도 있었던 그곳에서 느낀 심경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장기였던 그 시기에 나는 제때 대학에 진학도 못하고 홀로 깊은 산속 암자에 들어가 요양해야 했다. 참으로 불행했다. 사실, 그때 나는 미래를 비출 등불이 꺼진 듯 무척이나 낙망했었다. 한마디로 인생의 낙오자가 된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시기가 결과적으로 새옹지마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훗날 내가 다른 길을 저버리고 정계에 투신하게 된 데는 아마도 이때의 영향이 지대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등불이 꺼진 듯"한 백련암 생활 중에도 고시생들과 세상 이야기도 하고, 그들이 외출했다가 갖고 돌아오는 "신문쪼가리"를 읽으며 토론에도 끼어들었다. 이는 "학교와 친구들밖에 몰랐던 내가 비로소 세상사에 관심을 갖고 불의한 시대에 공분하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고 그는 돌아본다.

3선 출마 위한 관제시위에 우마차까지 동원

1960년대 춘천의 우마차 행렬 모습. 자료사진.연합뉴스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이승만은 그해 3월 5일 자유당 임시전당대회에 보낸 유시(諭示)에서 '3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1954년 11월 29일 자신에 한해서만 3선을 허용하는 개헌안을 자기 손으로 공포했던 이승만이 대선을 코앞에 두고 폭탄 발언을 했던 것이다.

<태조실록>을 비롯한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백성을 타일러 가르친다는 '유시'다. 이승만은 그날의 유시에서 "우리는 공의와 체면이 없는 것은 싫어하는 것", "한국은 민주주의국가이니 민주주의를 따라서 가는 것을 보여야만 되며" 등의 표현을 써가며 3선 출마는 있을 수 없다고 당원들을 타일렀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그 입장문 말미에 있었다. "대통령을 뽑는데도 전 민중이 하면 힘이 더 되는 것이니, 내 의도를 잘 설명해서 공론을 듣는 것이 좋을 것이므로 자유당도 민의를 따라서 나가도록 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라는 대목이다. '전 민중'이 나서서 '민의'가 형성되면 입장을 바꾸겠다는 것인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할 만한 부분이다.

그해 3월 8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UP통신 기사에 따르면, 이승만의 입장 표명을 전해 들은 미국의 한국통들은 "여론의 압력에 의한 출마를 희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승만이 좀 더 강력한 국민적 지지 표시를 주문하고 있다고 봤던 것이다.

불출마 선언 직후부터 자유당은 그 선언이 '전 민중'의 참여에 따른 압도적 '민의'에 의해 뒤집히는 상황을 만들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선언 사흘 뒤인 3월 8일에는 '이 박사 출마 요청 궐기대회'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리고, 9일에는 '이 박사 출마 요청 민중대회'가 경복궁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

1952년 7월 18일 제정된 '대통령·부통령 선거법' 제1조는 "국민으로서 만 21세 이상의 자는 선거권이 있다"고 규정했다. 자유당이 이해한 '전 민중'의 범위는 여기 언급된 '만 21세 이상'을 넘어섰다. 자유당은 투표권 없는 초등학생들도 이승만의 3선을 희망한다는 모양새를 만들어내고자 애썼다. 아이들까지도 '이승만 할아버지'를 원하는 것이 민의(民意)임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 소식은 산중에서 죽을 끓여 먹던 이기택에게도 전해졌다. 고시생들과의 대화, 아니면 "신문쪼가리"를 통해 알게 됐던 모양이다. 회고록의 한 대목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을 철회하라는 구호와 전단이 거리에 난무했고, 지방에서는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동원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출마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1956년 3월 24일 자 <경향신문>은 "지난 며칠간을 돌이켜볼 때 전국에 걸쳐 일어났던 민의 동원은 가가호호마다 한 가지 큰 걱정거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어린 자녀에까지도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었다"라며 "학업에만 전념해야 할 학생들을 학업마저 젖혀놓게" 만들었다고 우려를 표했다.

산중의 이기택을 더 놀라게 만든 뉴스도 있다. 그는 "기상천외한 일이 발생했다"라며 "아마도 동서고금을 통틀어 전무후무할 코미디가 아닐까 한다"고 한 뒤 "우마차조합에서 소와 말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출마를 원한다며 우마차 8백 대를 동원해 데모를 벌인 것"이라고 회고록에 썼다.

우마차를 동원한 관제 시위는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그해 3월 14일 자 <경향신문>은 "서대문·동대문·용산·성동 등 각 구(區) 우마차조합"이 12일 시위에 나섰다고 전했다.

3선 요청 시위에 소와 말까지 동원된 사건은 그달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격론의 소재가 됐다. 이는 독립운동가 이관술을 비롯한 항일·진보 진영과의 대결에 나섰던 친일검사 출신의 조재천도 격분시켰다. 이 시기에 민주당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동료 24명을 대표해 대정부 비판에 나섰다.

다음날 <동아일보> 톱기사에 따르면, 그는 "우의(牛意)·마의(馬意)"까지 동원된 우마차 시위를 경찰이 조작 혹은 묵인한 증거가 있다며 김형근 내무부장관의 출석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유당의 비협조로 장관 출석은 무산됐다.

4.19 혁명에 뛰어든 청년 이기택

'2013년 시민사회단체 합동신년회'에 참석해 새해 덕담을 나누고 있는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의 살아생전 모습.유성호

우마차 시위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민의뿐 아니라 우의·마의까지도 이승만에게 있는 듯한 모양새가 연출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마차의 행진 과정에서 '차량' 배설물이 도로 곳곳에 떨어졌다. 이기택은 "데모에 동원된 소와 말들이 싼 똥으로 인해 서울 거리는 온통 똥 천지가 되어버렸다"라고 그때 들은 뉴스를 회고록에 담았다.

소와 말까지 동원해 이승만에 대한 세상의 뜻을 조작하고자 했던 이 사건은 '우의마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부정하게 뭔가를 조작하는 것을 가리킬 때 이 신조어가 사용됐다. 박정희 정권의 윤치영 민주공화당 의장서리가 3선 개헌 필요성을 거론한 1969년 1월 7일, 이 당의 김재순 대변인은 "자유당 때의 우의마의식 민의 조작에 의한 헌법개정이라면 몰라도" 박 정권하의 개헌 논의가 금기시될 이유가 없다고 발언했다(같은 날짜 <경향신문> 톱기사).

1956년 대선이 끝난 뒤인 7~8월경, 이기택은 경무대 인근인 서울 소격동의 하숙집에 짐을 풀었다. "백련암에서의 휴양 생활로 어느 정도 건강에 자신이 생기자, 나는 바로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상경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양산 백련암에서 전해 들은 그해 대선 정국의 요지경 같은 난맥상은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1957년에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신입생이 된 그는 1960년에 고려대 학생위원장이 되어 4·19혁명에 뛰어들었다. 초등학생들은 물론이고 소와 말까지 동원해 세상 흐름을 왜곡했던 이승만을 끌어내리는 일에 청년 이기택은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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