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입 당시의 천리포수목원 터마을 주민의 부탁을 받고 1962년 민병갈이 매입한 천리포 땅.
천리포수목원
1970년 봄 공사를 시작했다. 본부, 쉼터, 창고로 쓸 집들은 무악재 도로 확장 공사로 헐린 한옥들의 폐자재를 실어와 지었다. 그해 6월 21일 본부 격인 해송집 상량식이 열렸다. 천리포 수목원은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1971년 4월 10일, 김이만의 지도에 따라 서울 홍릉 임업시험장에서 실어 온 묘목들을 심었다. 바로 앞 무인도 닭섬(낭새섬) 등 주변 땅도 더 사들였다.
민병갈은 금요일 오후만 되면 천리포에 내려와 월요일 새벽 서울로 다시 출근할 때까지 나무를 심고 숲을 돌봤다. 수목원 구석구석을 돌며 삽과 호미질을 했고, 식물도감을 뒤져 나무와 풀의 학명을 모두 외웠다. 해마다 미국 나무 경매장에도 한두 차례씩 들러 신품종 묘목과 종자를 사들였다. 국제 나무시장에서 그는 알아주는 큰손이었다.
민병갈은 자식처럼 키운 나무에 상처를 줄 수 없다며 인위적으로 나무를 보기 좋게 다듬는 것을 싫어했다. 수목원 직원들은 "나무를 지켜만 주고 주인 노릇을 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사람 통행을 방해해도 나무가 우선이어서 그대로 두었다. 농약과 기계를 쓰지 않는 것도 특징이고, 철저한 기록과 관리로 정평이 났다.
1982년 완도호랑가시나무를 발견해 국제학회에 등록하는가 하면 새로운 목련 품종을 잇따라 개발하는 등 학문적 성과도 많았다. 국제 교류에도 앞장서 종자를 다수 확보하고 1997~1998년 국제목련학회, 미국호랑가시학회, 국제수목학회 총회를 개최했다. 2000년에는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국제수목학회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 인증을 받았다.
민병갈은 인재를 기르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직원에게 장학금을 주어 학교를 다니게 하고 해외 연수생도 선발했다. 미국 예일대 부설 마시수목원 부원장이 된 김군소와 영남대 교수를 거쳐 천리포 수목원장을 지낸 김용식이 대표적이다. 인근 초등학교와 농업학교에도 묘목과 씨앗을 보내 학생들이 심고 키우도록 했다.
이 같은 공적을 인정받아 1974년 산림청장 감사패, 1989년 영국왕립원예협회 공로메달, 1992년 국제목련학회 공로패, 1996년 환경부 장관상, 1999년 한미우호상, 2000년 국제수목학회와 미국호랑가시학회 공로패, 2002년 금탑산업훈장과 미국 프리덤재단 공로 메달 등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국내 산림자원 보호와 육성에 평생을 바친 미국 출신의 귀화인 민병갈(閔丙葛.미국 이름 칼 페리스 밀러)씨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2002.3.11
연합뉴스
"무덤 쓰지 말고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으라"
민병갈은 40년 동안 천리포 수목원에 수백억 원을 쏟아부었다.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났을까. 그가 살아 있을 때 수목원 운영으로 번 돈은 한 푼도 없고 후원금만 1억여 원 들어왔을 뿐이었다.
비밀은 주식과 채권 투자였다. 한국은행에서 일해 정보가 많았고 이재에도 밝았다. 고도성장기여서 시운도 따랐다. 액면가로 유일한에게 받은 유한양행 주식이 목돈으로 돌아와 종잣돈으로 삼았다. 1984년 한국은행에서 퇴임하자 증권업계의 영입 제의가 잇따라 한양증권, 쌍용투자증권, 굿모닝증권에서 일했다.
그는 독신으로 지내며 고아 4명을 입양해 키웠다. 나무들과 결혼한 셈이었다. 2002년 4월 8일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5살 청년으로 한국에 들어와 81세 노인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손자와 함께 즐거운 식사를 기다리며민병갈은 결혼하지 않은 채 양자만 4명을 들였다. 손자를 안고 며느리가 준비하는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천리포수목원
"내가 죽으면 무덤을 쓰지 말고 그 자리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으라"는 말을 남겼으나 유족과 수목원 임직원들은 완도호랑가시나무 옆에 무덤을 만들었다가 2012년 유골을 수습해 고인이 아끼던 태산목 아래 수목장으로 안치했다.
천리포 수목원은 2009년 이전에는 사전 허락을 받은 식물연구자나 후원회원만 들어올 수 있는 '금단의 비밀정원'이었다. 2007년 12월 기름 유출 사고로 피해를 본 태안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고 재정 위기에도 숨통을 트려는 의도로 부분 개방을 결정했다.
▲천리포수목원 목련축제2024년 5월 천리포수목원 목련축제를 찾은 탐방객들이 목련꽃 아래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천리포수목원
총면적 58만 9429㎡(약 17만8000평)의 천리포 수목원은 밀러가든, 목련원, 종합원, 침엽수원, 낭새섬, 에코힐링센터, 큰골 7개 구역으로 나뉜다. 동백나무 1096종, 목련 926종, 호랑가시나무 566종, 무궁화 371종, 단풍나무 251종 등 국내 최다인 1만 6895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민병갈의 일대기와 유품을 전시한 민병갈 기념관과 민병갈 식물도서관도 세워졌다.
해마다 민병갈의 기일을 전후해 천리포 수목원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목련이 꽃잎을 피운다. 올해도 이곳에서 목련축제가 3월 27일부터 4월 19일까지 열린다. 모친 에드나가 유달리 좋아해 어머니 나무로 부르던 라즈베리 펀도 있다. 민병갈이 명명해 국제목련학회에 정식으로 등재된 변종이다.
민병갈은 "다음 생에는 개구리로 태어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천리포 수목원 곳곳에는 개구리 조각상이 눈에 띈다. 그는 제2의 조국에 값진 선물을 안겼지만 고향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던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은 외면해 죄스러웠다. 청개구리 우화처럼 민병갈의 환생인 천리포 수목원의 개구리들도 비만 오면 어머니 나무를 보고 울어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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