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품샵에 전시된 마루에프
윤한샘
영원한 불사조와 영원한 행운, 이름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마루에프는 출시 후 엄청난 히트를 쳤다. '부드러운 감칠맛'을 강조한 차별화 포인트가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어필된 것이다. 주인공으로 올라선 마루에프는 이내 아사히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그런데, 잘 나갈 것만 같던 마루에프가 조용히 시장에서 사라지는 비극이 발생한다. 마루에프의 몰락을 이끈 맥주는 기린도, 삿포로도, 에비스도, 산토리도 아니었다. 아사히의 친동생, '아사히 수퍼 드라이'였다.
아사히 연구진은 마루에프의 성공을 바탕으로 알코올 도수는 살짝 높지만, 청량한 목 넘김을 극도로 끌어올린 '아사히 수퍼 드라이'를 이듬해 출시했다. 이 맥주는 놀랍게도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삽시간에 맥주 시장을 석권했다.
삿포로, 산토리, 기린은 곧바로 뒤에 '수퍼 드라이'를 붙인 맥주들을 출시했지만, 원조를 따라 잡기엔 힘이 부족했다. 이후 맥주 이름에서 '드라이(dry)'는 극단적인 깔끔함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도 오비와 조선맥주가 '수퍼 드라이'를 내세운 맥주를 출시하기도 했다. 내 나이 정도의 세대라면 루이 암스트롱의 '왓 어 원더풀 월드' 뒤로 만화가 이현세가 등장했던 오비 맥주 광고가 컬러 TV처럼 단박 떠오르리라.
아사히 수퍼 드라이는 첫 해, 목표치의 3배가 넘는 1350만 상자를 판매했다. 심지어 넘치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맥주가 부족해서 죄송합니다'라는 광고까지 낼 정도였다. 아사히 수퍼 드라이의 성공으로 아사히는 삿포로를 밀어내며 1988년 2위로 올라섰고, 2001년에는 마침내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부활의 공을 쏘아 올렸던 마루에프는 생맥주로 조용히 연명하다 허망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마루에프를 불사조처럼 전설에서나 볼 수 있는 맥주라며 아쉬워했지만, 곧 아사히 수퍼 드라이의 연호에 묻히고 말았다.
이후 아사히는 성공 가도를 달리며 세계적인 맥주 회사로 발돋움한다. 2016년에는 에이브이인베브와 사브밀러의 합병으로 매물로 나온 필스너 우르켈, 런던 프라이드, 그롤쉬, 페로니, 코젤 같은 브랜드를 매입하며 전 세계 3위 규모의 기업이 되었다. 브랜드 하나가 만든 거대한 성장 스토리는 멀리 있지 않다. 편의점 냉장고 한 구석을 찾아보면 된다.

▲아사히를 먹여 살린 아사히 수퍼 드라이
윤한샘
0.5%의 차이
아사히 맥주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데스크에서 이름과 투어 시간을 확인했다. 투어비는 1000엔, 우리 돈으로 9500원 정도였다. 성인을 인증하는 노란색 팔찌를 차고 둘러보니 기다리는 건, 기념품 상점에서 눈을 초롱초롱 밝히고 있는 티셔츠, 키링, 병따개, 먹거리, 전용잔 그리고 맥주들이었다.
다양한 굿즈 중 단연코 나를 사로잡은 녀석은 '마루에프'였다. 아니, 마루에프가 있다고? 급하게 제미나이에게 물어보니, 2021년 다시 출시되었다는 게 아닌가. 꼭 구매해서 마셔보리라 다짐을 하는 순간, 투어를 알리는 방송이 들렸다.
투어는 여타 맥주 박물관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양조장 투어가 처음인 아들은 놀란 토끼 눈으로 두리번거렸지만, 세계 양조장 곳곳을 가본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천천히 산보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코스는 언제나처럼 맥주 시음 시간. 아사히 맥주 박물관은 생맥주 2잔을 마실 수 있었다. 맥주 종류는 생각보다 다채로웠다. 아사히 수퍼 드라이 엑스트라 콜드, 아사히 수퍼 드라이, 마루에프, 마루에프 흑맥주, 필스너 우르켈, 페로니 중 고르면 됐다.

▲아사히 수퍼 드라이 엑스트라 콜드
윤한샘
나의 선택은 당연히 마루에프 생맥주. 흑맥주도 마셔보고 싶었으나, 마루에프 페일라거와 영하 2도에서 서브되는 아사히 수퍼 드라이 엑스트라 콜드를 선택했다. 일본 라거 뿐만 아니라 카스나 테라 같은 한국 라거들은 0도에 가까운 온도에서 서브 되면 더 맛있게 느껴지곤 한다. 낮은 온도는 탄산의 크기를 작게 만들어 입 안에서 더 강한 청량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사히 수퍼 드라이 같은 맥주를 마신다면 꼭 냉동실에 잠시라도 넣었다가 마셔보자.
두 맥주 스타일은 동일하다. 쌀 전분이 들어간 아메리칸 라거로 아사히가 자랑하는 '이스트 No.318'이 들어간다. 이 효모는 당을 모두 먹어 치워 극도의 드라이함, 즉 깔끔함을 맥주에 선사한다.
마루에프와 아사히 수퍼 드라이의 차이는 알코올 뿐이다. 5% 알코올을 가진 아사히 수퍼 드라이 속 효모가 당을 더 소화하면서 0.5% 알코올을 더 녹여낸다. 4.5%와 5%, 단 0.5%지만 마루에프에서는 뭉근한 바디감이, 아사히 수퍼 드라이에서는 혀를 조이는 청량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미세한 차이가 하나는 세계를 제패하게 했고, 다른 하나는 28년 간 동면에 들게 했다.
▲생맥주로 즐긴 마루에프
윤한샘
맥주를 마시며 우리 인생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면 찰나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이 오기 마련이다. 그 작은 차이로 인생이 험로가 되기도 대로가 되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은, 그렇다 할지라도 부활할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는 것. 마치 마루에프처럼.
마루에프를 담은 잔에는 불사조 로고가 있었다. 화려한 수퍼 드라이보다 묵묵히 돌아온 마루에프가 더 달게 느껴지는 건, 내 인생도 언젠가 괜찮아질 거라는 기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쉽지 않은 우리 모두의 인생을 위해 시원하게,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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