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의 1심 재판에서 간첩 혐의를 무죄로 선고했던 유병진 판사(1914-1966)
대법원
희대의 판사가 1950년대에 있었다. 조봉암에게 일부 무죄를 선고하는 희대의 판결 때문에 빨갱이로 몰린 유병진(류병진, 1914~1966) 판사가 바로 그다.
법원도서관이 발행한 <법원사자료 기획전 자료집 제5권: 사법독립의 중심, 법관 임용의 역사를 돌아보다>는 유병진이 조봉암에게 사형이 아닌 징역 5년을 선고한 일을 언급하면서 "이 판결로 그는 '공산 판사'로 불렸고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하였다"고 말한다.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유병진이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무죄로 처리하고 국가보안법 위반만 유죄로 인정한 날은 1958년 7월 2일이다. 이 시점은 1954년의 3선 개헌(사사오입 개헌)과 1956년의 3선 성공으로 이승만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이런 시기에 유병진은 이승만이 주시하는 사건에서 '일부 무죄'와 '징역 5년'을 선고했다. 1990년 6월 14일 자 <경향신문> '제1공화국 국무회의' 제6회에 따르면, 1심 선고 이틀 뒤 이승만은 국무회의장에서 "이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이 없는지 모르겠다"며 분노했다. 유병진이 얼마나 대단한 판결을 내렸는지를 알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에 함경남도 함주에서 출생한 유병진은 열아홉 살 때인 1933년에 조선총독부 함경남도 관리가 됐다. 1948년 9월 시행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조는 일왕에 의해 임명된 "칙임관 이상의 관리", "관공리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유병진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관리가 된 지 얼마 뒤 그는 일본군으로 징발됐다. 그런 다음인 1939년에 메이지대학 법과에 들어가고 4년 뒤 졸업했다. <동아법학> 2010년 제46호에 실린 허일태 동아대 교수의 논문 '유병진 판사와 그의 법사상'은 "메이지대학 재학 당시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였던지, 잠이 오면 자신의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 잠을 쫓아가면서 공부할 정도의 지독한 공부벌레"였다고 알려준다.
법학을 공부하는 과정은 그처럼 고통스러웠지만, 법관이 되는 과정은 상당히 수월했다. 그가 졸업한 지 얼마 안 돼 한국의 법관들이 일본으로 대거 달아났기 때문이다. 위 논문은 8·15 해방 직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일본인 현직 판·검사 각각 140여 명이 그들 조국으로 급거 귀국하게 되었다"라며 "조선에서 사법실무를 처리해야 할 판검사 요원이 각각 155명 정도임에도 일본인들의 귀국으로 절대다수가 부족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법조인의 관문이 갑자기 넓어진 상황에서 1946년 4월에 32세의 유병진은 사법요원양성소 입소시험에 합격하고 그해 7월에 사법관시보가 됐다. 정식 판사가 된 것은 정부수립 이듬해인 1949년이다. 오늘날의 인천 지역을 관할하는 서울지방법원 옹진지원 판사로 출퇴근하게 됐다.
기대가능성론 앞세워 소신 판결
그가 훌륭한 법조인의 자질을 증명한 것은 한국전쟁 중의 서울 수복(1950.9.28.) 이후다. 이승만 정권이 역점을 둔 부역자 재판은 그가 어떤 판사인지를 드러냈다.
전쟁 발발 당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보다 국내 반대파를 더 우려했다. 그가 부역자 처벌이라는 명목으로 반대파를 처벌하기 위해 대통령긴급명령 제1호를 발포한 날은 전쟁이 터진 1950년 6월 25일이다.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라는 이름이 붙은 긴급명령 제1호는 "적에게 정보 제공 또는 안내한 행위"(제4조 제4호), "적에게 무기·식량·유류·연료 기타의 물품을 제공하여 적을 자진 방조한 행위"(제4조 제5호) 등을 처벌하는 부역자 처벌령이었다. 이런 법령을 신속히 만들어둔 데서 확인되듯이 부역자 처벌에 대한 이승만의 열의는 상당했다. 여기에 비협조적으로 대응한 판사가 유병진이다.
유병진은 부역자 재판 첫날에는 정부 방침에 눌려 피고인 일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제2회 재판에서 14세 소년 피고인을 만난 뒤부터 정부의 입장보다 내면의 양심을 우선시했다. 북한 점령하의 파출소에서 심부름을 하고 사람들의 집을 알려준 행위가 '고의적인 우파인사 살해방조'로 과장돼 재판정에 선 소년에게 유병진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가 무죄의 근거로 내세운 기대가능성론은 지금은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생소했다. 그는 연령 및 교육 수준을 볼 때 그 소년이 자신의 행위가 위법한지를 변별할 수 있었겠는지, 설령 위법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해도 북한군 치하의 불가항력 상황에서 그 소년이 대한민국 법을 준수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지를 따졌다.
이 이론에 따르면, 행위가 설령 위법하더라도 준법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존재했다면 무죄를 선고할 수 있게 된다. 유병진은 무고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이처럼 생소한 이론까지 도입했다. 위의 <동아법학> 논문은 그 뒤 그가 이 이론을 앞세워 소신 판결을 계속 내렸다고 알려준다.
부역자처벌령 제11조는 "본령의 규정한 죄에 관한 판결에 있어서는 증거 설명을 생략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해당 증거가 어떻게 유죄를 입증하는지를 검사가 법정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검사가 그런 설명을 할 필요가 없으므로 판사 역시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위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병진은 그 악법 뒤에 숨지 않았다. 위 논문은 그가 "시간과 상황이 허락하면 증거조사, 더 나아가 현장조사를 병행"했다고 알려준다.
유병진은 자기뿐 아니라 다른 판사들도 소신껏 재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애썼다. 부역자처벌령의 문제점을 공개 비판한 일이 그것이다. 위의 법원도서관 간행물은 "법령의 모순과 위헌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확실히 살아남기 위한 정도를 넘어 적의 앞잡이로서 주민을 살상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과감히 용서하고 뉘우치게 해야 한다. 그 길만이 진실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길'이라고 하였다"라며 유병진의 행위를 높이 평가한다.
법관 연임이 거부된 사법사상 초유의 사태

▲1991년 1월 4일 자 <한겨레> 기사 "발굴 한국현대사인물 53 유병진 - 조봉암에 '사실상 무죄' 선고한 법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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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소신 판결들은 휴전 이후에도 나왔다. 그중 하나가 '서울대생 류근일 필화 사건'이다. 류근일이 교내 학술지에 쓴 글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됐다는 이유로 열린 재판에서 유병진은 피고인의 손을 들어줬다.
1958년 4월 4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유병진은 피고인이 평화통일을 주장한 것이 북한의 평화통일론에 동조한 것이라고 볼 수 없고, 피고인이 참여한 신진회라는 단체는 사회민주주의를 연구하는 모임에 불과하며 사회민주주의는 경제 측면의 민주주의를 강조한 것일 뿐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런 소신 판사가 진보당 조봉암 사건을 맡았다. 정치적 압박이 덜했다면 징역 5년마저도 선고하지 않았겠지만, 이승만 독재가 절정에 달한 시기에 사형이 아닌 5년을 선고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위험을 맞닥트릴 수밖에 없었다. 1991년 1월 4일 자 <한겨레>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53: 유병진'은 "진보당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이 내려진 지 3일 만인 1958년 7월 5일 오전 11시 30분께, 서울시청 앞에 집결한 정체불명의 청년 2백여 명은 '용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는 플래카드와 함께 구호를 외치며 서소문 법원 청사로 몰려들었다"고 설명한다. 이 청년들은 이기붕의 후원을 받는 정치깡패 이정재의 조직원들이었다.
1958년에 유병진은 '신기록' 하나를 세우는 희대의 판사가 됐다. <동아법학> 논문은 "1958년 12월 10일 법관 연임이 거부된 사법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고 말한다. 그 뒤 그는 8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5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병진은 완벽한 법관은 아니었다. 부역자 재판 첫날에는 정권의 방침에 맞서지 못했다. 그가 사법부의 일원으로 이승만의 국가운영에 기여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무고한 부역 혐의자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 조봉암 재판 등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폭정에 맞섰다. 이런 인물이 있었기에 한국 사법부는 완전히 썩지 않고 최소한의 양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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