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01 10:52최종 업데이트 26.04.0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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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5년 9월 8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노총 앞에서 '임금체불 근절! 전국 캠페인 선포식! 한국노총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사업주에게 문제를 제기하면 관계가 다시 돌아올 수 없겠죠?"

3개월이나 월급을 못 받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찾아온 임금체불 피해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신속하고 적은 비용으로 체불된 임금을 받는 방법은, 고용노동지청에 사용자를 상대로 임금체불 진정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해결책을 제시했더니 돌아온 질문이었습니다.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노동 상담을 하다 보면 악성화된 피해 사례가 자주 발견됩니다. 장기간의 임금체불이나 수년간 지속된 직장 내 갑질이 대표적입니다. 혹자는 그렇게 길게 월급을 못 받고 갑질 당하면서 왜 때려치우지 못하는 거냐며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담 경험상 적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간 임금을 받지 못하고 찾아온 악성 임금체불 피해자들은 선했고, 사용자와 관계가 돈독하며 자기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습니다. 사용자가 임금을 수개월 체불해 생계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사장님도 어려울 거야'라며 상대의 사정을 헤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사용자가 피해 노동자의 능력을 인정하며 도와달라 호소하면 쉽사리 피해 사업장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고용관계의 수면 아래 흐르는 근로기준법 위반행위를 비롯한 사용자의 불합리한 관행을 문제 삼으면, 그가 예상했던 대로 사용자와 피해 노동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사용자로서는 피해 노동자가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월급 주며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잘 처리하던 사람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겁니다. 그제야 사용자는 피해 노동자들이 비로소 감정을 가지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한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상담사례로 볼 때 노동자의 문제 제기가 있고 난 뒤 사용자가 피해 노동자에게 감정적으로 배신을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용자 대다수는 피해 노동자의 임금체불 신고나 직장 내 갑질 신고에 대해 펄쩍 뛰며 배신감을 토로합니다. 노동조합을 설립해 임금 등의 근로조건 향상을 요구하며 사용자에게 단체교섭을 요구할 때도 그렇습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들에게 잘해 줬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냐?' 이런 식이지요. 그러나 이런 불편한 감정의 대립은 잠깐입니다. 결국 사용자는 근로기준법 위반에 따른 처벌의 위험을 피하려고 피해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사용자가 '내 덕에 먹고 사는 것들이랑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하다니 인정하기 어렵다'라며 노동조합과 교섭에 나서지 않으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에 따라 부당노동행위로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교섭 자리에서 노동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처럼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상대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때 오히려 자신이 피해를 보거나 고통을 받는다면, 함부로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거나 권리를 짓밟을 수 없습니다.

인회 언니의 '저항'

2019년 9월5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대회의실에서 열린 조교노동자 노동실태 및 노조 설립 설명회에서 구자룡 한국노총 조직부장이 국·공립대학 조교노동자 고용형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연합뉴스

정이현의 단편소설 <언니>(소설집 <노 피플 존> 수록)에서는 끊어야 하는 관계를 불가피하게 지속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환경에서 고통받는 노동자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인회 언니는 중국어 전공의 석사과정 대학원생으로 학과 조교입니다. 대학교의 학사 행정업무와 교수의 연구를 보조하는 조교는, 그 대가로 장학금이라는 명목의 금전 보상을 받거나 월급을 받는 대학의 연구 노동자입니다.

겨울 방학 연구 학기를 맞이한 지도교수는 가족이 머무는 미국으로 훌쩍 떠나며 인회 언니에게 중국어 학습서의 초벌 번역본을 손봐달라 요청합니다. 초벌 번역이 너무 형편없었기에 인회 언니로서는 새롭게 번역하고 번역본을 정리해야 하는 큰 프로젝트였습니다.

명백히 불합리한 지시였지만 인회 언니는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타 대학 학부생 출신으로 현재 대학원에서 학위를 취득해 강의 경험을 쌓고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지도교수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회 언니는 학부생 2명과 함께 겨울 방학 내내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사비를 들여 프로젝트를 보조하는 학부생들에게 밥을 사 먹이며 교수가 부탁한 번역 프로젝트를 훌륭하게 완성해 냅니다. 이처럼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한 학부생들이 보기에 인회 언니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자신이 프로젝트 대부분을 수행했음에도 교수에게 프로젝트를 단순 보조한 학부생들의 공로를 소개할 정도로 말이지요.

그러나 그 중국어 학습서는 교수와 교수의 부인이 공저자로 출판되었고 그 어디에도 인회 언니의 이름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인회 언니는 아마도 이를 예상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교수가 자신을 신뢰해 맡긴 일이기에 묵묵히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지도교수는 전공 세미나나 각종 학회 등에서 인회 언니를 배제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논문심사도 이유 없이 퇴짜를 맞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은 아마도 인회 언니가 쓸쓸하게 학교를 떠나는 결말을 예상했을 겁니다. 인회 언니는 독자들의 예상처럼 자퇴를 결심합니다. 그러나 조용히 떠나는 대신 대학 사회의 불합리한 관행에 맞서 피켓을 듭니다.

논문심사와 교수 임용 평가 등에 절대 권한을 지닌 지도교수의 영향 아래 있는 조교는 '을'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인회 언니 같은 피해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이와 같은 외침에 우리 사회가 주목하면서 대학 사회의 불합리한 관행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대학이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여 변화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인회 언니 같은 피해 당사자들이 불이익을 감수하며 자신과 같은 피해의 예방을 위해 사회적 고발을 진행한 덕분입니다. 지금은 조교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연구 노동자들이 사용자에 해당하는 대학이나 교수의 불합리한 갑질에 대해 최소한의 보호장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불합리한 관행과 폭력에 희생되는 피해 노동자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7월에는 지방의 어느 국립대 조교가 교수들의 갑질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피해 노동자들이 혼자일 때 가해자들은 두렵지 않습니다. 소설 속 인회 언니는 홀로 피켓을 들고 대학의 많은 구성원이 드나드는 도서관 앞에서 대학 당국의 불합리한 차별에 맞섰습니다. 피해 당사자가 적극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보장하고, 일하는 시민들이 이들 곁에서 제도적 변화를 끌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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