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2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오마이뉴스> 인터뷰에 응하며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미관계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남소연
20대 초반의 김대중이 해방 직후에 목격한 가장 강력한 노동단체는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다. 그런데 이 조직은 분단 반대와 친일청산을 외치다가 소멸됐다. 이원보 전 전태일재단 이사의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은 "전평은 격동의 해방정국을 주도한 최대의 대중조직으로 출발해서 미군정과의 정면 대결을 거쳐 1948년 5·8투쟁을 끝으로 사실상 소멸"됐다고 기술한다.
김대중이 서른 살 때인 1954년 당시의 가장 강력한 노동단체는 대한노총(한국노총)이다. 미군정이 전평을 견제할 목적으로 후원한 대한노총은 한국전쟁 중에 자유당의 기간조직이 됐다. 김대중에게 호감을 느낀 노조 활동가들은 이쪽 사람들이다. 회고록에서 김대중은 자신을 도운 쪽이 "자유당의 기간단체"였다고 밝혔다.
그런데 노조의 지지는 그가 고배를 마시는 원인이 됐다. 그는 자유당 기간조직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자유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이 싫어 정치를 시작한 그가 자유당에 들어갈 리는 없었다. 이것이 자유당의 탄압을 불렀다.
자유당은 자당 기간단체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 김대중의 '실용 노선'을 좌시하지 않았다. <행동하는 양심으로>는 "자유당이 자당의 의석 확보를 위해 나에게 관권을 동원하여 탄압"했다고 말한다. 자유당은 김대중에게 매료된 노조원들도 그냥 두지 않았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경찰이 노조위원장 이하 간부들을 모두 잡아갔어요"라고 말한다.
대한노총 지부의 지지를 받은 일은 그가 한민당(한국민주당)의 후신이자 민주당의 전신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의 러브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민국당 후보가 대한노총의 지지를 받는 것은 모양새가 이상했다. 이 때문에 그는 유력한 두 정당과 거리를 둔 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총투표수가 3만 3965표인 목포 선거구에서 김대중은 민주국민당 정중섭(25.64%), 자유당 유정두(17.09%), 무소속 안길호(12.91%), 무소속 홍익선(11.29%) 이어 9.98%(3392표)로 5등을 기록했다. 6등부터 10등까지는 대한노총 신유돈(9.10%), 대한노총 임기봉(7.27%), 무소속 박희정(5.04%), 무소속 이숙노(1.62%), 민주국민당 김현규(0표)였다.
전남 선거구 30곳 중에서 대한노총 간판으로 후보가 출마한 곳은 목포뿐이다. 이곳에서는 노총 후보가 둘이나 나왔다. 여기다가 김대중까지 노총 활동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자유당 지도부가 유정두에게 가리라고 기대했던 표를 김대중과 노총 후보 둘이 잠식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함경남도 출신의 교육자인 민국당 정중섭(1898~1978)이 국회에 진출했다. 정중섭은 1958년 총선에서도 목포에서 당선됐다.
회고록에서 김대중은 "민국당은 공천을 내정해놓고도 나한테 교섭을 했어요"라고 말한다. 그가 민국당 지원을 받았다면 그와 정중섭의 처지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다. 훌륭한 청년 기업가를 만났다며 그를 응원해준 노총 조직원들의 도움이 그에게는 패인으로 작용했다. "(노총은) 결과적으로는 나를 도와주지 못했어요"라고 그는 평했다.
김대중은 국민방위군 청년들의 대규모 희생, 거창 주민들의 학살 피해에 더해 장기집권을 향한 이승만의 폭정을 지켜볼 수 없어 나이 서른에 정치인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대한노총 지부의 지지라는 호재를 만났다가 그것이 악재로 돌변하는 바람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 경험은 김대중이 정치에 대한 의지를 더 불태우게 만드는 촉매제가 됐다. 그는 총선 이듬해인 1955년에 서울로 이사를 갔다. "제대로 정치를 해보겠다고 작심하고 올라왔어요"라고 회고록은 말한다. 자국민에게 총을 들이대는 세력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작심은 그를 결기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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