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14 12:05최종 업데이트 26.04.1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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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현지시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담 광장에서 가자지구 어린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올리브 나무 심기(Plant an Olive Tree)’라는 단체가 주최한 시위 도중 한 시민이 전시된 어린이 신발을 살펴보고 있다.AFP 연합뉴스

2017년,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전쟁은 무시된 건강 문제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한국전쟁이 멈춘 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비극이 어떻게 다음 세대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지, 그 대물림을 다룬 논문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조기 아동기 경험의 중요성이 한창 강조되던 때였기에, 전쟁의 상흔이 유전되듯 세대를 타고 흐른다는 사실이 보건학적으로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지 열변을 토하듯 써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내 시선은 참으로 순진했다. 내용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전쟁을 바라보는 내 마음속의 거리에 있었다. 북한과의 갈등이 연일 뉴스를 장식하던 와중에도, 나는 실제로 이 땅에서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 그랬기에 당시 내게 전쟁이란 이미 말끔하게 정제된 데이터였고, 박제된 역사였으며, 충분히 먼 곳에서 벌어지는 타인의 고통일 뿐이었다. 나는 안전한 관찰석에 앉아, 타인의 비극을 지적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보건학이나 의학처럼 건강을 다루는 학문이 전쟁에 반응하며 내뱉는 언어는 좀체 변하지 않는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트라우마, 혹은 난민의 정신건강 같은 단어들. 어떤 악의나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이러한 접근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어느새 개인에게 귀속된 질병의 문제로 좁혀버리곤 한다.

전쟁을 질병 뒤에 숨기는 세련된 회피를 넘어

이는 세련된 회피다. 전쟁이라는 압도적인 구조적 폭력을 치료해야 할 질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전쟁의 본질인 집단적 학살과 사회의 총체적 붕괴는 시야에서 어느새 사라진다. 우리는 미사일을 쏘아 올린 이들의 집합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을 묻는 대신, 미사일의 굉음에 잠 못 이루는 이들의 신경전달물질 수치에 더 몰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방법론이 과학적일수록, 전쟁이 인간이 발을 딛고 살아갈 토대 자체를 파괴하고 있다는 근원적인 사실은 오히려 희미해진다.

숫자는 수사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 가자 지구에서는 단 1년 만에 기대수명이 35년이나 줄어들었다(관련 논문 : 2023년 10월부터 2024년 9월까지 가자 지구의 기대수명 손실). 시리아에서는 2005년에서 2015년 사이, 내전의 영향으로 남성의 기대수명이 11년이나 깎여 나갔다(관련 논문 : 전 세계, 지역 및 국가 수준의 기대수명, 전체 사망률, 249개 사인별 사망률(1980–2015): 2015년 세계질병부담연구(GBD 2015)의 체계적 분석).

2023년과 2024년 가자 지구의 출생 시 기대수명 변화. 주황색이 팔레스타인 전체, 붉은색이 가자지구를 뜻한다. 막스플랑크인구학연구소

기대수명은 어린아이와 청년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갈 때 가장 격렬하게 요동친다. 전쟁만큼 아이들을 굶주리게 하고, 젊은이들을 효율적으로 지워버리는 수단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 사실은 노동과 연금을 따지며 부각된 PTSD 차원이 아니라, 한 사회의 미래가 통째로 증발해 버리는 절멸의 이야기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이 비극을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스크롤하며 살아간다. 인스타그램 릴스와 맛집 정보 사이사이에 가자 지구의, 이란의 사망자 숫자가 흐르고, 우리는 그 참상을 목격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오늘 점심 메뉴를 고민한다.

전쟁은 실재하는 참상이 아니라,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된 지 오래다. 건강과 사회를 연결한다는 학문에서조차 전쟁은 사람들이 직면한 중요한 폭력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가난은 그 효과를 제거하고 봐야 하는 맥락적 요인으로 굳어진 채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권력과 건강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연구에는 정치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렇게 비워진 자리를 건강 불평등 연구가 채웠지만, 정작 그 안에서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권력은 사라지고 고학력자와 저학력자의 생활 습관 차이가 남았다. 돈 없고 못 배운 사람들은 비타민도 덜 먹는다는 문제로 수렴해 버린 건강 불평등 연구의 풍경이다.

연구와 학술뿐일까? 타인의 비탄을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비탄으로 느끼는 감각이 거세된 채로 일상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 도리어 이런 자세는 오늘날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일종의 생존 기술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냉소적이라서가 아니다. 비극과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지나치게 열심히 익힌 결과일 뿐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감각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새벽 계엄군이 헬기를 타고 국회에 도착하고 있다.연합뉴스

우리가 굳게 믿어 온 그 '안전한 거리'는 환상에 불과하다. 2024년 12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던 그 서늘한 밤을 기억한다. 만약 군인들이 국회가 아니라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수도권 인구 2500만이 장사정포 사거리 안에 머물고, 핵을 보유한 상대와 대치하는 이 좁고 밀도 높은 땅에서 우리가 마주했을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상황에서 지금 미국이 전쟁을 벌이기라도 했다면?

우리는 아마 그 숫자를 상상하는 일조차 본능적으로 거부해 왔는지도 모른다. 전쟁은 영원히 저 먼 곳의 일이어야만 하고, 또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니까. 그러나 그날 밤 우리가 목격한 것은 그 견고해 보이던 거리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사람들의 건강은 병원이나 약국에 쌓여 있는 박스 안에 있지 않다. 우리의 안온한 삶은 우리가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얇디얇은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토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다.

이토록 위태로운 세상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 아니 그 이전에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여전히 확신하기 어렵다. 다만 타인의 비탄을 고민하는 일이 사치스럽거나 우스워 보이는 이 시대에, 위선이라는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면서라도 비탄을 비탄으로 느끼는 감각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쳐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안전한 관람석에서 세계의 비극을 구경하는 관객이 되는 대신, 동료 시민으로서 그 고통의 무게를 내 어깨로 가늠해 보는 것. 나와 비극 사이의 거리를 한 뼘이라도 좁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어쩌면 그 마음의 분투야말로, 무엇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보건'일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Health Socialist Club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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