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론 아제모을루와 사이먼 존슨은 기술 진보와 생산성 향상이 저절로 모두의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낙관론을 비판한다.
생각의힘
다론 아제모을루와 사이먼 존슨의 <권력과 진보>가 던지는 경고는 그래서 더 무겁다. 두 경제학자는 기술 진보와 생산성 향상이 저절로 모두의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낙관론을 비판한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고,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기술적 진보는 자동으로 분배되지 않았다. 어떤 기술이 어떤 방향으로 사용되고, 그 과실이 누구에게 돌아가며, 변화의 비용을 누가 떠안는가는 결국 권력과 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노동자의 협상력이 약하고 안전망이 빈약할 때 기술혁신은 다수의 삶을 개선하기보다 소수의 이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성장과 혁신이 공동의 번영으로 이어지려면 국가는 그 과실의 분배 구조를 적극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기술 변화가 빠를수록, 시장의 파괴력이 클수록, 국가의 사회정책은 더 강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이 바로 그 시험대에 올라 있다. 정부는 AI와 첨단산업, 생산성 혁신과 산업구조 개편을 강조한다. 하지만 기술 변화가 커질수록 전면에 나와야 하는 것은 복지와 안전망이다. 자동화와 디지털 전환은 일부에게는 기회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해고·전직·소득 감소·경력 단절·노동의 불안정화를 뜻할 수 있다.
이때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실직했을 때 버틸 수 있는 소득 보전 체계, 새로운 일자리로 옮겨갈 수 있는 재교육과 전직 지원, 의료와 돌봄의 공백을 메울 공공 체계, 주거비 부담을 낮출 제도를 함께 내놓는 것이다. 이런 장치 없이 기술 혁신만 앞세우는 정부는 강한 사람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약한 사람에게는 더 빠른 불안을 제공할 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식에서 고용유연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사회안전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문제 인식 자체는 옳다. 하지만 노동시장 유연화가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가지려면, 해고와 전직의 위험이 곧 생존의 위기로 이어지지 않아야 한다. 직장을 잃는 순간 집세와 대출 상환, 교육비와 의료비, 돌봄 부담이 한꺼번에 짓누르는 사회에서 유연화는 개혁이 아니라 공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 아직 적당한 수준의 사회안전망을 갖추지 못했다. 실업급여의 사각지대는 여전히 존재하고, 자영업자와 플랫폼 노동자·프리랜서·단시간 노동자·특수고용 노동자의 상당수는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한다. 중장년층 전직 지원은 약하고, 상병으로 일하지 못할 때 버틸 소득 보장 체계도 충분하지 않다.
국가가 먼저 "일자리를 잃어도 삶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뢰를 증명한 뒤에야 유연화는 사회적 설득력을 갖는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유연화의 필요성은 말하면서도, 그것을 감당할 사회적 기반은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이재명 정부의 가장 큰 정책적 취약점이 있다. 복지국가의 상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고, 복지의 청사진을 주도해야 할 사회수석도 눈에 띄지 않는다.
우선순위서 밀린 복지… 국정 중심으로 끌어올리자

▲이재명 대통령이 19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제1기 출범을 맞이해 청와대에서 열린 노동정책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잠재 위험은 성장의 과실이 사회에 퍼지지 못하고, 불평등이 계층이동의 희망을 무너뜨리며, 노동자와 청년이 국가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데 있다. 복지가 약한 사회에서 성장 정책은 오래가지 못한다. 내수 소비 기반은 취약해지고, 교육 기회는 세습되며, 정치적 분노는 커지고, 개혁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약해진다.
양극화 극복을 말하기 전에 먼저 보여줘야 할 것은 복지가 국정의 맨 앞줄은 아니더라도 맨 뒤에 처져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고용보험 확대, 상병수당 제도화, 돌봄의 국가책임 강화, 청년·무주택층 주거 안정, 중장년 전직 훈련 확충, 플랫폼 노동자와 프리랜서의 사회보험 편입 같은 청사진을 전면에 놓아야 한다.
아울러 금융자산이 거의 없는 계층에게도 장기 저축이나 매칭형 지원 등을 통해 최소한의 자산 형성 기회를 넓혀야 한다. 지금 한국의 격차는 집을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금융자산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과 근로소득만으로 오늘을 버티는 사람 사이에서도 커지고 있다.
정치의 역할은 시장에서 밀려난 사람을 위로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시장이 만들어내는 위험을 공동으로 분담하게 만드는 데 있어야 한다. 기술과 성장의 속도를 자랑하는 정부가 아니라, 그 변화 속에서 밀려나는 사람을 끝까지 붙드는 정부여야 한다. 성장은 자동으로 공동 번영이 되지 않는다. 그 사이를 메우는 것은 결국 제도다.
AI와 산업전환을 말하려면 그보다 먼저 변화의 비용을 누가, 어떻게 나눌 것인지 답해야 한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말하려면 그보다 먼저 안전망을 보여줘야 한다. 불평등을 완화하겠다면 취약계층 지원 몇 가지를 나열하는 데서 멈출 것이 아니라, 소득과 자산, 고용과 주거, 돌봄과 노후를 함께 다루는 구조적 복지 개혁을 제시해야 한다.
결국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복지를 국정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재명 정부의 경제정책은 양극화를 줄이는 정책이 아니라, 양극화를 관리하는 정책에 머물 수 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성장의 약속만이 아니다. 그 성장 속에서 자신이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복지부 장관과 청와대 사회수석이 좀 더 적극적으로 불평등과 사회복지 의제를 이끌어야 한다.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교수
본인
필자 소개 : 우석진은 현재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로 있습니다. 명지대 빅데이터연구소 소장, 한국경제학회 이사, 한국재정학회 이사,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방문교수, 한국조세연구원 전문연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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