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대표(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올림픽대회가 있었던 1988년에 노태우 대통령이 노심초사한 문제는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뿐만이 아니다. '노심'이 집중된 또 다른 사안은 '정권의 성공적 사수'였다.
전년도의 6월항쟁에 이어 그해 4·26 총선으로 노 정권은 초장부터 위기에 빠졌다. 총선 패배로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에 직면한 노 정권은 민주화운동·노동운동·통일운동에 더해 '5공 청산 운동'에도 부딪혔다. 제5공화국(1981.3.3.~1988.2.24.) 청산의 일환으로 전두환·이순자와 일가족의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 요구는 5공에 뿌리를 둔 노태우의 정치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는 1987년 대선 때 '중간평가'를 공약했다. 올림픽 뒤에 재신임받겠다는 공약이었다. 그러나 그가 중간평가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점은 임기 2년 차인 1989년 상반기에 명확해졌다. 그해 3월 21일에는 공약이 사실상 취소되고, 6월 8일에는 공식 취소됐다.
노 정권은 민주화·노동운동·통일운동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5공의 부조리도 제대로 청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간평가가 이뤄진다면 불신임을 받거나 리더십이 와해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노 정권이 중간평가보다는 정면 돌파를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징후 중 하나가 '인노회 사건'이다.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를 탄압 대상으로 골라낸 이 사건은 노 정권이 국민을 억누르는 방법으로 돌파구를 모색했음을 보여준다.
1989년 2월 11일 자 <한겨레>는 "치안본부는 10일 인천·부천 지역 민주노동자회(인노회) 소속 손형민 씨 등 노동자 5명을 지난 8일 검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 중이라고 발표"했다며 "경찰은 '이들이 대학 운동권 출신 노동자들로 지난해 6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을 이념으로 하는 반합법 지하조직인 인노회를 결성, 지금까지 위장폐업 분쇄대회 등 각종 노동운동을 주도해왔다'고 발표"했다는 뉴스를 전했다.
이틀 뒤 <경향신문>은 인노회가 전두환·이순자 구속 촉구대회를 주도한 것도 경찰이 움직이게 된 이유였음을 보여준다. 노 정권이 경계하는 각종 정치운동에 두루 관여했다는 점이 정권의 강경 대응을 부른 요소였다.
인노회에 대한 구속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사무국장 손형민과 고남석·김동호·신정길·이동진·이성우에 이어 강병권·김민삼·박종근·송명진·유봉인·이광석·정규옥·조성옥·최동·한기성 등도 구속됐다. 6월에는 동국대 제적생인 32세의 회장 안재환도 붙들렸다.
공개 단체를 불법 지하조직으로 몰아세운 뒤 대규모 검거 작전
국가보안법이 적용된 이 사안이 조작 사건이라는 점은 위의 보도들에도 묻어 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치안본부(경찰청)는 인노회를 "반합법 지하조직"으로 규정했고, <경향신문>에 따르면 "불법 지하조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들은 지하가 아닌 '지상'을 무대로 했다. 인천·부천 지역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공개 단체였다.
행정안전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22년에 펴낸 <전국 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조사 (3차)>는 "노동자의 인권과 생존권 확보를 목적으로 조직된 선진 노동자의 정치적 대중조직"으로 인노회를 규정한 뒤 "전위적 성격의 조직이 아니라 공개 조직이었다"고 알려준다.
이 보고서에 제시된 인노회의 '목적' 중 하나는 "모든 노동자단체와 단결하며 각계각층의 민주단체와 협력"하는 것이다. '사업 내용' 중 하나는 "공부와 토론, 이에 필요한 교육자료의 발간 및 정기·부정기 교육강좌의 실시", "홍보물의 간행 및 대중집회 개최",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인천민족민주연합·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 가입해 활동하는 것"이었다. 지하조직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전두환·이순자 구속 촉구대회를 주도한 데서도 확인되듯이 이들은 대중집회를 활동 방식 중 하나로 골랐다. 이런 단체를 불법 지하조직으로 몰아세운 뒤 대규모 검거 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식이었다.
1988년 2월에 출범한 노 정권은 처음 한동안은 전두환 정권과 달리 이적단체 규정의 적용을 꺼렸다. 6월항쟁의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그랬던 노 정권이 출범 1년 만에 꺼내 든 것이 이적단체 규정이다. 인노회가 그 시범 케이스였다. 1989년 2월 17일 자 <한겨레> 기사 제목은 '6공 들어 이적단체 첫 적용'이다.

▲1989년 2월 17일 자 <한겨레> 기사 "6공 들어 '이적단체' 첫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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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정권의 공안정국은 1990년 12월 27일의 노재봉 총리서리 임명을 계기로 본격화됐다. 그로부터 1년 반 전에 인노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한 것은 이 시기에 노 정권이 공안정국을 향해 시동을 걸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노회가 이적단체로 규정되는 과정에서 한 판사의 저항이 있었다. 1989년 2월 11일 서울형사지방법원 백영엽 판사가 손형민을 비롯한 인노회 회원 6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전부 다 기각해 버린 일이 그것이다.
이틀 뒤 <경향신문>에 따르면, 백영엽 판사는 "손씨 등이 조직·구성한 노동자회가 노동운동을 주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단체라고 보기 어려우며, 이들이 제작·소지한 유인물 등도 노동운동을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라며 기각했다.
대법원은 인노회가 이적단체 아니라고 판시
노 정권은 이에 승복하지 않고 구속영장을 재청구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구속영장이 발부됐기에 '6공 들어 이적단체 첫 적용'이라는 위 기사가 나오게 됐다. 노 정권이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 규정을 앞세워 공안정국에 시동을 걸 수 있게 만든 사법부의 협력을 그달 17일 자 <동아일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울형사지법 조희대 판사는 16일 국가보안법 위반(이적단체 구성 등) 혐의로 서울지검 공안부가 구속영장을 재청구한 인천·부천 지역 민주노동자회 소속 대학 출신 노동자 6명 중 손형민 씨 등 5명에 대해 영장을 발부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빛의 혁명' 뒤에 대선 정국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6월항쟁 뒤에는 이처럼 공안정국에 시동을 걸어주는 형사지방법원 판사였다.
관련자들이 징역형이나 집행유예부 징역형을 받게 만든 이 사건은 인노회 구성원인 최동이 석방 뒤에 분신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성균관대 국문과 제적생인 그는 1990년 8월 7일 한양대학교에서 스스로 분신함으로써 노 정권의 폭거에 끝까지 저항했다.
인노회 사건은 2022년을 떠들썩하게 만든 행정안전부 경찰국 설치 문제와도 연결된다. 전국 경찰관들의 반발을 뒤로하며 초대 경찰국장이 된 김순호도 인노회 조직원이었다. 인노회 구속 열풍이 몰아칠 때 종적을 감췄던 그의 이후 행적에 관해 위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보고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최동의 후배로 인노회 부천구역장을 지낸 김순호는 잠적했다가 대공 경찰로 변신해 프락치 활동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샀다. (중략) 김순호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서 익힌 학습능력을 바탕으로 능력을 발휘해 용공조작 사건에서 맹활약했고, 승승장구하며(89.8 경장, 92.2 경사, 95.5 경위, 2002.2 경정, 2011. 12 총경 승진 등) 치안감까지 승진해 경찰청 보안수사국장이 됐다."
노태우 정권은 공개 단체인 인노회를 불법 지하조직 겸 이적단체로 몰아세우고 탄압을 가하며 공안정국에 시동을 걸었다. 이때 노 정권이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는 점은 백영엽 판사의 구속영장 기각결정과 똑같은 판결들이 나오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2020년과 2025년에 대법원은 각각의 피해자들이 청구한 재심 재판에 대한 판결을 통해 인노회가 이적단체가 아니라고 판시했다. 2025년 8월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최동에 대한 형사보상금 지급 결정을 확정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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