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03 06:37최종 업데이트 26.04.03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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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1980 사북, 늦은 메아리'는 박봉남 감독의 영화 <1980 사북> 전국 상영을 계기로 공론화한 사북 사건을 단지 과거사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국가의 대응, 공동체와 시민 사회의 변화 과정을 추적 기록해 국가 폭력의 기억과 치유 과정을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제주의 경찰 기마와 사북의 경찰 지프

경찰 지프차에 치여 중상을 입고 동원보건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원일오 광부.정선지역사회연구소 제공

1948년 4월 제주에서는 시내 12개 경찰지서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시작으로 4.3사건이 일어났다. 한 해 전 1947년 3.1절 기념행사 도중 경찰이 탄 기마가 아이를 치는 일이 발생했고, 이를 알고도 그냥 가려고 하자 군중들이 소리치고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일본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경찰들이 해방 후에도 미군정의 경찰로 변신하여 계속 군림하던 상황에서, 이 일은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라 쌓여 있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과 충돌이 일어났고, 경찰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총파업이 일어나는 등 제주 전체에서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반발이 커졌다. 이에 대응한 외지 경찰 투입과 서북청년단 개입으로 사태가 악화하였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도내 12개 경찰지서를 동시에 습격하였다.

그로부터 32년 후. 1980년 4월 강원도 사북에서는 시내 경찰지서에 대한 광부들의 공격을 시작으로 사북사건이 일어났다. 그 한 시간 전 동원탄좌 노조사무실 앞에서 광부들이 어용 노조지부장을 성토하며 농성하던 중 경찰 지프가 광부를 치고 그대로 달아나는 일이 발생했고, 광부들은 "경찰이 사람 죽였다"고 외치며 울분을 터트렸다. 박정희 시대 내내 기업주의 편에 서 있던 경찰들이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에도 노골적으로 어용노조를 편들고 광부들을 감시하던 상황에서, 이것은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라 광부들의 누적된 불만을 일거에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광부들은 공권력과 전면 충돌하였고, 동원탄좌 객실에 모여 대책을 협의 중이던 중앙정보부 조정관, 보안부대장, 광업소 간부, 경찰 간부들이 습격을 당했으며 장성경찰서장은 광부들에게 붙잡혀 폭행을 당했다. 광업소와 경찰이 한패라는 것을 확신한 광부들은 더욱 흥분하여 그날 저녁 광업소 본사 사무실과 노조사무실, 객실을 돌아다니며 집기를 부쉈다. 다음날 오전 진압 경찰 이동 상황을 파악한 광부들은 광업소로 통하는 안경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총집결하였다. 노조지부장이 사는 간부 사택으로 몰려간 일부 광부와 부녀자들은 노조지부장 대신 그 부인을 붙잡아 광업소로 끌고 와 인질로 삼았다. 강원 도경의 주도로 외지 경찰이 투입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하였고, 이어진 안경다리 충돌에서 경찰 1명이 사망하고 경찰 다수가 부상하였다.

제주의 양민들과 사북의 광부들

제주도에서 1947년부터 1954년까지 7년 넘게 이어진 양측의 무력 충돌로, 공식 통계에 잡힌 희생자만 1만 4000명이 넘는다. 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이 희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시기 제주도민들은 사실상 국가가 '단선·단정'의 깃발 아래 초토화 작전의 대상으로 삼았던 '적군'이었다. '제주 양민'이란 듣기 좋은 이름이었을 뿐 제주 사람들은 대부분 빨갱이의 후예들로 몰려 오랫동안 차별 받았다.

1980년 사북에서 유혈 충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4월 24일 노사정 합의를 파기하고 5월 내내 이어진 계엄 합동수사단의 무차별 보복 수사로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자만 200여 명이 넘는다. 당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소속 광부의 10분의 1이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1980년 4월에 경찰이 불을 지핀 사북 광부들의 분노의 근원을 설명하는 또 다른 통계도 있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 7년 동안 탄광에서 발생한 재해 사고로 공식 통계에 잡힌 피해자만 3400명이 넘는다. 당시 전체 탄광근로자의 10분의 1이 재해 피해를 당했다. 재해자 10명 중 4명 꼴인 1432명이 사망했고 1973년 한 해에만 229명이 탄광에서 목숨을 잃었다.

연도별 탄광재해 인원(자료: 동력자원부,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 <석탄통계연보>.1991.)석탄통계연보 자료 갈무리

이 기간 전체 산업 근로자 중 탄광 근로자의 비중은 약 2%에 불과했던 반면, 사망자의 비중은 거의 여섯 배 가까운 11%에 달했다(고용노동부 '연도별 산업재해 통계',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 '석탄통계연보'). 1980년 당시 광업의 산재도수율은 49.3으로 일반 제조업(10.6)의 5배나 사고가 많았고, 산재강도율은 23.5로 부상이나 사망의 정도가 일반 제조업(2.0)에 비해 10배 이상 심각했다(고용노동부, '산업재해현황분석').

이 시기 광부들은 사실상 국가가 '증산'의 깃발 아래 죽음이 도사린 전쟁터로 내몰았던 '병력'이었다. '산업전사'는 국가와 광부들이 서로 수용할 만한 점잖은 이름이었을 뿐, 그들은 언제든 소모품처럼 버려질 최하층민으로 취급 받았다.

이러한 산업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광부들조차도 폐가 서서히 굳어가는 병으로 죽어간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1985년 진폐법 시행 이후 2001년 7월까지 진폐증 사망자는 6672명에 달했고, 1988년 이후에는 진폐증 사망자가 광산재해 사망자 수를 추월했다. 탄광 대부분 문을 닫은 후에도, 버려진 '산업전사'의 다른 이름인 '진폐재해자'들은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영화 <1980 사북> 스틸컷엣나인필름

20년 전 대통령의 사과와 20년 후 국가의 침묵

제주 4.3사건은 지난 2000년 1월 특별법 제정을 시작으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보고서를 채택한 이래,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첫 공식 사과를 시작으로 완전한 해결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다.

2000년 4월 시행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구성되어 2년 여의 조사를 거쳐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였고, 이를 토대로 국가 차원의 공식 입장이 발표되었다.

사건 발생 55년 만인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 라마다 프라자 호텔에서 도민과의 오찬 간담회를 열어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를 토대로 국가 최고 책임자로서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제주를 방문하기 전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해 각계 인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2년여의 조사를 통해 의결한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 받았습니다. 위원회는 이 사건으로 무고한 희생이 발생한 데 대해 정부의 사과와 희생자 명예 회복, 그리고 추모 사업의 적극적인 추진을 건의해 왔습니다. (중략) 저는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정부는 4.3평화공원 조성, 신속한 명예회복 등 위원회의 건의사항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 2003년 제주도민과의 간담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발표한 사과문 중에서

대통령의 사과는, 이후 4.3 평화공원 조성, 희생자 추가 발굴과 인정, 그리고 최근의 4.3 특별법 개정을 통한 보상까지 이어지는 과거사 정리의 핵심 기점이 되었다.

대통령은 사과문의 말미에 국민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덧붙였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 시키는 일은 비단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여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4.3사건의 소중한 교훈을 더욱 승화시킴으로써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확산시켜야 하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로부터 3년 후인 2006년 제주에서 열린 '제58주년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 공식 행사에 대통령 자격으로 처음 참석하여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국가 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되었던 잘못에 대해서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라는 대목에서 제주도민은 모두 박수를 쳤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이다. 벌써 20년 전의 국가 최고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국민 여러분, 자랑스러운 역사이든, 부끄러운 역사이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서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국가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 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는 특별히 이렇게 덧붙였다.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 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확보되고 그 위에서 우리 국민들이 함께 상생하고 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2005년 12월 1일부터 시행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른 대통령 소속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구성되어 2008년까지 방대한 조사를 통해 1980년 사북사건이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이었다고 진실 규명하였다. 위원회는 국가의 총체적 사과와 피해 구제 및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를 촉구하는 동시에, 피해자들과 먼저 화해하고 관련자들 사이의 화해를 이루기 위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하였다.

사북사건 발생 44년이 되던 2024년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역시 사북사건을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결론짓고, 국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거듭 권고하였다.

- 국가는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이들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 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할 것.

- 국가는 사북사건 피해자들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 시키기 위해 재심 등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

-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사북사건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인권침해의 재발을 방지하며 지역 사회의 화해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기념 사업 등을 지원할 것.

얼마나 더 시간이 걸려야 하는가

영화 <1980 사북> 스틸컷엣나인필름

그러나 그 사이 책임 당사자인 국가는 사북사건을 계속 외면해 왔다. 20년 전 국가 폭력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이 왜 사북에는 여전히 예외가 되어야 할까?

올해는 사북사건 발생 46년을 맞는다. 제주 4.3사건에 대한 국가 사과가 나오기까지 55년이 걸렸으니 사북사건에 대한 국가 사과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더 걸려야 하는가?

1948년에서 2003년까지 전쟁과 독재의 시간이 대부분이었던 어두운 시절에 비추어 본 55년의 기다림과 1980년에서 2026년까지 민주화와 국민 주권의 빛나는 시절에 비추어 본 46년의 기다림. 기다림은 절대적인 시간보다 상대적인 시간이며 절망감은 그에 비례한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북사건 피해자의 대부분이 불명예 속에 세상을 떠났다. 생존자들과 그 자녀들은 고통 속에 방치되고 있다.

4월 3일 제주의 아픔을 생각하며 사북에서 묻는다.

공권력이 사북 광부와 부녀자들에게 저지른 불법적인 국가 폭력에 대해 대통령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사과하기까지 46년으로 부족한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 사북특별페이지(www.jcrc.kr)에도 실립니다. 저자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사북항쟁과 국가폭력>(지식공작소, 2021)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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