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15 14:05최종 업데이트 26.04.1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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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4·19혁명을 손쉽게 성사시킨 것은 여순항쟁(여순사건)에 대한 이승만의 과도한 대응과도 관련이 깊다. 이 대응이 부메랑이 되어 그는 학생들의 집단 공격을 받고 무릎을 꿇었다.

대구 2·28 시위로 점화된 4월혁명 현장에서는 '학도호국단의 노래'(학도호국대의 노래)가 자주 울려 퍼졌다. 1960년 3월 17일 상황을 전하는 19일 자 <동아일보>는 "상오 11시 40분부터 진해고등학교 학생 약 300명은 각각 가방을 손에 든 채 동교 정문 앞으로부터 소방서 앞까지의 약 1키로 사이를 달리면서 데모를 감행하였다"라며 "데모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의 노래를 부르는 한편, '협잡선거 물리치자'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고 하는데"라고 보도했다.

4월 6일의 서울 시위대는 경복궁 광화문 남쪽인 서울시청에서 을지로4가로 동진하다가 거기서 종로4가로 방향을 틀어 북진한 뒤 광화문을 거쳐 시청으로 되돌아갔다. 시민·학생·사회단체·민주당이 참여한 이 연합시위를 보도한 그날 <조선일보>는 "흥분에 격한 당원과 시민 및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학도호국단의 노래를 부르며 부정선거의 규탄을 외쳤던 것"이라고 전했다.

'학도호국단의 노래'는 "태평양 큰물 기슭 대륙 동녁에/ 우뚝 솟은 백두산 민족의 정기/ 화려한 금수강산 이루었으니/ 하늘이 주신 나라 지켜나가세"로 시작한다. 이 노래가 그해 4월의 대한민국에 울려 퍼진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승만 정권이 학도호국단을 만든 것은 그런 시위를 예방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학도호국단의 변화

학도호국단 사열및 시가행진 연합뉴스

학생들을 무조건 단원으로 인정하는 학도호국단의 창설이 가시화된 것은 1948년 연말이다. 그해 12월 5일 자 <경향신문>은 "국가 비상시국 수습대책의 일부로 문교부와 국방부에서는 중등학교 생도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학도호국단을 결성하고저 준비 중"이라고 보도했다.

그해 10월 19일 제주 4·3항쟁을 지지하는 국군 장병과 시민들이 여순항쟁을 일으켜 22일까지 순천을, 27일까지 여수를 관리했다. 이 사건이 위 기사 속의 "국가 비상시국"이다. 그해 9월 15일 개시된 주한미군 철수도 어느 정도는 비상시국 조성에 일조했다.

국군 14연대 장병들과 더불어 여순항쟁에 참여한 시민들 중에는 학생들도 있었다. 항쟁이 진압된 뒤 이런 학생들의 이미지가 악마화됐다. 10월 29일 자 <경향신문>은 과장된 문체를 구사해가며 이런 보도를 했다.

"반란군의 모습을 보면, 군복을 입은 폭도를 비롯하여 일반 좌익게열 민중과 학생들도 석기어 있는데, 특히 눈을 끄으는 것은 홍안의 여학생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죽창 혹은 총을 들고 전투에 참○하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아직 판단력이 미약한 소녀가 선동에 유혹되어 동족상잔의 와중에 끼어 있는 것을 볼 때 이번 민족적인 비극의 슬픔을 더 한층 북돕는 바가 있다."

이승만은 안호상 문교부장관을 앞세워 학도호국단 창설을 추진했다. 학생들의 여순항쟁 참여가 준 사회적 충격과 더불어, 학생들을 군사적·사상적으로 통제하려는 정권의 욕망이 복합돼서 생겨난 결과다.

<역사연구> 2004년 제14호에 실린 연정은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의 논문 '감시에서 동원으로, 동원에서 규율로-1950년대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는 "여순사건을 계기로 팽배해진 학생 통제의 분위기 속에서" 학도호국단이 창설됐다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안호상이 학도호국단을 결성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것은 학교 내에 존재하는 좌익 학생들을 어떻게 제거할 것이며, 혹시 학교 내에 생길지 모를 좌익사상을 근절하기 위하여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반공사상과 군대식 집단훈련을 통해 막아보려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저항을 막고자 학도호국단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4·19 때는 이승만에게 달려드는 조직으로 돌변했다. 학도호국단이라는 마당을 통해 모임을 갖고 군사훈련을 받는 습관을 길러준 것은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수월하게 만들었다.

학도호국단 시스템은 시위 준비에 투입되는 초기 시간과 비용을 절감시켰다. 이로 인해 시위가 신속히 확산된 것은 정권이 시위 진압을 위한 골든타임을 놓치는 데 한몫을 했다. <비교민주주의연구> 2025년 제21집 제2호에 실린 박홍근 고려대 교육대학원 강사의 논문 '3·10 충주 학생시위의 의미: 4월혁명 과정에서 전개된 지역적 항의 실천'은 그 시스템이 학생 시위에 어떻게 활용됐는지를 보여준다.

"2·28의 경우, 대구 시내 중고등학교가 민주당의 선거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강제 등교를 실시하자, 이를 정치적 개입으로 받아들인 대구 시내 고등학교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모임을 가진 후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면서 발생하였다. 3·8의 경우도 학생 시위를 주도한 것은 학도호국단이었다. 민주당 정견 발표가 예정된 3월 8일을 하루 앞둔 3월 7일,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교장 관사로 불려가 학생들을 설득해 민주당 행사 참여를 막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이를 학생들에 대한 심대한 정치적 침해로 받아들였고, 교장과의 면담 직후 3월 8일 시위를 준비했던 것이다."

이승만에게 일격 가한 학도호국단

1960년 4.19 혁명 당시 모습위키미디어 공용

이승만을 지지하고 시위를 방해하는 호국단 간부들도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간부 학생들은 호국단에서 부여받은 리더십을 활용해 학생들을 시위대로 재조직했다. 시위 현장 곳곳에서 학도호국단의 노래가 울려 퍼진 것은 그 때문이다. 위 논문은 학도호국단 시스템이 4·19혁명을 도와준 역설적 현상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한다.

"학도호국단에서 문교부-학교장-학도호국단간부-학생들 순으로 명령이 전달되는 이러한 수직적 형태의 조직 구조는 역설적으로 저항의 조직적 기반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조건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단서를 제공한다. 많은 학생이 동일한 강도의 분노를 공유하지 않더라도, 간부층이 제공하는 지휘·정렬·집결의 메커니즘은 분산된 감정과 위험 부담을 집합행동으로 묶어내는 조정의 토대가 된다. 4월혁명기 3·10을 비롯한 고등학교 시위에서 대다수 학생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학생들의 도덕적 확신만이 아니라 학교 내부에 이미 내장된 동원 구조가 조직적 대응을 가능하게 했음을 보여준다."

이승만 정권은 학도호국단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정권 위주의 국가주의를 확산시켰다. 그런데 상당수의 간부 학생들이 호국단의 국(國)을 '국가'가 아닌 '국민'으로 변용시키자, 이승만 정권은 시위 진압으로 바쁜 그 와중에 호국단 감시와 탄압에 시간을 소비했다. 이 때문에 간부 학생들이 감금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선거를 전후하여 경향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생 데모 사건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전주에서는 이번 마산사건을 계기로 전주 시내 각 남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데모를 하려고 모의하다가 사전에 경찰에 발각되었는가 하면, 학도호국단 간부 및 각 학급 급장을 집에 보내지 않고 교장이나 교원이 보호하고 있다." -1960년 3월 18일 자 <조선일보>

학생들은 평소에 학도호국단을 혐오했다. 그랬던 그들이 4·19 공간에서는 이 괴물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시위를 벌이고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외쳤다. 이승만이 자신들을 통제하고자 만든 시스템을 역이용해 이승만에게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도 학도호국단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다. 학생들의 학도호국단 혐오는 그해 5월 3일 허정 과도내각의 국무회의에서 학도호국단 해체가 의결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이 만든 괴물을 이승만 하야(4.26)에 실컷 이용한 뒤 내다버렸던 것이다.

그 뒤 박정희에 의해 부활하기는 했지만, 4·19 당시의 학생들은 이 괴물을 철저히 이용한 뒤 용도 폐기를 단행했다. 여순항쟁을 틈타 학생들을 지배하고자 했던 이승만의 구상은 그 자신을 쓰러트리는 부메랑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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