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0 사북> 스틸컷
엣나인필름
4월 21일은 강원도 정선의 사북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날이다. 이 날은 4월에 우리가 기억하는 4.3이나 4.16, 또는 4.19와는 달리 아직 많은 사람에게 보편성을 얻은 기념일은 아니다.
어떤 일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되살아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중요한 일인가 아니면 하찮은 일인가?
한 국가가 자기의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3.1운동, 4.19혁명,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처럼 한 때 폄하 되거나 경시 당하던 사건이 중요한 역사로 재평가되고 복권되면 국민의 보편적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된다.
4.3사건처럼 첨예한 논란을 딛고 국민의 공통 기억 속으로 서서히 편입되는 일도 있다.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오랫동안 감추어 있던 여러 진실이 드러나면서 편견이 바로잡히고 가치가 재조명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이 국지적 규모에 그치거나, 그조차 누군가에 의해 왜곡·은폐된 채로 알려진 경우에는 사람들의 보편적 인식으로 자리 잡기 어렵다. 이 경우, 손쉽게 단죄 되거나 의미 없는 일로 치부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기 쉽다. '1980년 사북'의 경우가 그렇다.
'1980년 사북'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가? 삼청교육대와 형제복지원 등 사회적 소외 계층이 연루된 몇몇 사건들처럼, 광부와 부녀자들이 연루된 사북사건은 신군부의 기억 조작이 꽤 잘 먹혀들었던 경우에 해당한다.
기억의 혼돈을 겪고 있는 민주화운동 기록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관련 사료를 수집·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공공기관이 있다. 행정안전부 산하 기타 공공기관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다. 이 기관은 민주화운동 관련 기록을 정리한 오픈아카이브를 2011년부터 단계적으로 구축해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오픈아카이브에는 사북과 관련된 51건의 사진이 등록돼 있다. 그 중 1980년 사북사건 당시에 촬영된 사진은 모두 48건이다. 그런데 이중 20건의 사진 제목에 '사북사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사북사태'는 신군부가 이 사건을 폄하하기 위해 사용한 부정적 용어로서, 다른 곳도 아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다른 때도 아닌 2026년 시점에, 민주화운동으로 등재한 사건의 관련 사진을 설명하는 제목으로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더욱이 그 사진들 중 태반은 "사북사태로 인해 깨진"(등록번호 : 00710243), "사북사태로 인해 엉망이 된"(등록번호 : 00710244), "사북사태로 인해 파손된"(등록번호 : 00710245), "사북사태가 일어나기 전 평화로운 마을"(등록번호 : 00710247) 등과 같은 제목을 달아 놓아서, 광부들이 일으킨 소요 사태 때문에 평온이 깨지고 질서가 망가졌다는 인식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같은 아카이브에서 '광주'로 검색되는 그 어떤 사진에도 이런 식의 표현은 없다. "참혹하게 찌그러진 광주고속버스", "불길과 연기가 솟아오르는 광주 중심가",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광주 문화방송" 등으로 똑같은 파괴의 현장이라도, 그것이 시민들이 일으킨 소요 사태 때문이라는 식의 단정적 서술은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한편, 이 오픈아카이브의 사료 콘텐츠에 게재된 "사북사태의 진실, 동원탄좌시위조사보고서"에는 사북항쟁을 "광부와 그 가족 6000여 명이 어용노조와 열악한 노동 환경에 항거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기술한 다음, 그 아래에 사북사건과 관련 없는 엉뚱한 사진을 올려놓았다.
이 사진은 <경향신문> 1980년 4월 28일 자 사회면에 게재되었던 것인데, 시기만 같았을 뿐 사실은 사북 광부들의 항쟁에 영향을 받아 발생한 인천제철 노동자들의 농성 사진이다(
관련 링크 : 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67). 당시 현대그룹 산하에 있던 인천제철의 사장은 훗날 대통령이 된 이명박이었다.
오픈아카이브의 '민주화운동컬렉션'에는 1980년대 사건 중 하나로 "사북항쟁(사북광산노동자대투쟁)" 항목이 기술되어 있다. 설명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사북항쟁이 발생한 1980년 초는 억압적인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세계적 불황의 여파 등으로 그간 억눌려왔던 노동자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요구가 분출하던 이른바 '민주화의 봄' 시기이다.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일어날 당시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는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으로 3052명의 노동자가 연간 160만 톤의 석탄을 캐내었고 하청탄광에서 2천 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간 70만 톤을 캐내 전국 채탄량의 11%를 차지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민주화운동컬렉션의 "사북항쟁" 부분)
여기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라고 기술된 부분은 사북사건을 일반적인 노동 운동으로 간주하고 서술한 것으로 사실과 맞지 않다. 뒤이어 "전과자들의 조직인 국토개발대라든지 지역청년회 소속의 불량배나 주먹패 출신들로 이루어진 어용노조가 지부장으로 이재기를 선출"했다는 설명도 그 출처나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이어지는 설명 역시 실제 사건의 발생 배경이나 전개 양상과는 거리가 있다.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에 걸쳐 인구 3만의 탄광도시 사북에서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하는 광부와 그 가족 6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발전했다. 노사분규가 일어난 것은 이보다 앞선 4월 16일이었는데, 이때는 시위가 격렬하지 않았다. 광부들은 4월 18일부터 임금인상과 어용노조 지부장의 사퇴를 요구하였으나, 회사 측이 요구를 듣지 않은 채 경찰을 개입 시키자 유혈 사태로 번져나갔다. 광부 측은 경찰이 어용노조와 회사 측을 두둔한다고 판단하였고, 더욱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어용노조 이재기 지부장마저 도망쳐 버리자,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중략) 이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160여 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으며, 사북읍은 4월 24일까지 광부들의 세상, 노동자들만의 도시가 되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민주화운동컬렉션의 "사북항쟁" 부분)
이런 설명을 읽으면 1980년 사북의 광부들은 어용노조에 항의하기 위해 처음부터 대규모 파업과 시위를 시작했고, 점차 과격해져서 진압 경찰을 죽거나 다치게 한 유혈사태로 나아간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서술은, 한 편에서 보면 사북사건이 1980년대 계엄 하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의 효시로 칭송할 만한 것이 되지만, 또 다른 편에서 본다면 어용노조와 대립하던 일단의 광부들이 노조지부장의 부인을 붙잡아 인질극을 벌이다, 경찰까지 죽게 만든 파렴치한 사건으로서 절대로 민주화운동이나 순수한 노동운동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서사에는 두 개의 중요한 맹점이 있다. 그것은 당시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가 언론 통제를 통해 철저히 은폐했던 사건 전후의 진실이 빠져 있는 것이다. 하나는 광부들의 대규모 항쟁을 폭발 시킨 것은, 노조사무실에서 동향을 사찰하던 경찰이 발각되어 달아나면서 광부들을 향해 지프차를 돌진시켜 치명상을 입힌 일이 원인이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노사정 합의로 사흘 만에 사태가 수습된 후에, 5월 초부터 대대적인 보복 연행과 집단 고문 등 가혹한 국가 폭력이 수 백명에 달하는 광부와 부녀자들을 상대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이다.

▲영화 <1980 사북> 스틸컷. 사북사건에서 동료의 허위 자백으로 무기고 파손 혐의를 쓰고 징역형을 받았다가, 2022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고 강윤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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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간 벌어진 사북항쟁의 앞과 뒤에 있었던 결정적 국가폭력 장면을 가려 놓고 설명을 하면, 결국 노동자들 사이의 대립, 즉 노노 갈등의 구도만 남게 된다. 가해 당사자인 국가는 빠진 채 "노동항쟁"이냐 "난동사태"냐 하는 소모적인 논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민주 진보가 잊은 사북 사건
지난해 12월 9일, '1980년 사북사건 국가사과 이행 촉구 결의안'이 발의되었다. 1980년 발생한 '사북사건'과 관련하여 광부와 주민, 노조위원장 가족과 경찰까지 모든 피해자에 대해 국가의 공식 사과와 위로를 촉구하고,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한 피해자 명예회복 조치를 이행하도록 정부에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 결의안은 "현대사의 아픔으로 남아있는 사북사건이 화해와 해원의 정신 아래 해결될 수 있도록 지역사회와 뜻을 모아 마련한 것"으로,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강원 동해 태백 삼척 정선)의 대표 발의로 여·야 73명의 국회의원이 연서에 참여해 초당적으로 발의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시 이철규 의원실에서 낸 보도자료에는 사북사건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사북사건은 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서 광부·주민들이 열악한 작업 환경과 부당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항의하던 과정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예정된 집회가 불허된 가운데 사복 경찰과 광부 사이의 충돌을 계기로 사태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이후 격앙된 광부들이 사북지서 등 주요 건물을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대처하던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인명 피해도 발생하였다. 노·사·정 대표의 11개 항 합의로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계엄사령부가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을 구성해 약 200여 명의 광부·주민 등을 체포·연행했고, 이 과정에서 불법 체포·구금·고문하는 등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인권침해가 발생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사북사건을 기술한 내용에 비해 실제에 훨씬 더 부합하는 서술이다. 보도자료는 이어 "사북·고한 지역 주민들은 사북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점과 "진실화해위원회 또한 2008년 제1기 조사와 2024년 제2기 조사에서 사북사건을 '부당한 공권력행사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하고 정부에 공식 사과와 피해자 명예회복, 기념사업 추진 등을 권고"하였지만 현재까지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는 이행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북사건과 국가사과에 대한 민주화운동 기념단체의 인식이 2008년 시점에서 멈춰있는 것과는 대조된다.
결의안을 발의한 이 의원은 "사북사건은 정치·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비롯된 생존의 문제였으며, 광부와 주민, 노조위원장 가족 뿐 아니라 당시 현장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경찰까지 모두가 피해자로 남겨진 현대사의 깊은 상처"라고 강조했다. 이어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의 공식 사과와 피해자 명예 회복 조치가 이행되지 않은 것은 국가의 책임 회피다"라고 했다.
특히 "피해자 상당수가 고령이거나 이미 별세한 현실을 고려할 때, 국가의 책임 있는 조치가 더는 미뤄져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에서 본 결의안이 발의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절박함을 이해하는 민주 진영의 인사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이런 궁금증에 대해 돌아온 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이 결의안을 공동발의한 총 73명의 의원 명단은 국민의힘 55명, 더불어민주당 16명, 조국혁신당1명, 무소속1명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결의안을 누가 대표 발의 했든, 적어도 사북사건에 대한 국가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 발의에 동참한 의원 숫자는 민주당 쪽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사북사건은, 정부의 국가 폭력 사건의 해결 일정에서 여전히 후순위에 놓여있다. 영화 <1980 사북>을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가 꼭 관람하고, 국정최고책임자로서 국가폭력이 국민의 삶과 공동체를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인식한 바탕 위에서 사북사건에 대한 국가 사과를 이행해 달라고 여러 경로를 통해 부탁했지만, 그 때마다 사건 사고와 외교 일정, 국제 정세를 이유로 사북 이슈는 계속 뒤로 밀렸다.
대통령 부부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깜짝 관람하고, 천만 관객 돌파를 축하하는 특별 메시지를 내는 동안, 1980사북시민상영위원회가 국가사과 이행과 함께 요청한 대통령의 <1980사북> 영화 관람은 성사되지 못했다. 4월이 되어서도 사북은 이슈에 오르지 못했다. 3월 말 90개 시민단체가 공동 공문을 통해 요청했던 <1980 사북> 영화 공동 관람과 국가 사과 이행이 중동 전쟁을 이유로 또다시 무산되었지만, 그러는 사이 대통령 부부는 이미 국가 사과가 이행된 4.3사건 관련 영화를 관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북 사람들은 1980년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웃을 잊었고,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웠다. 민주주의 진영은 1980년 사북에서 희생된 광부를 잊었고, 연단 위에 오른 사람들은 연단 아래에서 침묵하는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시민이 끌어 올린 '늦은 메아리' 운동

▲사북항쟁 제46주년을 1주일 앞둔 14일 오전 사북민주항쟁동지회 주최로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 '사북항쟁 시기 국가폭력에 대한 공식 사과 이행을 촉구하는 사북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이정민
지난해 12월 국회 특별상영회를 계기로 발의된 1980사북시민상영위원회와 '늦은 메아리 운동'은 영화 관람과 국가 사과 이행 촉구 서명이라는 두 축으로 진행되었다.
영화 <1980 사북>은 2025년 11월 23일부터 2026년 4월 19일까지 14개 권역에서 총 78회 상영되었다. 시민들의 자발적 후원을 바탕으로 전국 곳곳에서 꾸준히 상영되며 다큐멘터리 영화의 시민 주도 상영에서 의미 있는 기록을 쌓고 있다.
먼저 영화 관람 면에서 1980사북시민상영위원회가 후원하는 상영회는 수도권과 강원권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확산됐다. 지역별로 보면 강원이 33회로 가장 많았고, 서울 14회, 부산·충청 각 5회, 경기·경상 각 4회 순이었다. 이 밖에도 대구, 대전, 전라, 제주, 광주에서 상영이 이어졌고, 해외에서도 독일 2회, 미국 1회, 프랑스 1회가 열려 시민 상영의 흐름이 해외로도 이어졌다. 초기 확산 국면 이후에도 상영이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는 점에서,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시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지속적 상영 운동의 성격이 드러나고 있다.
늦은 메아리 운동의 또 한 축은 국가 사과 이행 촉구 서명이었다. 현재까지 1853건 집계되었고 중복을 제외한 실질 참여 인원은 약 1832명으로 파악된다. 서명은 단기간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7개월간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11월 26일 하루 226건, 2026년 1월 19일 57건, 3월 30일 52건 등 주요 계기마다 다시 결집하는 흐름을 보였으며, 시민초청상영회와 연결되어 서명이 장기적으로 유지되었다.
아래로부터의 국가 사과 요구... 언제까지 외면할 건가
전국 각지에서 모인 2천 명에 가까운 자발적 연대 서명은, 이 문제가 더 이상 과거의 미해결 사건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시민사회의 분명한 메시지다. 이 힘을 기반으로 지난 3월 31일에는 사북사건에 대한 국가 사과 이행을 촉구하는 90개 시민단체의 연대 성명과 공문이 대통령실과 국무조정실로 발송되었다.
서명자들은 단순한 유감 표명이 아니라, 사북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명확한 사과와 그 이행 조치를 촉구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국가가 이 요구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일이다.하지만 국가폭력에 대한 대통령의 중요한 메시지가 연일 발표되는 상황에서도, 아래로부터 끈질기게 올라오는 사북사건에 대한 국가 사과 이행 요구는 시급한 국정 이슈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수많은 시민들이 한 마음을 모아 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과거사 해결의 이행 모델이 사북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면 이 지루한 기다림을 더 참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더 멋진 결론보다 더 빠른 이정표가 필요하다. 영화 <1980 사북>의 촬영 시점부터 6년이 지난 현재, 영화 속에서 생존했던 사북사건 관련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고 이명득, 고 최돈혁, 고 천만성, 고 강윤호, 고 이완형...
여기에 또 다른 이름을 속절 없이 더해야 하는가? 잊힌 사북의 '오래된 사건'에 대한, 아니 사라진 광산의 '늙은 광부'에 대한 뼈아픈 외면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 있는 오늘은 사북항쟁이 일어난 지 46년이 되는 바로 그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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