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14 06:44최종 업데이트 26.04.1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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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1980 사북, 늦은 메아리'는 박봉남 감독의 영화 <1980 사북> 전국 상영을 계기로 공론화한 사북 사건을 단지 과거사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국가의 대응, 공동체와 시민 사회의 변화 과정을 추적 기록해 국가 폭력의 기억과 치유 과정을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제군은 어느 쪽의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조세희 작가가 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일명 '난쏘공')>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이어 교사가 칠판에 쓴 것은 '뫼비우스의 띠'라는 문구였다. 안과 겉을 구분할 수 없는 휘어진 세상이다. 때로 진실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달리 그리 단순하지 않다.

'1980 사북'의 모든 국면에 등장하는 경찰들

<1980 사북>이라는 한 편의 역사 드라마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에 제일 먼저 경찰들이 눈에 띈다. 이운선, 이덕수, 진문규, 그리고 정한식이다.

정선경찰서 소속 이운선은 사건 초기에 지프차를 타고 돌진하여 광부 원일오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주함으로써 대규모 유혈 사태를 촉발한 인물이다. 2002년 당시 서울경찰청 외사과로 영전해 있던 이운선은, 영화 <먼지, 사북을 묻다>를 제작 중인 이미영 감독과 만난 자리에서 지프차 사건 자체를 부인했다.

애새끼들 술 처먹고 지랄하는 데를 내가 뭐 하러 가겠느나고 응? (…) 그 당시 사진들도 쭉 있지만 돌 같은 거 막 들고 이 새끼들이 찦차를 들이 빠술라고 그랬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돌에 의해서 (원일오의 배에) 떨어진 걸로 그때도 그렇게 파악이 된 걸로 알아 내가. 차에 치인 거 아니야. 결론은 차에 치인 게 아니요. (이운선, 2002년 인터뷰 중)

사실에 더 가깝게 말하자면, '1980 사북'에서 경찰은 광산 노조 활동에 개입하고 사찰했던 사건의 깊은 뿌리이자, 지프차 돌진 공격으로 광부들의 결정적인 분노를 폭발시킨 사건의 촉발자였다.

영화 <1980 사북> 스틸컷엣나인필름

그러나 수천 명으로 불어난 광부들이 사북 일대를 장악하고 공권력과 맞서기 시작하면서, 경찰들은 엄청난 상처를 입은 피해자가 된다.

사북 항쟁 과정에서 경찰 측이 입은 피해는 1980년 4월 21과 22일 이틀에 집중된다. 4월 21일에는 경찰 지프차 돌진 공격 직후 분노가 폭발한 광부들이 사북지서를 파괴했고, 저녁 무렵에는 동원탄좌 객실에 모여 있던 경찰 고위급 간부들이 광부들에게 붙들려 폭행 당했다. 여기서 장성경찰서 소속 총경 홍응수 서장이 전신 타박 및 우측 늑골골절로 12주 중상을 입었고, 이채규 순경은 전신다발성 찰과상으로 6주 중상을 입었다.

4월 22일, 강원도경국장의 지휘 아래 감행된 전격적인 진압 작전 과정에서 경찰 측은 더욱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안경다리 쪽으로 투입되었던 영월경찰서 소속 순경들의 피해가 가장 심했는데, 2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영월경찰서 소속 순경 이덕수는 새벽에 차출 되어 무리한 진압 작전에 동원되었다가, 사북광업소로 통하는 안경다리 위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두개골 파열로 사망했다. 순경 진문규는 이덕수와 함께 안경다리로 진입하던 중 두개골 함몰 골절 중상을 입었다.

사건 당시 정선, 영월, 원주, 장성, 횡성, 홍천, 평창 등 인근 7개 경찰서에서 400여 명의 경찰들이 차출 되어 무리한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총 7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진압 경찰의 5분의 1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경찰들은 사북 사건의 최종 국면에서 다시 가해자로 등장한다. 4월 24일 노사정 합의 직후인 5월 초부터 경찰은 광부 사택을 급습해 수많은 사람을 무차별 연행하고 잔혹한 고문에 가담했다.

정한식은 정선경찰서 유치장에서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수감자들을 희롱했던 경찰로, 광부들과 부녀자들에게 최악의 가해자로 지탄 받았던 인물이다. 당시 26세였던 정한식은 20년이 흐른 후 자신을 찾아 온 이미영 감독의 인터뷰를 거절하며 "말단 순경이었기 때문에 사북 사태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이 경찰들은 사북사건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지만, 각자 자신들이 서 있던 자리에서 피해자, 가해자, 또는 방관자로서 증언하거나 변명하거나 침묵하고 있다. 안과 밖이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가해자로 낙인 찍힌 피해자, '1980 사북'의 광부들

영화 <1980 사북> 스틸컷엣나인필름

<1980 사북>이라는 역사 드라마의 주역은 역시 광부들이다. 그 주요 인물 중에는 이원갑, 이완형, 안재, 강윤호가 있다.

4월 21일과 22일 사이에 경찰들만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광부 22명과 일반인 6명 등 민간인도 부상을 당했고, 그 중 원일오를 비롯한 13명은 중상을 입었다.

사건 당시 동원탄좌 노조지도위원이었던 이원갑은 노조지도부에 맞서 부정선거 무효화와 지부장 직선제를 관철하기 위해 싸우던 인물이다. 그는 소요 사태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가장 먼저 합동수사단으로 끌려갔으며, 1980년 4월 21일 경찰 지프차 돌진 공격 이후 사북에서 일어난 모든 폭력 사태의 원흉으로 낙인 되었다.

그러나 이원갑은 사북항쟁 이전에는 노조 개혁 운동의 최전선에 있었지만, 정작 항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경찰에 연금된 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오히려 사태의 수습과 노사정 합의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인물이다.

이원갑은 5월 초 합수단이 거짓으로 소집한 대책회의에 나갔다가 끌려가서 신체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은 국가폭력 피해자다. 그는 2005년 재심 법정에서 신경과 함께 무죄를 선고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담하지도 않은 노조지부장 부인 감금 폭행 사건 때문에 지부장 가족에게 "꼴도 보기 싫은 주범"으로 가장 큰 원망을 받아 왔다.

이완형은 당시 760갱 광부로서 사북지서장 폭행 선동자로 지목되어 합수부에서 지독한 물고문을 당한 국가폭력의 희생자다. 하지만 이완형은 합수단 보안대 수사관들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고발함으로써 안재 등 사건 관련자들로부터 평생 원망을 듣고 살았다. "이완형 때문에 많이 맞았다"는 안재에게 그는 엉뚱한 사람을 고발한 "나쁜 놈의 새끼"였다.

당시 1050갱 후산부로 일하던 안재는 이완형의 진술이 화근이 되어 합수단에 잡혀갔다. 가혹한 고문을 받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로서 그는 가해 경찰에 대한 원한과 증오를 마음에 담고 살았다.

군인 놈들이 워커를 신고 팍팍 걷어차고 밟아서 누르고. 그놈들이 어느 놈인 줄 알아야지. (중략) 지금까지 정한식이 그놈만 한이 맺혀있는 거야. 그 안에 그 군인들이야 뭐 군인들 떼거리인데 그 많은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다 기억을 해. 정한식이라는 그 자체는 내가 알아 이놈의 새끼. (안재, 2020년 진실의 힘 증언)

그러나 이완형의 고발로 붙잡혔던 안재는 다시 강윤호를 무기고 파괴자로 지목했던 동료 고발자이기도 하다.

강윤호가 당한 국가폭력은 공수부대 출신이었던 그가 느끼기에도 지독했다. "아무리 상관이 지휘한 명령이지만 어느 정도 해야지. 어디 국민을 원수지간도 아닌데 그렇게 두들겨 팰 수 있나"면서 그는 치를 떨었다.

강윤호는 안재를 원망하며 "저 새끼 언제 죽나" 보려고 "일부러 내가 근처에 방을 얻어서 산다"고 했다.

안 두들겨 맞으려고 덮어 씌우고 그리고 풀려나고. 미워요. 지하고 내하고 생판 얼굴도 모르는데 거짓말 해가지고 지는 풀려나고 나는… (강윤호, 2020년 10월 진실의 힘 증언)

무기고 파괴범으로 몰려 유죄 판결을 받았던 강윤호는 2022년 재심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2024년 DMZ영화제에서 <1980사북>이 상영되기 전까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강윤호는 그 후에도 고립된 삶을 살았다. 그는 결국 안재와 화해하지 못했다. 강윤호가 고독사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안재의 부고가 전해졌다.

사북사건에서 광부들이 서 있던 자리와 그들의 말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 있다.

'1980 사북'의 여성들, 약자를 향한 화풀이의 종착점

영화 <사북1980> 스틸컷엣나인필름

<1980 사북>이라는 역사 드라마에서 가장 학대 받는 사람들은 여성이었다. 만만한 약자를 향한 손가락질과 화풀이의 대상은 언제나 여성들을 향했다. 그 중에는 이명득, 김분연, 노금옥, 그리고 노조지부장의 아내 김순이가 있다.

김순이는 사북사건의 피해 여성 중 가장 비극적인 경우 중 하나다. 그의 남편은 동원탄좌 노조지부를 창립한 광산 노동운동의 선구자였지만, 1979년 이래 수많은 사북 광부들에게 어용으로 지탄을 받던 노조지부장 이재기였다.

이재기는 동원탄좌 노조지부장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서 무자격 대의원 선거 등 여러 차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1980년 3월 임금 협상에서 상급 산별 노조의 가이드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서 동원탄좌 사업주와 전격 합의한 일로 공분을 샀다.

그러나 실제로 광부들에게 분풀이를 당한 사람은 이재기 지부장이 아닌 그의 아내였다. 김순이는 노조지부장의 아내라는 이유로, 흥분한 광부와 부녀자들에게 붙잡혀 광업소 광장으로 끌려갔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광업소 게시판 기둥에 묶인 채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성으로서 온갖 모진 학대를 당했다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광부들은 자신들이 겪는 부당한 처우의 책임을 기업주가 아닌 어용 노조지부장에게 더 많이 돌렸고, 그중 일부는 노조지부장에 대한 분노를 그의 아내에게 더 가혹하게 터뜨렸다.

여기서 사북 광부들의 항쟁은 그 명분을 크게 잃었고,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그 지위가 뒤바뀌고 말았다. 동시에 사건에 대한 도의적 책임 소재도 지부장 가족이 아닌 광부들에게 더 크게 짐 지워졌다.

기업주와 어용노조에 억눌릴 대로 억눌렸던 사북 광부들의 분노는 여러 방면으로 표출되었지만, 그중 가장 가혹한 화풀이의 대상은 여성이었다.

경찰들의 울화도 여러 곳을 향했지만, 그 중 가장 잔인한 보복의 대상은 역시 여성이었다. 야만적 린치 사건의 주범을 제대로 붙잡지도 못한 경찰은, 이 사건을 앞세워 자신들의 모든 과오를 덮고 항쟁의 광장에 있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단죄하는 명분으로 이용했다.

진짜 죄 지은 사람들은 나는 여기 있으면 붙들려 가면 죽는다 하고 일도 안 하고 도망가 버렸단 말이야. (중략) 그런 사람은 다 도망가버렸어. 잡아들인다고 하니까 소문 듣고 일 안 하고. 일하다 그만 밤에 도주해버렸다고. 도주하면 어디 가 처박혀 있으니까. (이정근, 2020년 10월 진실의 힘 증언)

이명득은 당시 지장산 사택 부녀회장이었고 김분연은 새마을 사택 부녀회장이었다. 사건 이후 이명득은 사택에 선동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김분연은 그에 더하여 노조지부장 부인 폭행 가담 혐의로 합수단에 각각 연행되었다. 두 사람이 당한 고문은 입에 담기조차 힘든 끔찍한 성고문이었다.

현대사에서 유례가 없는 충격적인 집단고문과 성고문이 사북 부녀자들을 상대로 벌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로 드러났다.

보안대 수사관들과 일부 경찰들은 정선경찰서 임시조사실과 유치장에서 특히 여성들에게 마음껏 분풀이를 하며 성을 유린하고 노리개로 삼았다.

노금옥은 지장산 사택에서 살던 광부 윤원철의 아내로, 역시 노조지부장 아내 폭행 혐의를 받았다. 영화 <1980사북>에 나오는 아들의 목격담에 따르면 그녀는 "워커를 신은 군인들 네 명인가가 깨우지도 않고 목을 콱 짓밟아 가지고" 자다가 붙들려 갔다.

노금옥은 2006년에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들과 나눈 인터뷰 영상에서 이명득, 김분연과 함께 합동수사단 임시조사실의 참혹한 성고문에 대해 증언하였다. 그녀는 계엄 법정에서는 유죄를 선고 받았지만, 2024년 12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그녀가 국가폭력의 피해자라고 진실 규명 결정했다.

그러나 노금옥을 비롯한 많은 사북의 여성 피해자들은 고문 이후에도 남편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그의 아들은 "고문은 엄마가 더 당했는지 몰라도 후유증은 아버지에게 더 심하게 왔다"면서 "아버지 미쳤구나. 진짜 미쳤나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약자들의 손가락질은 나랏님이나 사장님이 아니라 종종 만만한 말단 간부를 향했고, 그 분노가 쏟아져 내려간 밑바닥에는 대부분 여성들이 있었다. 사북사건으로 서로 악연이 되어 있지만, 김순이와 노금옥은 같은 약자이자 피해자로 별로 다르지 않은 운명에 처해 있다.

'1980 사북'의 보안대원들, 베일에 싸인 주연급 인물들

사북사건이라는 역사 드라마의 주연급 배우들이지만 이상하게도 베일에 싸인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1001 보안부대 군인들로서 합수단 수사관으로 파견되어 밀실에서 일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았다.

그들 중 거의 30년이 지나서 알려진 인물들로는 손정수, 박정환, 손영래 등이 있다. 손정수는 1001보안부대 정선지역 주재관이었고, 박정환은 1001보안부대원이면서 합동수사단 수사관으로 일했다. 보안부대장 손영래는 합수단 단장으로서 당시 고문이나 폭행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특히 중사 박정환은 군경의 보복 연행으로 사북사건이 수습될 무렵, 사퇴한 이재기를 대신해 부지부장이던 홍금종에게 노조지부장 직책을 반강제로 떠맡겼다는 인물이다. 이들의 최종 지휘권자는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이었다. 2002년에 이미영 감독은 이재기 지부장 가족 측이 인터뷰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사북사건으로 이득을 본 사람은 아버지 이재기도 아니고 이원갑도 아니고, 오로지 홍금종과 전두환 뿐"이라는 입장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전두환은 사북에서 폭발한 광부들의 항쟁과 광주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항쟁을 더 큰 폭력으로 정리하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개선장군처럼 광주와 사북을 연이어 다녀갔을 뿐, 죽기 전까지 이 두 사건에 대한 아무런 미안함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사북 안경다리영화 <1980 사북> 스틸컷. 국가폭력은 길고도 어두운 터널이며 많은 피해자들은 아직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사북의 안경다리. 엣나인필름

용서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러나 사북사건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던 경찰과 광부들, 광부들과 노조지부장의 가족들이 놀랍게도 서로가 받는 상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진짜 가해자들은 숨어버리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뒤엉킨 약자들의 세상에서 과연 용서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까?

그 시작은 국가폭력 피해자인 사북의 늙은 광부 이원갑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원갑은 지난해 4월 20일 영월시네마에서 열린 영화 <1980사북> 첫 상영회 직후, 당시 진압 작전에 투입됐다가 부상을 입은 진문규 등 영월경찰서 소속 전직 경찰들 앞에서 광부들을 대신하여 사과의 편지를 낭독했다. 함께 영화를 본 진문규 등 전직 경찰들은 "경찰들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광부들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면서 이원갑과 뜨겁게 포옹했다.

이원갑은 경찰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전한 데 이어, 자신을 오랫동안 비난해온 노조지부장의 아내 김순이씨에게도 사과와 위로를 전하는 편지를 썼다.

그날 그 사건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무자비한 경찰 진압 작전에 흥분한 광부와 부녀자들이 지부장의 아내라는 이유로 김순이씨를 광업소 게시판 기둥에 매달아 놓고 폭행과 난행을 저지른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습니다. (중략) 이재기 지부장이 일찍 세상을 뜬 것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김순이씨가 혼자서 자식을 키우느라 참 고생 많이 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우리가 이승에서 다시 만날 지 모르지만 부디 남은 여생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원갑의 편지, DMZ영화제 <1980사북> 상영본 중에서)

노동자의 권익 투쟁으로서 사북항쟁에 대한 입장을 평생토록 굽힌 적이 없었던 황인오 역시 사북항쟁동지회장으로서 문제해결을 위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박봉남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노조지부장의 아들 이종운에 대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정치 경제 특히 이런 것들을 어릴 때부터 거의 일상적으로 하던 친구"였다고 회고하면서. <사북사태진상보고서>에서 이재기 지부장에 관해 일부 사실 확인이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상실감이 참 큽니다. 유년기에… 유소년, 청년, 스무살 가까이 될 때까지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뭐 회복할 길은 없겠지만… 어쨌든 보험금 1700만 원, 그것은 내 과오니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고… (황인오 인터뷰, DMZ영화제 <1980사북> 상영본 중에서)

같은 해 11월 제45주년 사북항쟁 기념식을 맞아 전달된 메시지에서 김민석 총리가 "사북사건의 피해자 분들께서 경찰 측 피해자 및 노조지부장 가족과 진심 어린 화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고 특별히 언급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침묵의 뿌리

'난쏘공'의 조세희 작가는 1985년 카메라를 들고 사북을 찾았다. 그에게 사진이란, "버려두고 돌보지 않는 것, 학대하는 것, 막 두드려버리는 것, 그리고 어쩌다 지난 시절의 불행이 떠올라 몸서리치며 생각도 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다시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매개체였다. 그는 이것을 "재소유 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잊힌 사북을 사람들에게 재소유 시키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우리 시대의 희망이 한 쪽으로 몹시 기울어져 있는 일을 나는 슬퍼한다. 능력 있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똑똑한 사람, 힘 센 사람, 많이 가진 사람, 적당하게 가진 사람들이 협력해 우리 시대의 문제를 바로 짚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좋은 희망이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지금 당장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세희, <침묵의 뿌리>, 열화당. p. 134)

<침묵의 뿌리>라는 이름의 독특한 사진 산문집에서 조세희는 사북을 떠올릴 때 기억해야 할 세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셋은 사북 사건의 주모자였던 이원갑,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이연 회장, 그리고 <사북사태진상보고서>를 쓴 황인오다.

1980년 4월 이후 사북사건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에 가장 깊숙이 휘말렸던 사람들이지만, 이 세 사람 중에서 이런 갈등에 대해서 자신의 잘못이든 그 누구를 대변하든 사과의 말을 공개적으로 전한 사람은 이원갑과 황인오 두 사람 뿐이다.

반면, 동원탄좌 회장 이연은 사북사건의 책임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건 이후 은탑산업훈장을 받고 대한석탄협회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이사 등을 역임한 그는 2003년 4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에필로그

'난쏘공'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이렇게 시작된다. 안과 겉이 구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를 말했던 교사는 학생들의 수학 성적이 나빠진 것에 책임을 져야 할 수많은 관련자들을 열거한 끝에 이렇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을 나 혼자 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누구입니까?
한 학생이 물었다.
누가 선생님께 지웁니까?
그들이다.
교사가 말했다.
다른 학생이 일어섰다.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이다. 누가 이 이상 정확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에게는 죽을 때까지 져야 할 책임이 하나도 없다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모두 그럴듯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의 1980사북 특별페이지(www.jcrc.kr)에도 실립니다.저자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사북항쟁과 국가폭력>(지식공작소, 2021)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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