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이소선 어머니(사진 가운데)
전태일재단
민주화 열망을 반영하는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4일이었다. 서울 지역 학생시위에 대응할 목적으로 인천 부평의 특전사 9공수여단이 수도군단에 배속된 다음 날인 이날, 이소선은 닫힌 교문을 사이에 두고 학생 시위대와 경찰 기동대가 대치하는 고려대학교에 대담하게 들어갔다.
다음날 <동아일보>는 "학생들은 4일 밤 10시 6개의 대형 횃불을 앞세우고 스크럼을 짠 채 '계엄 철폐'를 외치며 교내 시위를 한 후 철야 농성에 들어가고 전태일 씨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51)의 강연을 들었다"고 보도했다. 이날 밤 그는 청계피복노조의 결성을 설명하고, 학교 밖 노동 현장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했다.
경기도 포천의 13공수여단이 서울 송파구의 3공수여단 주둔지로 이동한 다음 날인 그달 9일, 이소선은 서울 여의도 노총회관에서 노동현장의 참상을 고발했다. 이날 그는 금속노조원 600여 명과 함께 '노동 3권 보장', '민정 이양', '동일방직 해고 근로자 복직' 등을 외쳤다. 노동과 관련된 구호뿐 아니라 전두환의 거취와 관련된 구호까지 부르짖었던 것이다. 아버지처럼 그의 쟁의도 노동과 정치를 넘나들었다.
이 때문에 이소선은 지명수배자가 됐다. 계엄포고령을 무시하고 연설과 집회 참석을 했다는 이유였다. 그해 10월에 체포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12월에 수도경비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징역 1년을 선고했고, 형이 확정된 엿새 뒤에 형집행면제가 있었다.
그는 형집행면제에 감읍하지 않았다. 청계피복노조를 해산하라는 서울시장의 명령이 다음 달인 1981년 1월 6일에 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달 16일과 18일에는 보란 듯이 노조 사무실 등에서 대책을 논의했다. 이 때문에 재판에 넘겨져 그해 7월 13일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로부터 40년이 흘러 2021년이 됐다. 이소선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경과된 이해 12월 21일, 서울북부지방법원은 1980년 판결에 대한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그를 계엄법 위반자로 규정했지만, 재심 법원은 그를 헌정 수호자로 높이 평가했다.
법원은 "피고인이 대학생 시국 농성과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하고 시위한 것은 시기·목적·대상·수단·결과에 비춰볼 때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검찰의 무죄 구형으로 이 재심은 여기서 확정됐다.
이소선이 1981년 7월에 받은 유죄 판결은 2024년 12월 6일의 재심 판결로 취소됐다. 당시의 계엄법 자체가 위헌·무효이므로 계엄포고령 위반은 죄가 될 수 없다고 서울동부지법은 판결했다.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재심도 이 단계에서 끝났다.
전두환이 불법적으로 장악한 1980년과 1981년의 대한민국은 '이소선은 계엄법 위반자'라는 낙인을 찍었지만, 전두환이 공공의 적이 된 뒤인 2021년과 2024년의 대한민국은 '이소선이 옳았다'라며 법적 평가를 수정했다. 이소선은 아들의 유지에 따라, 아니 그 자신의 DNA에 따라 노동 차별에 맞서고 평등 세상을 추구했다. 재심 법원들은 그가 옳았다며 손을 들어줬다. 그가 쳐댄 '재실'의 종은 이렇게 뒤늦게나마 울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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