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0 사북> 스틸컷.
엣나인필름
사북의 학생들이 자기 지역의 역사를 다룬 영화 <1980 사북>을 함께 관람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이런 좋은 분위기 속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학생들과 더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더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홍보 활동을 학생들과 함께 하려고 했다. 교내 협의 과정에서 교장 선생님께서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에 맞게 사북 사건에 관한 국가 차원의 사과와 피해자 명예 회복을 부탁하는 편지를 대통령께 보내는 게 어떤가' 하는 아이디어를 주셨다. 또한 영화의 등장 인물들에게도 편지를 보내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학생들이 직접 지역 이슈를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통해 시민과 국가의 역할을 고민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을 학생들이 이해하고, 오해와 미움을 넘어 화해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 하니 여러 고민이 들었다. 과연 학생들이 두 시간 넘는 다큐멘터리를 끝까지 볼 수 있을까? 영화에 나오는 참혹한 고문 증언을 보고 충격 받지는 않을까? 혹시라도 학생 중에 피해자 가족이 있다면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을까? 대통령께 편지를 쓰는 활동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편향된 정치적 활동으로 보이지 않을까? 나는 활동의 목적을 다시 생각했다.
단순히 사북 사건의 내용을 알리고 당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의 행태를 비난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 오히려 이 활동은, 지역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통해서, 통제 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고통 받는지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편지를 쓰고, 사건 해결을 위해 국가가 관심을 가져 달라고 편지를 쓰는 일은, 지역 학생들이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현장 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전체 학생들에게 활동의 취지와 영화의 개요를 안내했다. 특히 사북사건 피해자 가족인 학생들에게는 사전에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또한 정치적 논쟁의 여지가 있는 내용은 학생 스스로 판단하도록 했다.
"안녕, 할아버지?"
지난해 12월 초 지역의 작은 영화관에서 학생들과 함께 <1980사북>을 봤다. 6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갈등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자료를 수집하면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된 과정에 학생들은 관심이 많았다. 학생들은 사건과 직접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고문 받고 삶이 망가진 이야기를 듣고 상당히 안타까워했다.
영화를 보고 돌아와서 학생들은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진지하게 편지를 썼다. 그 중에는 사북항쟁 피해자의 손자가 쓴 편지도 있었다.
안녕 할아버지, ○○이야. 몇 년 전에 할아버지가 인터뷰한 거 영화로 나온다고 했었잖아. (...) 사북이라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왜 모르지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는 많은 지역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네. 기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 영화를 보니까 할아버지가 설명해 줬던 내용보다 훨씬 더 많더라고. 우리 할아버지는 정말 힘든 삶을 살아왔구나, 할아버지에게 더 잘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어. 나는 할아버지가 부끄럽지 않고 정말 자랑스러워. - 사북고등학교 1학년 안○○의 편지 중에서
심한 고문을 겪고도 굴하지 않고 삶을 꾸려온 할아버지에 대한 손자의 자랑스러움이 느껴졌다. 아이가 마음을 다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오히려 의연한 태도를 보여준 것이 기특했다. 영화를 본 학생들 중에는 사건 당시 부녀회장 등 여성 피해자들이 겪은 참혹한 고문에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학생들이 특히 많았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고문의 증언이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어르신들께서 얘기하실 때 제 마음도 아파졌습니다. 저는 옛날에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18년째 사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 이제까지 사북의 역사, 어르신들의 역사를 잘 몰라서 죄송합니다. 늦게 알게 된 만큼 더 좋은 사회를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사북고등학교 2학년, 장○○의 편지 중에서
평소 학교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던 학생들이, 길고 긴 편지를 진지하게 써내려가는 모습이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았다. 요즘 학생들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꺼린다고 생각했는데, 대부분의 편지에 자기의 솔직한 감정이 담겨 있어서 교사로서 반성했다.
영화 등장인물에게 편지를 쓴 학생 중에 강윤호씨를 선택한 학생이 의외로 많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며 가족과도 이별하는 아픈 현실을 혼자서 버텨내야 했던 강윤호씨가 결국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울먹이는 장면이 학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 같다. 아마 학생들이 사북사건의 억울한 피해자들이 얻어내기를 바라는 희망이 실현된 것에 안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억울하게 잡혀서 혐의를 받았지만 2022년에 재심으로 무죄판결을 받게 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감사와 위로밖에 없지만 이렇게라도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많이 생각하고 사북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To. 강윤호님, 사북고등학교 2학년 정○○의 편지 중에서
저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서 제 고향의 과거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견뎌냈기에 결국 죄를 벗어날 수 있었던 할아버지가 정말 멋있습니다. (...) 저도 이 사건에 큰 관심을 가지고 모두가 억울하지 않게 될 때까지 응원하겠습니다. - 강윤호님께, 사북고등학교 1학년 김○○의 편지 중에서
1980년 사북에서 가장 논란이 된 사건에 휘말렸던 김순이씨에게 편지를 쓴 학생들도 있었다. 김순이씨는 노조지부장의 아내로 당시 흥분한 일부 광부와 부녀자들에게 붙잡혀 공개적으로 심한 학대와 고초를 당하신 분이다. 영화 <1980사북>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에 등장한 사북사건의 관련 인물들은 사실 모두가 피해자다. 학생들은 정확히 그 점에 공감하고 김순이씨와 그 가족에게도 편지를 썼다.
영화를 감상한 뒤 사건의 전말을 더욱 자세히 알았고 부당한 폭력에 노출된 것이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광부 측과 대화를 통해 서로 간 오해를 해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건 이후 힘든 삶을 사신 후손 분들께,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단정 지어 생각한 점을 사죄 드립니다. 또한 위로의 말씀을 올립니다. - 김순이님 후손 분들께, 사북고등학교 2학년 전○○의 편지 중에서
영화를 보고 모두가 피해자이고 억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제가 여러분의 아픔을 완전히 공감할 순 없지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사실은 압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 사북항쟁은 국가와 동원탄좌가 잘못한 사건입니다. 너무 서로를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 국가에게 사과 받아야 합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을 기억하고 피해자 분들을 아는 것입니다. - 김순이씨와 그 가족 분들께, 사북고등학교 2학년 강○○의 편지 중에서
당시 노조가 광부들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해 어용으로 지탄 받은 일과는 무관하게, 김순이씨와 그 가족들이 오랫동안 이 일로 고통을 받은 점에 대해서 학생들이 공감하고 위로하고자 노력한 것은 앞으로 어떤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의미를 평가할 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을 보여준다.
"안녕하세요, 대통령님"

▲학생들이 쓴 편지.
필자 제공
"우리가 대통령님한테 편지를 보내도 되나요?"
"진짜 편지 보내면 대통령님이 읽어보시나요?"
학생들은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전에 긴장을 많이 했다. "글씨를 잘 못쓰는데 괜찮나요?" 어떤 학생들은 마치 대통령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라도 하는 듯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 때 어떤 학생이 "현재의 대통령이 이 사건에서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재명 대통령님이 사과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사실 현재의 대통령이 46년 전 사북에서 공권력이 불법적으로 벌인 일과 그로 인한 피해에 대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심지어 부친이 태백의 탄광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알려진 이재명 대통령은, 사북의 아이들처럼 광부들의 자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대통령은 잘못이 없지만, 국가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폭력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명예 회복을 현재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께 부탁하는 것이다. 다만, 학생들 스스로 판단하기에 대통령이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국가 사과 등을 언급하지 않고 본인이 생각한 대로 편지를 쓰면 된다."
이것이 나의 대답이었다. 충분한 답이 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사북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이상하게도 오히려 사북 사람들이 사북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꺼린다고 느꼈다. 학생들과 지역사 수업 활동으로 사북 사건에 대해 조부모님이나 부모님과 인터뷰를 해 오는 활동을 했을 때 학생들이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대부분 답변을 거절하거나 얼버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모와 조부모가 광부였는데도 사북 사건에 대하여 일체 들어본 적이 없다거나, 심지어 본인이 광부였던 사실도 밝히지 않는 경우도 보았다. 아마 당시의 고문과 강압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고, 또한 이 사건과 관련자들의 명예회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외할아버지가 사북에서 광부로 일했다는 한 여학생이 용기를 내어 대통령에게 정갈한 글씨로 편지를 썼다.
저는 억울하게 형을 집행 받아 고문을 받고 청춘의 시절을 보내신 광부님들과 여성분들이 이제라도 마음이 편해지셨으면 하는 마음에 대통령님께 편지를 적게 되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먼저 한 발 나아가 주셔서 그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신다면 그분들께서도 상대방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이 사건의 문제들이 하나하나씩 해결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멋지고 의미 있는 일을 대한민국에서 큰 영향을 끼치시는 대통령님께서 먼저 실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존경하는 대통령님께, 사북고등학교 1학년 박○○의 편지 중에서
대부분 지역 토박이들인 사북 학생들과 달리 중학교 때 큰 도시에서 전학을 온 전학생이면서도 누구보다 사북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준 경우도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한 장면도 빠짐없이 모두 충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지만 이제 와서 알게 된 남의 이야기였던 상황이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니 마음이 정말 아픕니다. 저는 이 편지를 대통령님께 쓰면서, 사북 주민들의 간절한 마음과 아직 풀지 못한 상황들을 해결해 주고 목소리를 높여줄 사람에게 기대는 것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 To. 대통령님께, 사북고등학교 2학년 이○○의 편지 중에서
"아직 풀지 못한 상황을 해결해 주고 목소리를 높여 줄 사람에게 기대는 것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이 학생의 표현은, 아무 힘 없이 늙어 가고 있는 사북사건의 피해자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하다.
자신의 삶조차 버겁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내고 행동했다는 점에서 그분들의 용기와 연대가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지켜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동시에 오늘날의 사회에도 여전히 갈등과 문제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 저 또한 학생으로, 그리고 미래의 시민으로 사회의 아픔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데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안녕하세요 대통령님, 사북고등학교 1학년 정○○의 편지 중에서
이 학생은 대통령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화를 보고 자기가 반성하고 느끼고 다짐한 것을 대통령에게 약속하는 편지를 썼다. "저 같은 청소년들이 역사 교육과 영화를 통해 사회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는 대목에서는 지도교사로서 감동을 받았고, 역사 교사로서 보람을 느꼈다. 영화를 같이 보고 편지를 쓰자고 했던 교사의 마음을 학생들이 이해해 준 것 같아 고마웠다.
응답을 기다리며
대통령께 보내는 편지는 지난 1월 청와대로 발송하였다. 학생들처럼 나조차도 '과연 이 편지가 대통령에게 전해질까?'라는 의문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2월 어느 날 청와대 국민경청비서관실에서 연락이 왔다. 편지를 잘 받아보았고 이미 관련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는 회신이었다. 학생들이 쓴 편지가 잘 전달되었고 긍정적인 내용이 담긴 회신을 받았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전할 수 있어서 교사로서 매우 기뻤다.
학교에서 한 활동이 국정의 최고 책임자에게 전달되었고 회신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학생들은 자기들이 했던 사회적 활동에 큰 효능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의 작은 실천 행동이 사회적으로 어떤 반향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느끼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교육적인 의의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 관련 인물들에게 학생들이 쓴 편지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 황인욱 소장께 전달되었다. 이원갑, 강윤호, 김순이씨 등 다양한 사건 관련 인물에게 학생들이 전하려 했던 메시지 역시 당사자들과 사북항쟁동지회 측에 잘 전달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편지들은 앞으로 사북사건에 대한 중요한 기록물로 남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서 부족한 교사를 도와 역사적인 기록 작업에 참여해 준 사북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사북사건의 피해자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소식이 너무 늦지 않게 들려오기를 희망하며, 사북사건으로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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