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녀 도나와 함께1963년 9살 연하의 도나와 약혼식을 치르고 찍은 기념사진이다. 결혼식은 국제결혼을 허용하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올렸다.
재외동포청
대학에서 만난 9살 연하의 도나(Donna)를 만나 1963년 6월 결혼했다. 그때만 해도 국제결혼을 금지하는 주가 많아 국제결혼이 허용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 신고를 마쳤다. 입양아들 폴과 친딸 리사를 두었다.
신호범이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은 브리검영대 하와이캠퍼스 교수로 재직하던 1966년이었다. 신입생 모집을 위해 동양의 여러 나라를 돌다가 들른 것이다. 친가와 외가 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아내도 대동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자 기자 한 명이 다가와 이것저것 물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에 관한 질문에 "웃는 사람이 많다"고 대답했다. 이튿날 신문에는 "거리 소년이 11년 만에 대학교수가 되어 미국인 부인을 데리고 과거의 찡그린 얼굴을 버리고 함박웃음으로 돌아왔다. (중략) 그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보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웃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신호범은 고향 금촌을 찾아 외할머니, 외숙모, 외사촌 동생들을 만난 뒤 서울 영등포에서 아버지, 새어머니, 이복동생들과도 해후했다. 구걸하다가 매 맞고 쫓기던 서울역과 남대문시장의 거지 합숙소도 찾았다. 11년 전 화물선을 타고 한국을 떠났던 부산항을 비롯해 논산, 광주, 목포, 경주 등지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는 워싱턴대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며 워싱턴주 시애틀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한국학과 서두수 교수의 충고를 받고 한국어를 다시 배웠다. 어릴 때 거리에서 익힌 말은 상스러웠기 때문이다. 교환교수로 온 고병익 박사에게서는 한국 고대사와 현대사를 배웠다.
1972년이 되자 서 교수는 한인회 관계자를 하나씩 소개해주었다. 한국어 구사 능력도 충분해졌으니 이제는 동포사회에 봉사할 때가 됐다는 뜻이었다. 이민 오는 사람을 공항에 나가 마중하는 것을 비롯해 아파트 임대, 자녀 입학 수속, 직장 알선 등을 도왔고 가끔은 재판정에 나가 통역을 돕기도 했다. 시애틀한인회장을 두 차례 지냈고 이런저런 동포단체에도 이사와 고문으로 바쁘게 불려 다녔다.
박사과정을 마친 뒤에는 시애틀 근교의 쇼어라인대 교수로 부임했다. 부동산중개업을 겸업하며 돈을 벌어 한국의 부모와 이복동생 5명을 차례로 미국에 초청했다. 주지사 무역고문도 15년 동안 맡아 한국·중국·일본 등과의 교역 증진에 기여했다. 1992년에는 동포들과 함께 장거리 전화회사 TTI도 차렸다.
5개월간 1만 4000가구 일일이 돌며 선거운동
신호범이 정계 진출을 결심한 것은 1992년 2월이었다. 소수민족의 인권을 옹호하는 민주당을 택했다. 이전에도 주의원 출마를 권유받긴 했지만 3년간 한국에서 모르몬교 선교부장을 지냈기 때문에 미룬 것이었다. 두 달 뒤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나 한인타운이 쑥대밭이 됐다. 선거전에서는 악재였으나 동포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라도 꼭 당선돼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만들었다.
그의 지역구는 94%가 백인이고 아시안은 3%에 불과한 공화당 텃밭이었다. 더욱이 상대는 3대째 장의업을 이어오는 터줏대감이자 3선의 중견이었다. 신호범은 5개월간 1만4000가구를 집집마다 돌며 자신의 인생 역정과 포부를 이야기했다. 인종차별이 담긴 험한 말을 들으며 문 앞에서 쫓겨나기 일쑤였고 개에게 물린 적도 여러 번이었으나 그의 사연과 정성에 감복하고 출마 취지와 공약에 공감해 지지를 약속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해 11월 초 치러진 선거에서 워싱턴주 최초의 한인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초중고도 졸업하지 못한 입양아 출신이 22년간의 공화당 아성을 무너뜨리고 기적을 이뤄낸 것이었다. 이전에도 송호윤, 김창준, 재키 영 등 한인의 정계 진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 엘리트 코스를 밟은 후보였고, 캘리포니아주와 하와이주 등 비교적 동양계와 유색인종이 많이 사는 곳에서 당선됐다.
하지만 1994년 연방 하원의원과 1996년 워싱턴주 부지사에 도전했다가 연거푸 낙선했다. 부지사 선거의 표차는 불과 0.4%였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고 한인교회 주선으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다. 강제 이주의 시련을 겪고도 민족정체성을 지키고 성공 신화까지 이뤄낸 고려인 동포들을 보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한인 2세들과 입양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겠다는 각오로 처음 정계에 입문할 때보다 더 열심히 뛴 결과 1998년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내리 4선에 성공했으며 2006년에는 무투표 당선이라는 초유의 기록도 만들어냈다. 상원 부의장과 무역경제발전 분과위원장도 지냈다.
편견 담긴 '오리엔탈' 대신 '아시안'으로 바꿔

▲상원의원 취임 선서신호범 의원(오른쪽)이 1998년 워싱턴주 상원에 처음 등원해 의장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재외동포청
신호범은 당선 그 자체로도 역사를 쓴 것으로 평가될 뿐 아니라 의정 활동을 통해서도 숱한 업적을 남겼다. 1993년 초 하원 등원 직후 6·25 참전용사 기념비 조성을 제안해 미국에서 가장 감동적인 참전 조형물을 세웠다. 한인들이 해마다 6월 25일 전쟁 발발일과 7월 27일 정전 협정일에 참전용사와 유자녀들을 이곳에 초청해 사은 잔치를 벌이고 있다.
불어·스페인어·독어에 한국어·중국어·일본어를 추가하는 이중언어 교육법 개정안을 발의해 1994년부터 중·고교와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기술교육센터 건립도 주도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청소년들이 다시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상원의원이 된 뒤에는 '오리엔탈(Oriental)'로 불리던 동양인의 호칭을 '아시안(Asian)'으로 바꾸는 법안을 제출했다. 오리엔탈이란 단어에는 서구 중심의 시각과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첫해에는 부결됐으나 "동쪽에 사는 사람들로서 코가 납작하고 눈이 생선처럼 조그많다"는 등의 부정적인 대영사전 뜻풀이를 의원들에게 알려주며 설득한 끝에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2003년 미국 연방을 비롯한 50개주에서 통과돼 모든 공문서에서 오리엔탈이란 단어는 아시안으로 대체됐다.
미주 한인 이주 100주년을 맞은 2003년에는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한인 노동자 102명이 입항한 날을 기념해 1월 13일을 '한인의 날'로 지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50개주 가운데서는 처음이었으며 2005년 연방의회가 이날을 '미주 한인의 날'로 제정하는 마중물이 됐다.
신호범은 한인 입양아 지원단체 KIDS(Korean Identity Development Society)를 조직하고 입양아와 동포 2세로 구성된 샛별예술단도 이끌었다. 한국을 다녀올 때마다 입양아 보모 역할을 하는가 하면 수많은 입양아의 멘토 역할을 자처해 미국 한인 입양아의 대부로 불렸다. 한미정치교육장학재단도 설립해 차세대 한인들을 정치 지도자로 키우는 일에 앞장섰다.
이 같은 공로로 KBS 해외동포 특별상, 미주동포후원재단의 자랑스러운 한국인상, 2003년 전미 최고 해외 이민자상, 워싱턴주 최우수 상원의원상, 세계YMCA 공로상 등을 받았고 재외동포재단 '자랑스러운 한민족'으로 뽑혔다. 2009년 명예제주도민으로 선정됐고 2008년 백제문화제 홍보대사, 2011년 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 미주 홍보대사 등도 맡았다.
2014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며, 2021년 4월 12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7월 11일 시애틀 페더럴웨이 코앰TV 공개홀에서는 워싱턴주 범동포사회가 주최하는 추모식이 열리기도 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누구나 꿈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호범은 가장 가혹한 역경을 딛고도 무지개를 잡는 데 성공했고, 개인적 성취에 머물지 않고 꿈을 나눠주는 데 여생을 바쳤다. 지난 12일 그의 5주기를 맞았다.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너무 빨리 그를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미국 입양 한인의 대부’ 신호범거지 소년에서 미국의 대학교수를 거쳐 정계 주요 인사가 된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
시애틀한인회
▲신호범 박사 추모식2021년 7월 11일 미국 시애틀 페더럴웨이 코앰TV 공개홀에서 워싱턴주 범동포사회가 주최하는 추모식이 열렸다. 가운데 한복을 입은 여성이 부인 도나 씨다.
시애틀한인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