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07 16:21최종 업데이트 26.04.0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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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하고 있다.국가기록원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나 동독의 슈타지 같은 비밀경찰이 한국 현대사에도 있었다. 이 비밀경찰은 1960년 4월에 폭로됐다. 그달 29일 자 <경향신문>은 서울시경찰국 간부의 제보를 근거로 "3·15 정·부통령 선거 당시 이(이강학) 전 치안국장이 비밀경찰까지 만들어 일반 경찰관에게 심한 위협을 준 사실이 알려졌다"라며 3월 28일 경질된 이강학 전 내무부 치안국장(경찰청장)의 선거 개입 실태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선거에 대한 부정 비밀지시를 각 경찰서에 보내고 그 지시가 야당계 인사, 일반인에게 새어나가는 것을 막는 방법과 양심적인 경찰, 친야당계 경찰관으로 보이는 각급 경찰관의 동향을 감시시키기 위하여" 이강학이 비밀경찰들을 시경과 일선 경찰서에 배치했다고 전했다.

3·15 부정선거의 핵심 인력은 경찰들이었다. 이 경찰들이 상부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지 않는지를 감시하고자 만든 것이 비밀경찰이다. 이들을 지칭하는 암호가 있었다. 그해 5월 5일 자 <동아일보>는 "105호. 4·26 이전의 한국 비밀경찰의 암호"라고 보도했다. 이승만 하야 성명 이전까지 105호라는 비밀경찰이 활동했던 것이다.

오늘날 집권당은 선거 승리를 위해 당 조직을 가동하지만, 이승만 때는 경찰 조직을 더 많이 활용했다. 이처럼 경찰이 선거운동원을 겸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3·15부정선거 1년 전인 1959년 3월 20일에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임명되고 7일 뒤 이강학 치안국장이 임명된 것은 사실상 선거대책본부의 재편이었다. 최인규-이강학 조합이 운영한 것이 105호 비밀경찰이다.

1919년생인 최인규는 뉴욕대 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대한교역공사 이사장, 국제연합한국재건단(운크라) 주미한국대표 등을 역임했다. 그런 뒤 1958년에 자유당 공천으로 경기도 광주군에서 민의원(국회의원)이 됐다.

1924년생인 이강학은 상급자인 최인규와 대학 전공이 비슷했다. 이강학은 니혼대학 경제학과 출신이다. 그런데 미국 유학파인 상급자와 달리 그는 미·일 유학파였다.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이어 캘리포니아대 경찰행정과를 졸업했다. 그런 뒤 치안국 경무과장과 서울시경국장 등을 역임했다. 경제를 공부한 해외 유학파들이 다른 분야도 아니고 비밀경찰을 맡게 됐던 것이다.

105호와 108호

최인규와 이강학이 주도한 105호는 전국 경찰들을 감독하고 시찰할 목적으로 지방 지부를 갖췄다. 장덕환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한국의 4월혁명>은 선거개입 독찰을 위한 조직 구조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 독찰반은 24명 간부 경찰관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서울시와 각도에는 또 다른 지방 독찰반이 있었다. 치안국 6개 과장(경무·보안·수사·특정·경비·통신)과 20여 명의 각급 계장(총경) 그리고 30여 명의 반장(경감급)으로 구성된 선거 독찰반은 서울시와 각 도마다 각각 담당 구역이 있어서 이강학의 명령만 떨어지면 즉각 자기 구역으로 전달하고, 또한 최인규가 내린 비밀지령이 제대로 이해되고 있는지 여부를 독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105호의 멤버가 되면 신분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해졌다.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선거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위 책의 설명이다.

"105호는 자기가 맡은 구역 내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 85%를 만들어내야만 했고, 만일 개표 결과 이 약정된 득표에 미달일 때는 이미 제출되어 있는 사표를 수리하게 되어 있었다."

1960년 3월 15일에 투표가 끝날 때까지 85%가 나오지 않아도 비밀경찰들이 살길은 있었다. 1975년 2월 12일 자 <동아일보> '비화 제1공화국 (479): 3·15부정선거'는 "만일 계획이 어긋나면 투표가 끝난 뒤 투표함 운반 도중 환표를"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알려준다. 개표가 시작되기 전에라도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보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개표가 다 끝나도록 85%가 나오지 않아도 살아날 길은 있었다. 우격다짐을 써서라도 '85%가 나왔다'고 공식 선언을 해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선관위와 야당을 다 제압하고 이렇게 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 단계에서 이마저 못하면 경찰을 떠나야 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은 무효표 122만 8896표를 제외한 유효표 963만 3376표 전부를 획득했다. 이렇게 보면 그의 득표율은 100%다. 하지만 무효표를 포함한 총투표수가 1086만 2272표인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 득표율은 88.7%다. 한편, 이기붕은 79.2%를 득표했다. 부통령 후보 득표율만 놓고 보면 비밀경찰들의 성적은 낙제점이었다.

최인기 내무부 장관은 이승만 득표율 100% 혹은 88.7%와 이기붕 득표율 79.2%를 근거로 자신과 이강덕이 운영한 비밀경찰 105호의 성적을 평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강덕의 경우에는 성적을 매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는 108호의 성적도 평가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 108호에 관해 위의 1960년 <동아일보>는 이렇게 설명한다.

"108호. 이는 105호 비밀경찰을 감시하는 '비밀의 비밀경찰' 암호이다."

이승만 정권 무너진 뒤 법의 응징받아

3.15 부정선거 책임자인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 혁명재판 광경 국가기록원

105호 비밀경찰이 비밀지령을 제대로 이행하는지를 감시하는 것이 108호 비밀경찰이었다. "비밀의 비밀경찰"의 존재는 최인기도 몰랐다. 이는 이강학 치안국장이 별도로 운영하는 것이었다. 경찰청장이 내무부 장관의 뒤통수를 쳤던 것이다.

위의 <한국의 4월혁명>은 "자기 상사인 최인규 장관이나 이성우 차관도 모르게 자신의 지령에만 움직이는" 조직을 이강학이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이강학이 내무부 장관을 패싱시키면서 108호 조직에 착수한 것은 위 <동아일보>에 따르면 1959년 6월이다. <한국의 4월혁명>은 108호의 조직 체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비밀기구는 이강학 자신을 두목으로 하고 그의 직접 명령을 받는 부두목에 총경 1명, 부두목 밑에 경감 4명을 두고 경감 한 사람 밑에 경위가 각각 2명씩, 그리고 경위 아래에 경사 20여 명, 경사 아래에 순경 30여 명, 총 60여 명 내지 백 명 내외로 구성되어 있었다."

딴 주머니를 차고 별도 조직을 꾸린 이강학이 얼마나 야심차게 108호를 운영했는지는 그의 비밀지령에서 확인된다. 그는 자신이 만든 108호의 지휘계통마저 무시한 채,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108호 비밀경찰들이 상급자를 건너뛰고 자신의 명령을 직접 받도록 지시했다. <한국의 4월혁명>에 정리된 비밀지령의 일부다.

"사무적인 명령계통 외에는 나의 명령에 따른다."
"나의 육성 외에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말라."
"105호를 철저히 감시하라."
"모든 선거관계자(신문기자도 포함)들을 감시하여 조그만 사안이라도 수시로 보고하라."
"자유당 당무위원, 국무위원, 선거위원 등의 동태를 파악하는 동시에, 직위 여하를 막론하고 비밀지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즉각 보고하여 조처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라."

국무위원들을 감시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이는 최인기 내무부 장관도 감시하라는 명령이었다. 3·15부정선거 당시의 정부조직법에 의하면, 내무부 장관은 부통령·외무부 장관에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 3순위였다. 이강학은 '거침없는 경찰청장'이었다.

비밀경찰을 통해 선거에 개입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 최인규와 이강학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법의 응징을 받았다. 그런데 이때도 이강학은 최인기보다 '한 수 위'였다. 비밀경찰을 한 개만 운영한 최인기는 1961년 12월에 사형을 당한 데 비해, 두 개나 운영한 이강학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풀려났다.

"25일 법무부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3·15부정선거 관련자로 서울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전 치안국장 이강학과 전 시경국장 유충렬이 지난 20일경 가석방되었다." - 1964년 5월 25일 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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