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04 12:10최종 업데이트 26.06.0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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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야구팬이 되었고, 무엇을 견디며 남았으며, 무엇 때문에 떠났는가. 이 연재는 한국야구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 야구팬들의 역사를 탐구하려는 시도다. 승패의 기록이 아니라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 구단과 선수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을 응원하던 사람들의 감정을 따라간다. 이 연재는 분석이나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우리는"이라는 1인칭 복수의 시점으로, 야구팬들에게 보내는 연대의 편지다.[기자말]
1994년 LG 트윈스의 두 번째 우승2위 태평양 돌핀스와의 정규시즌 승차는 11.5경기에 달했고 한국시리즈 역시 4승 무패의 압승이었다. 창단 5년차에 두 번째 우승을, 완벽한 신구조화를 통해, 압도적으로 달성한 그들은 '한국의 뉴욕 양키스'라 불리곤 했다.연합뉴스

LG 트윈스가 그렇게까지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트윈스는 처음부터 강팀이었고, 점점 더 강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팀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창단 첫해의 우승, 그리고 4년 뒤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우승. 게다가 서울이라는, 가장 크고 또 대한민국을 모두 삼켜버릴 듯 점점 더 커지는 거대도시를 연고로 삼으며 가장 넓고 비옥한 시장이자 선수 공급의 중심을 동시에 쥔 팀. 그 정도 조건이라면 4~5년에 한 번쯤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래서 해태의 패권은 곧 엘지로 넘겨질 거라고 90년대 초 많은 전문가와 팬들이 믿었다. 1994년 우승 축하연에서 다 마시지 못한 술과 롤렉스 시계를 봉인한 일화는 그런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아마도 이듬해, 혹은 길어야 2~3년이면 다시 꺼낼 수 있으리라던 암묵적인 약속.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두 걸음 물러섰다가 반걸음 돌아오고, 다시 한 걸음 내디디려다 또다시 한 걸음 밀려나는 시간이 이어지더니 문득, 팀은 주저앉고 말았다. LG와 트윈스는 처절했던 2002년 한국시리즈를 끝으로 하위권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고 말았고, 비슷한 궤적을 그리던 다른 두 팀과 엮여 '엘롯기'라 불리기 시작했다. 롯데 팬들이 '가을에도 야구하자'고 호소하던 시절, 엘지 팬들도 똑같은 마음으로 '유광잠바 한 번 입어보자'라고 외쳤다.

모기업의 지원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연고지 서울도 늘 서울이었고, 좋은 신인들이 들어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연고지와 홈구장을 공유하는 두산이 대개 더 높은 순번의 신인들을 LG에 뺏기는 불운 속에서도 늘 상위권을 지키며 우승도 하고 홈런왕도 배출했기에, 엘지는 더욱 숨을 곳이 없었다.

90년대 '한국의 양키스', 2000년대의 '엘롯기'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하는 세월이 쌓이면서, 팬들은 웃음과 함께 말을 잃었다. 경기가 끝나는 밤이면, 잠실 야구장에서 종합운동장역 플랫폼 사이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을, 팬들은 말없이 걸었다. 마치 모든 것을 삼킨 채 느릿느릿 흐르는 거대한 진흙강처럼. 어느 해 또다시 허무하게 시즌이 끝나던 날 구단이 올린 사과 광고 속, 트윈스 유니폼을 나누어 입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손을 잡고 쓸쓸히 돌아서던 뒷모습이 바로 그들의 것이었다.

암흑기, LG 트윈스 팬들의 뒷모습2008년 정규시즌이 끝난 다음 날인 11월 7일 여러 일간지에 실린 LG 트윈스의 광고. 팬을 향한 미안함과 감사함을 담고 있다.한겨레PDF

그리고 2023년 11월 13일, 한국시리즈 5차전이 열린 잠실 야구장 내야에 KT 배정대의 타구가 짧게 떠올랐다가 LG 2루수 신민재의 글러브 속으로 사라지던 순간, 잠들어있던 엘지 팬들 각자의 인생 한 대목이 문득 깨어났다. 축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팬들의 입과 눈에서는 환호성과 눈물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30년간 봉인돼 있던 아와모리 소주병이 열렸고, 시리즈 5경기에서 고비마다 홈런 세 개를 날린 15년 차 유격수 오지환이 롤렉스 시계를 손목에 걸었다.

기다림은 끝났고, 서사는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모든 한이 풀리고 모든 원망이 사라져 버리는 듯한 기쁨과 희열.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더욱 짜릿했던 우승의 순간. 그렇다면 트윈스의 팬들은 이제 편안함에 이르렀을까?

우승, 하지만 끝나지 않는 야구

이듬해, 트윈스는 여전히 강했지만 연속우승은 없었다. 40-40에 근접했던 김도영을 앞세운 기아 타이거즈가 맞대결할 때마다 유독 트윈스를 두들겼고, 그 상대 전적만큼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한국시리즈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그 때 트윈스 팬들이 떠올린 것은 1995년이었다. 전 시즌 압도적인 우승의 여세를 몰아 다시 한 번 시즌 내내 선두를 질주했고, 20승 투수 '야생마' 이상훈이 에이스 맞대결 세 판을 모두 압도하며 잠실 라이벌 두산이 자랑하던 에이스 '황금박쥐' 김상진을 17승으로 주저앉혔던 그해. 하지만 결국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한 채 3위에서 멈춘 뒤부터 스물스물 찾아왔던 내리막길의 기억 말이다.

그런 팬들의 불안감과 선수들의 경각심이 다시 한번 일깨웠을까, 그 이듬해 LG는 다시 한 번 왕좌에 복귀했고 '내친김에 LG 왕조 건설'을 외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정말 팬들은 편안하게 야구를 볼 수 있게 됐을까?

지난 3년간 두 번 우승했고, 여전히 순위표의 가장 높은 자리 언저리를 지키는 2026년 LG 트윈스의 팬들은 여전히 괴롭다. 아직 쌀쌀한 밤공기를 버텨내느라 작년 가을에 꺼내놓은 유광잠바를 다시 입는 그들은, 3경기 연속 연장 끝내기 패라는 진기록 앞에서 다시 말을 잃는다. 반 년 전 우승 축포의 기억보다, 30년간 쌓이고 곱씹어진 씁쓸한 기억들이 먼저 깨어나고 오래 뒷맛을 남긴다.

그래서 문득 생각한다. 애초에 우승이란 목적지가 아니라 다음 여정을 위한 아주 짧은 휴게소일 뿐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팬들에게 야구의 본질이란,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순간보다 그 컵을 향해 다시 신발 끈을 묶는 그 지루하고도 숭고한 반복에 있는지도 모른다. 트윈스의 팬들이 사랑한 것도 단지 '승리'라는 결과가 아니라 아무리 넘어져도 내일이면 다시 잠실행 지하철에 몸을 싣는 자기 자신의 고집스러운 낙관이었고, 지하철 앞자리에 때 이른 유광잠바를 입고 나온 낯선 이와 서로 시선을 피하면서도 공유하던 서먹한 연대감이었다.

이제 롤렉스 시계는 주인을 찾았고, 봉인돼 있던 술은 비워졌다. 전설처럼 내려오던 '기다림의 서사'는 완성되었다. 그러나 서사가 완성되었다고 해서 삶이 멈추지 않듯, 야구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이 게임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바라는 것이 완벽한 결말이 아니라 '계속될 수 있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우승의 환희는 짧고, 야구 없는 겨울은 길며, 다시 돌아온 봄의 승부는 가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유광잠바를 꺼내 입는다. 지난 세월이 가르쳐준 것은 승리하는 법이 아니라, 패배하고도 다시 사랑하는 법이었기에.

그렇게 트윈스의 팬들은 오늘도 끝나지 않는 게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제 우승했든, 내일 추락하든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오늘 오후 6시 30분, 사이렌 소리와 함께 다시 시작될 그 지독한 반복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주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야구보다 먼저 사라져갈 것이다.

2025년 LG 트윈스의 4번째 우승2023년에 이어 3년 사이 두 번째 우승을 달성한 LG 트윈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현재 한국야구 최강의 팀이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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