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5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대회의실에서 열린 조교노동자 노동실태 및 노조 설립 설명회에서 구자룡 한국노총 조직부장이 국·공립대학 조교노동자 고용형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이현의 단편소설 <언니>(소설집 <노 피플 존> 수록)에서는 끊어야 하는 관계를 불가피하게 지속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환경에서 고통받는 노동자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인회 언니는 중국어 전공의 석사과정 대학원생으로 학과 조교입니다. 대학교의 학사 행정업무와 교수의 연구를 보조하는 조교는, 그 대가로 장학금이라는 명목의 금전 보상을 받거나 월급을 받는 대학의 연구 노동자입니다.
겨울 방학 연구 학기를 맞이한 지도교수는 가족이 머무는 미국으로 훌쩍 떠나며 인회 언니에게 중국어 학습서의 초벌 번역본을 손봐달라 요청합니다. 초벌 번역이 너무 형편없었기에 인회 언니로서는 새롭게 번역하고 번역본을 정리해야 하는 큰 프로젝트였습니다.
명백히 불합리한 지시였지만 인회 언니는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타 대학 학부생 출신으로 현재 대학원에서 학위를 취득해 강의 경험을 쌓고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지도교수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회 언니는 학부생 2명과 함께 겨울 방학 내내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사비를 들여 프로젝트를 보조하는 학부생들에게 밥을 사 먹이며 교수가 부탁한 번역 프로젝트를 훌륭하게 완성해 냅니다. 이처럼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한 학부생들이 보기에 인회 언니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자신이 프로젝트 대부분을 수행했음에도 교수에게 프로젝트를 단순 보조한 학부생들의 공로를 소개할 정도로 말이지요.
그러나 그 중국어 학습서는 교수와 교수의 부인이 공저자로 출판되었고 그 어디에도 인회 언니의 이름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인회 언니는 아마도 이를 예상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교수가 자신을 신뢰해 맡긴 일이기에 묵묵히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지도교수는 전공 세미나나 각종 학회 등에서 인회 언니를 배제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논문심사도 이유 없이 퇴짜를 맞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은 아마도 인회 언니가 쓸쓸하게 학교를 떠나는 결말을 예상했을 겁니다. 인회 언니는 독자들의 예상처럼 자퇴를 결심합니다. 그러나 조용히 떠나는 대신 대학 사회의 불합리한 관행에 맞서 피켓을 듭니다.
논문심사와 교수 임용 평가 등에 절대 권한을 지닌 지도교수의 영향 아래 있는 조교는 '을'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인회 언니 같은 피해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이와 같은 외침에 우리 사회가 주목하면서 대학 사회의 불합리한 관행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대학이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여 변화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인회 언니 같은 피해 당사자들이 불이익을 감수하며 자신과 같은 피해의 예방을 위해 사회적 고발을 진행한 덕분입니다. 지금은 조교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연구 노동자들이 사용자에 해당하는 대학이나 교수의 불합리한 갑질에 대해 최소한의 보호장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불합리한 관행과 폭력에 희생되는 피해 노동자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7월에는 지방의 어느 국립대 조교가 교수들의 갑질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피해 노동자들이 혼자일 때 가해자들은 두렵지 않습니다. 소설 속 인회 언니는 홀로 피켓을 들고 대학의 많은 구성원이 드나드는 도서관 앞에서 대학 당국의 불합리한 차별에 맞섰습니다. 피해 당사자가 적극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보장하고, 일하는 시민들이 이들 곁에서 제도적 변화를 끌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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