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10대 추경안 세부사업 (단위: 백만원)
이상민 정리
그런데 이번 추경은 이 순서가 정반대다. 가장 큰 재정수단은 가격 인하와 가격 보전에 들어가고, 취약계층 보호가 그다음이며, 수요 대책과 에너지 전환은 가장 뒤로 밀려 있다. 숫자를 보면 더 분명하다. 정유사 지원을 위한 예비비 5조 원이 이번 추경의 최대 사업이다. 여기에 유류세 인하 등에 따른 조세지출 4.7조 원 등까지 더하면, 정부가 에너지 가격 인하를 위해 동원한 재정수단은 10조 원에 이른다. 취약계층 보호로 고유가 피해지원금 4.8조 원이 그 뒤를 잇는다.
반면, 에너지 수요 대책과 신재생에너지 관련 사업의 예산은 상대적으로 적다. 신재생에너지금융지원 2205억 원, 무공해차 보급사업 900억 원, 대중교통비 환급 877억 원, 신재생에너지 보급 지원 624억 원, AI기반 분산전력망 산업 육성 588억 원 수준에 그친다. 정부 스스로 온실가스 감축 효과를 인정하는 '온실가스감축인지 예산 및 기금'의 전체 증액 규모도 5633억 원에 불과하다. 고유가 대응의 우선순위가 에너지 수요 전환이 아니라 가격 억제로 짜여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단기적으로는 이해될 수 있어도, 중장기적으로는 잘못된 신호를 준다는 점이다. 본래 가격 상승은 에너지 소비 감소와 효율 개선, 대체에너지로의 전환을 유도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그런데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에너지 가격 하락을 우선 보조하면, 에너지 다소비 구조를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
더욱이 가격 인하 위주의 정책은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주체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가게 된다. 반면 에너지 효율 개선, 대중교통 지원, 무공해차 보급, 신재생에너지 확대는 다음 고유가 위기가 닥쳤을 때 국가 경제가 덜 흔들리는 구조를 만드는 투자다. 따라서 이번 추경의 핵심 쟁점은 단순히 신재생에너지 관련 사업 예산이 조금 늘었는지 여부가 아니다. 그 점에서 이번 추경은 고유가 대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제 우선순위는 거꾸로 된 추경이다.
예산은 숫자로 증명하는 '정책'... 추경을 다시 읽어야 한다
이번 추경의 문제는 개별 사업 몇 개가 아니다. 추경을 편성하고 국민에게 설명하는 방식 전체의 문제다. 실제보다 부풀려진 추경 규모, 본예산 세수추계 실패를 감춘 "국채 없는 추경"이라는 포장, 예산안 없이 홍보자료로 설명되는 정보 비대칭, 그리고 에너지 전환보다 가격 인하에 더 많은 재정을 배분한 거꾸로 된 우선순위까지, 모든 문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정부는 이번 추경을 위기 대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기에 대응하는 정부일수록, 더 많은 돈을 쓰는 정부일수록, 더 많은 정보를 공개하고 더 정확하고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결국 이번 추경 논쟁의 핵심은 단순한 예산의 크기가 아니라 원칙과 기준이고, 금액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정책의 순서이고, 재원의 출처가 아니라 정부의 소통 방식이다.
예산은 말로 설명하는 정책이 아니라 숫자로 증명하는 정책이다. 예산서에 적힌 숫자가 곧 정부의 우선순위이고, 그 숫자의 흐름이 곧 정부의 진짜 정책이다. 국회와 국민도 정부의 설명이 아니라 실제 예산의 흐름을 기준으로 이번 추경을 다시 읽어야 한다. 그래야 추경이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국민 앞에 검증 가능한 재정정책이 된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본인
필자 소개 :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정부 예산서를 분석하는 타이핑 노동자이며 <소셜 코리아> 편집위원입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예산서, 결산서, 집행 내역을 매일 업데이트하고 분석하는 일을 합니다. 재정 관련 정책이 법제화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덕업일치 타이핑 노동자입니다. 주요 저서로 <경제뉴스가 그렇게 어렵습니까>가 있고 공저로 <한국의 신복지체제의 재정전략>, <지방의정백과>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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