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북1980> 스틸컷
엣나인필름
<1980 사북>이라는 역사 드라마에서 가장 학대 받는 사람들은 여성이었다. 만만한 약자를 향한 손가락질과 화풀이의 대상은 언제나 여성들을 향했다. 그 중에는 이명득, 김분연, 노금옥, 그리고 노조지부장의 아내 김순이가 있다.
김순이는 사북사건의 피해 여성 중 가장 비극적인 경우 중 하나다. 그의 남편은 동원탄좌 노조지부를 창립한 광산 노동운동의 선구자였지만, 1979년 이래 수많은 사북 광부들에게 어용으로 지탄을 받던 노조지부장 이재기였다.
이재기는 동원탄좌 노조지부장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서 무자격 대의원 선거 등 여러 차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1980년 3월 임금 협상에서 상급 산별 노조의 가이드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서 동원탄좌 사업주와 전격 합의한 일로 공분을 샀다.
그러나 실제로 광부들에게 분풀이를 당한 사람은 이재기 지부장이 아닌 그의 아내였다. 김순이는 노조지부장의 아내라는 이유로, 흥분한 광부와 부녀자들에게 붙잡혀 광업소 광장으로 끌려갔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광업소 게시판 기둥에 묶인 채로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성으로서 온갖 모진 학대를 당했다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광부들은 자신들이 겪는 부당한 처우의 책임을 기업주가 아닌 어용 노조지부장에게 더 많이 돌렸고, 그중 일부는 노조지부장에 대한 분노를 그의 아내에게 더 가혹하게 터뜨렸다.
여기서 사북 광부들의 항쟁은 그 명분을 크게 잃었고,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그 지위가 뒤바뀌고 말았다. 동시에 사건에 대한 도의적 책임 소재도 지부장 가족이 아닌 광부들에게 더 크게 짐 지워졌다.
기업주와 어용노조에 억눌릴 대로 억눌렸던 사북 광부들의 분노는 여러 방면으로 표출되었지만, 그중 가장 가혹한 화풀이의 대상은 여성이었다.
경찰들의 울화도 여러 곳을 향했지만, 그 중 가장 잔인한 보복의 대상은 역시 여성이었다. 야만적 린치 사건의 주범을 제대로 붙잡지도 못한 경찰은, 이 사건을 앞세워 자신들의 모든 과오를 덮고 항쟁의 광장에 있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단죄하는 명분으로 이용했다.
진짜 죄 지은 사람들은 나는 여기 있으면 붙들려 가면 죽는다 하고 일도 안 하고 도망가 버렸단 말이야. (중략) 그런 사람은 다 도망가버렸어. 잡아들인다고 하니까 소문 듣고 일 안 하고. 일하다 그만 밤에 도주해버렸다고. 도주하면 어디 가 처박혀 있으니까. (이정근, 2020년 10월 진실의 힘 증언)
이명득은 당시 지장산 사택 부녀회장이었고 김분연은 새마을 사택 부녀회장이었다. 사건 이후 이명득은 사택에 선동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김분연은 그에 더하여 노조지부장 부인 폭행 가담 혐의로 합수단에 각각 연행되었다. 두 사람이 당한 고문은 입에 담기조차 힘든 끔찍한 성고문이었다.
현대사에서 유례가 없는 충격적인 집단고문과 성고문이 사북 부녀자들을 상대로 벌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로 드러났다.
보안대 수사관들과 일부 경찰들은 정선경찰서 임시조사실과 유치장에서 특히 여성들에게 마음껏 분풀이를 하며 성을 유린하고 노리개로 삼았다.
노금옥은 지장산 사택에서 살던 광부 윤원철의 아내로, 역시 노조지부장 아내 폭행 혐의를 받았다. 영화 <1980사북>에 나오는 아들의 목격담에 따르면 그녀는 "워커를 신은 군인들 네 명인가가 깨우지도 않고 목을 콱 짓밟아 가지고" 자다가 붙들려 갔다.
노금옥은 2006년에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들과 나눈 인터뷰 영상에서 이명득, 김분연과 함께 합동수사단 임시조사실의 참혹한 성고문에 대해 증언하였다. 그녀는 계엄 법정에서는 유죄를 선고 받았지만, 2024년 12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그녀가 국가폭력의 피해자라고 진실 규명 결정했다.
그러나 노금옥을 비롯한 많은 사북의 여성 피해자들은 고문 이후에도 남편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그의 아들은 "고문은 엄마가 더 당했는지 몰라도 후유증은 아버지에게 더 심하게 왔다"면서 "아버지 미쳤구나. 진짜 미쳤나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약자들의 손가락질은 나랏님이나 사장님이 아니라 종종 만만한 말단 간부를 향했고, 그 분노가 쏟아져 내려간 밑바닥에는 대부분 여성들이 있었다. 사북사건으로 서로 악연이 되어 있지만, 김순이와 노금옥은 같은 약자이자 피해자로 별로 다르지 않은 운명에 처해 있다.
'1980 사북'의 보안대원들, 베일에 싸인 주연급 인물들
사북사건이라는 역사 드라마의 주연급 배우들이지만 이상하게도 베일에 싸인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1001 보안부대 군인들로서 합수단 수사관으로 파견되어 밀실에서 일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았다.
그들 중 거의 30년이 지나서 알려진 인물들로는 손정수, 박정환, 손영래 등이 있다. 손정수는 1001보안부대 정선지역 주재관이었고, 박정환은 1001보안부대원이면서 합동수사단 수사관으로 일했다. 보안부대장 손영래는 합수단 단장으로서 당시 고문이나 폭행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특히 중사 박정환은 군경의 보복 연행으로 사북사건이 수습될 무렵, 사퇴한 이재기를 대신해 부지부장이던 홍금종에게 노조지부장 직책을 반강제로 떠맡겼다는 인물이다. 이들의 최종 지휘권자는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이었다. 2002년에 이미영 감독은 이재기 지부장 가족 측이 인터뷰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사북사건으로 이득을 본 사람은 아버지 이재기도 아니고 이원갑도 아니고, 오로지 홍금종과 전두환 뿐"이라는 입장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전두환은 사북에서 폭발한 광부들의 항쟁과 광주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항쟁을 더 큰 폭력으로 정리하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개선장군처럼 광주와 사북을 연이어 다녀갔을 뿐, 죽기 전까지 이 두 사건에 대한 아무런 미안함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사북 안경다리영화 <1980 사북> 스틸컷. 국가폭력은 길고도 어두운 터널이며 많은 피해자들은 아직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사북의 안경다리.
엣나인필름
용서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러나 사북사건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던 경찰과 광부들, 광부들과 노조지부장의 가족들이 놀랍게도 서로가 받는 상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진짜 가해자들은 숨어버리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뒤엉킨 약자들의 세상에서 과연 용서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까?
그 시작은 국가폭력 피해자인 사북의 늙은 광부 이원갑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원갑은 지난해 4월 20일 영월시네마에서 열린 영화 <1980사북> 첫 상영회 직후, 당시 진압 작전에 투입됐다가 부상을 입은 진문규 등 영월경찰서 소속 전직 경찰들 앞에서 광부들을 대신하여 사과의 편지를 낭독했다. 함께 영화를 본 진문규 등 전직 경찰들은 "경찰들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광부들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면서 이원갑과 뜨겁게 포옹했다.
이원갑은 경찰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전한 데 이어, 자신을 오랫동안 비난해온 노조지부장의 아내 김순이씨에게도 사과와 위로를 전하는 편지를 썼다.
그날 그 사건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무자비한 경찰 진압 작전에 흥분한 광부와 부녀자들이 지부장의 아내라는 이유로 김순이씨를 광업소 게시판 기둥에 매달아 놓고 폭행과 난행을 저지른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습니다. (중략) 이재기 지부장이 일찍 세상을 뜬 것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김순이씨가 혼자서 자식을 키우느라 참 고생 많이 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우리가 이승에서 다시 만날 지 모르지만 부디 남은 여생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원갑의 편지, DMZ영화제 <1980사북> 상영본 중에서)
노동자의 권익 투쟁으로서 사북항쟁에 대한 입장을 평생토록 굽힌 적이 없었던 황인오 역시 사북항쟁동지회장으로서 문제해결을 위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박봉남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노조지부장의 아들 이종운에 대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정치 경제 특히 이런 것들을 어릴 때부터 거의 일상적으로 하던 친구"였다고 회고하면서. <사북사태진상보고서>에서 이재기 지부장에 관해 일부 사실 확인이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상실감이 참 큽니다. 유년기에… 유소년, 청년, 스무살 가까이 될 때까지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뭐 회복할 길은 없겠지만… 어쨌든 보험금 1700만 원, 그것은 내 과오니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고… (황인오 인터뷰, DMZ영화제 <1980사북> 상영본 중에서)
같은 해 11월 제45주년 사북항쟁 기념식을 맞아 전달된 메시지에서 김민석 총리가 "사북사건의 피해자 분들께서 경찰 측 피해자 및 노조지부장 가족과 진심 어린 화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고 특별히 언급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침묵의 뿌리
'난쏘공'의 조세희 작가는 1985년 카메라를 들고 사북을 찾았다. 그에게 사진이란, "버려두고 돌보지 않는 것, 학대하는 것, 막 두드려버리는 것, 그리고 어쩌다 지난 시절의 불행이 떠올라 몸서리치며 생각도 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다시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매개체였다. 그는 이것을 "재소유 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잊힌 사북을 사람들에게 재소유 시키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우리 시대의 희망이 한 쪽으로 몹시 기울어져 있는 일을 나는 슬퍼한다. 능력 있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똑똑한 사람, 힘 센 사람, 많이 가진 사람, 적당하게 가진 사람들이 협력해 우리 시대의 문제를 바로 짚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좋은 희망이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지금 당장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세희, <침묵의 뿌리>, 열화당. p. 134)
<침묵의 뿌리>라는 이름의 독특한 사진 산문집에서 조세희는 사북을 떠올릴 때 기억해야 할 세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셋은 사북 사건의 주모자였던 이원갑,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이연 회장, 그리고 <사북사태진상보고서>를 쓴 황인오다.
1980년 4월 이후 사북사건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에 가장 깊숙이 휘말렸던 사람들이지만, 이 세 사람 중에서 이런 갈등에 대해서 자신의 잘못이든 그 누구를 대변하든 사과의 말을 공개적으로 전한 사람은 이원갑과 황인오 두 사람 뿐이다.
반면, 동원탄좌 회장 이연은 사북사건의 책임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건 이후 은탑산업훈장을 받고 대한석탄협회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이사 등을 역임한 그는 2003년 4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에필로그
'난쏘공'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이렇게 시작된다. 안과 겉이 구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를 말했던 교사는 학생들의 수학 성적이 나빠진 것에 책임을 져야 할 수많은 관련자들을 열거한 끝에 이렇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을 나 혼자 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누구입니까?
한 학생이 물었다.
누가 선생님께 지웁니까?
그들이다.
교사가 말했다.
다른 학생이 일어섰다.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이다. 누가 이 이상 정확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에게는 죽을 때까지 져야 할 책임이 하나도 없다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모두 그럴듯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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