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센코 <황소> 1929 / 장 카수 <샤갈> 책표지(1965)
퍼블릭 도메인
당시 소련에도 이중섭처럼 소 그림으로 곤욕을 치른 블라디미르 리센코라는 화가가 있었다. 20세기 초반에 활동했는데, 대표작 <황소>는 전통적 사실주의 기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방법으로 그렸다. 우즈베키스탄의 누쿠스 미술관에 소련 시절 공개되지 않던 3만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황소>가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그림을 보면 온통 파란색을 띤 황소가 미친 듯이 관람객을 노려본다. 관람자를 향해 사납게 돌진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황소의 눈은 마치 총구멍처럼 검게 뚫려 있다. 꼬리 쪽으로 붉은 태양처럼 보이는 동그라미가 솟아 있다. 붉은색 도형은 사회주의 소련을 상징한다.
당시 공산당 간부들이 미술관에 걸려 있는 리센코의 <황소>를 보자마자, 반소련적이라고 선언하고 철거를 명령했다. 그들은 "황소는 파란색일 수 없다"라며 화가를 미친 사람 취급했고, 6년 동안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했다. 스탈린이 강조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의하면 사실성에 기초해야 하는데, 파란색으로 그린 소는 이에 반하기 때문이었다.
반소련적이라는 인상을 준 데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회주의 소련을 상징하는 붉은 원을 꼬리 쪽에 작게 그린 점이 일단 간부들의 신경을 긁었으리라. 게다가 미친 분위기를 풍기는 소를 그려놓았으니 당시 스탈린의 광풍에 가까운 정책을 비판하는 의미로 여겨졌을 듯하다.
이 그림을 그린 1929년은 광풍이 정점으로 치달았다.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이 1924년에 사망한 후 스탈린은 권력 장악을 위해 정치·경제·문화 등 전 영역에서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 작업을 벌였다. 특히 1928년부터는 시장경제를 부분 수용한 레닌의 정책을 폐지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는 공산주의 정책을 폭력적으로 강제했다.
농민들은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으로 강제 편입되었다. 반발하는 농민들은 광범위하게 체포·구금·사살되었다. 소가 농민을 대변하는 이미지임을 고려할 때, 스탈린주의 억압에 저항하는 농민 감정을 대변한다. 리센코가 생애 대부분을 농업 중심지였던 우즈베키스탄에서 보냈기에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추측이다. 또한 전위적 미술의 선구자 말레비치의 제자였으니 예술적 자유를 억압하는 스탈린 체제에 대한 반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중섭이나 리센코처럼 소가 예술가의 저항 감정의 의미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마음 깊이 아련하게 자리 잡은 자기 뿌리를 반영하기도 한다. 몇 차례 대형 전시회로 한국인에게 친숙한 화가 마르크 샤갈의 다양한 소 그림이 그러하다.
샤갈은 "시적인 상상력과 색채의 마술사"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미술사학자이자 시인 장 카수가 선구적인 저작인 <샤갈>에서 규정한 내용이다. 그런데 시적인 상상력이라고 하니, 경험에 기초한 내면과 무관해 보이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강연에서 한 청중이 "당신은 문득 떠오른 꿈을 그리는가?"라고 질문하자, 샤갈은 "나를 몽상가라 부르지 마라, 나는 현실주의자다"라고 했다.
현실에서 유리된 꿈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서 오는 감정을 담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프랑스의 비평가인 장 카수는 "초현실주의가 아닌 '현실주의자' 샤갈"이라고 보완한다. 샤갈 그림에서 사람들이 공중에 떠 있고, 동물들이 악기를 연주하기에 초현실주의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막연한 꿈이 아니라 자신의 뿌리와 기억을 재창조하는 현실주의자로 재평가한 것이다.
그가 시적인 상상력이라고 한 의미는 샤갈의 현실주의가 당면한 현실이 아니라 기억 속의 현실이라는 점에 있다. 그래서 샤갈의 현실주의를 "기억의 현실주의"라고 했다. 기억의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여러 소 그림 가운데 카수의 <샤갈> 책 표지 그림으로 실린, 샤갈의 <나와 마을>에 그의 내면적 정서가 가장 잘 나타난다.
캔버스가 왼쪽의 소와 오른쪽의 샤갈로 양분되어 있다. 그 사이에 그가 태어나고 20세까지 살았던 농촌 생활이 담겨 있다. 벨라루스 시골 마을 리오즈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샤갈은 <나와 마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리에 와 있는 나에게는 고향마을이 암소의 얼굴이 되어 떠오른다. 사람이 그리운 듯한 암소의 눈과 나의 눈이 뚫어지게 마주 보고, 눈동자와 눈동자를 잇는 가느다란 선이 종이로 만든 장난감 전화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소와 샤갈이 서로의 눈을 응시한다. 둘 다 입을 살짝 벌리고 있다. 회화에서는 대화를 의미한다. 둥근 도형이 둘을 감싸고 있는 모습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기 마음속의 뿌리인 고향 마을의 삶과 정서를 소를 통해 드러낸다. 연결과 공감의 의미를 넘어 소가 곧 자신이다.
샤갈이 소를 벗이면서 자신으로 묘사하는 데는 고향에서 접한 소박한 농촌 분위기가 깔려 있다. 농촌의 삶과 정서가 다시금 그를 강렬하게 사로잡은 데는 유럽의 한복판에서 겪은, 산업화로 출현한 대량 생산·소비 체제와 합리성에 근거한 문명사회에 대한 짙은 회의감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동물 배려가 곧 인간 배려

▲이중섭 <황소> 1953년
퍼블릭 도메인
이중섭의 <황소>는 아예 초상화처럼 우리를 꿰뚫듯 바라보는 소의 머리로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마치 그의 자화상의 의미를 담아 그린 듯하다. 이중섭과 샤갈의 소 그림을 접하고, 인간과 동물 관계를 생각하면 '실천윤리'를 대표하는 현대철학자 피터 싱어가 <동물해방>에서 제시한 다음의 문제의식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만약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낀다면, 그와 같은 고통을 고려하지 않으려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 동물이 느끼는 고통이 인간이 느끼는 동일한 양의 고통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 인간에 대한 배려와 동물에 대한 배려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어떤 존재가 평등한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는지를 가늠하는 핵심 특징이 '고통을 느끼는 능력의 유무'에 있다. 인종차별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도 같은 근거에서 나온다. 피부색이 어떠하든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인정되지 않는다. 인종이나 지능과 무관하게 다른 존재의 고통과 동등하게 취급받아야 한다. 누구든 고통을 회피하거나 줄일 권리가 있다. 동물에게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현대사회는 동물의 고통을 줄이기는커녕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치달아왔다.
들판에서 대량 사육되는 소들은 그나마 처지가 나은 편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미국 농장의 소는 광활한 방목 초원을 거닐었다.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소가 공장식 시설에서 사육되고 있다.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소를 사육하는 시설을 갖추었다. 걷거나 자유롭게 몸을 펼치지 못하며, 가족이나 무리의 일부가 될 수도 없다. 우리에 갇혀 사료를 먹기만 하는, 철저하게 지루한 삶이 강요된다.
고급 클럽·호텔·식당에서 최고 수익을 보장하는 송아지의 사육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최상급 고기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육질과 연한 색깔을 유지해야 한다. 들에서 마음껏 뛰어놀면 근육이 발달해 고기가 질기다. 풀을 먹으면 연한 색깔을 잃는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생산업자는 여러 개의 칸막이가 늘어선 감금 장치에 가두고 사료를 먹인다.
도축 과정도 참담하다. 미국의 TV 뉴스에서 캘리포니아 도축장 영상이 공개돼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체력이 약해져 걷지 못하는 소를 발로 차고, 전기 충격을 주고, 막대기로 눈을 찌르고, 지게차로 밀어 도축장으로 옮긴다. 망치가 급소에서 벗어나 바로 죽지 않으면,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물의 머리를 여러 차례 가격한다.
피터 싱어가 보기에 동물 고통의 무시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대량 생산과 소비를 위한 공장식 사육과 도축은 인정될 수 없는 야만적 행위다.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개인을 차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부도덕한 행위다. 그렇다고 해서 동물을 존중하고 공존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배려와 동물에 대한 배려가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축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공존을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공장식 사육과 도축을 중단하는 일이다. 움직이기도 어려운 비좁은 공간에서 사육하는 시설과 장치를 금지해야 한다. 목초지에서 거닐며 풀을 뜯어 먹을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현대인은 피터 싱어의 주장을 불편하게 여기기 십상이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고통스러운 사육과 도축으로 죽은 동물임을 알기 전에 고기 맛에 익숙해져 있다. 오랜 교육과정을 통해 인간이 이 세상의 중심이고 모든 면에서 우선한다는 사고방식에도 익숙하다. 가축을 비롯한 동물이 인간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진정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려는 사람이라면 가축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인간에 대한 배려와 동물에 대한 배려의 양립이라는 과제를 곱씹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음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길러지고 죽는지는 알아야 한다. 친구는 아니라 해도, 우리와 같은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사육·도축 시스템을 개선하고 과도한 육식을 경계하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을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