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3.30 19:48최종 업데이트 26.03.30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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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구속이 결정된 이근안 전 경감이 성동구치소로 이송되기 전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고문 경감',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지난 25일 사망한 일을 계기로 그의 명예를 박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생전에 받은 훈장이 16개라고 한다. 그중에서 옥조근정훈장 하나만 취소됐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경찰청 관계자는 1945년 이래 경찰관들에게 수여된 포상 및 표창에 대한 전수조사가 3월 초부터 진행되고 있다고 29일 밝혔다. 이 결과에 따라 이근안의 나머지 훈장들도 취소될 수 있다.

그의 제복에 부착됐던 훈장들은 민주주의를 탄압한 대가였다. 성실한 공무원들에게 수여돼야 할 근정훈장의 마지막 5등급인 옥조근정훈장이 그에게 수여된 것은 그 때문이다.

고문 피해자 김근태의 증언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사용하는 옛 남영동대공분실.이희훈

이 훈장이 수여된 날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제41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이 거행된 1986년 10월 21일이다. 이듬해에 "턱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쇼크사로 은폐한 강민창 내무부 치안본부장(경찰청장)이 참석한 가운데 "경찰 발전에 공이 많은" 350명이 각종 훈장과 포장·표창을 받았다. 경감급들에게 수여된 옥조근정훈장 수훈자 명단에서 "이근안(경기도경)"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하는 말처럼, 이 훈장은 더 잘하라고 주는 것이었다. 훈장이 수여된 시점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유성환(1931~2018) 신민당 국회의원의 국시발언(1986.10.14.)을 빌미로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가중될 때였다.

그해 10월 16일에는 북한 언론보도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서울대 대자보 사건 관련자들이 검거됐고, 18일에는 대학 운동권 출신들이 노동현장에 침투했다는 이유로 전국노동자연맹추진위원회(전노추) 관련자 7명이 구속되고 107명이 수배됐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6월항쟁>은 "유성환 국시발언을 전후해 장기 불법구금, 고문, 폭행·폭력과 연결되어 있는 사건이 잇따라 터졌다"라고 기술한다. 그래서 이 시점은 이근안 같은 인물이 전두환 정권에 더욱 필요할 때였다. 이 책은 1288명이 구속된 '건대 항쟁'이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전개된 일을 설명한 뒤 이근안을 언급한다.

"며칠간 숨 좀 돌리려고 하자, 11월 12일에는 반제동맹당 사건이 발표되었다. 16명이 검거되고 20여 명이 수배된 것으로 발표된 이 사건의 피고인들은 나중에 치안본부 경기도경 대공분실에서 고문 기술자 이근안 등 12명의 형사들로부터 한 달 동안 날개꺾기, 관절꺾기, 통닭구이, 고춧가루 물고문 등을 당했다고 이들을 고소했다."

이근안이 실명 대신 '고문 기술자'라는 호칭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은 김근태(1947~2011) 전 열린우리당 의장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 때인 1985년에 투옥됐다가 이근안을 만난 김근태는 그해 가을부터 법정에서 고문 실태를 폭로했다.

당시만 해도 김근태는 이근안의 이름과 직책을 몰랐다. 계급이 경감인 것 같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의 고문 피해 사실을 담은 <남영동>의 제5판이 발행된 1988년 7월 3일에도 그랬다. 그는 자신을 고문한 경찰 9명의 인적 사항을 책에 표기하면서도, 그중 1명에 관해서는 경장 계급만 표기하고 이름은 적지 못했고, 또 다른 1명에 관해서는 "경감(?)"이라고 표기한 뒤 "고문담당 전문가"로 적었다.

다른 경찰들도 고문에 참여했지만, 김근태는 유독 한 사람만 전문가로 표기했다. 이근안의 고문 기술이 그만큼 남달랐던 것이다. <남영동>에서 김근태는 이근안의 첫인상을 이렇게 기억해 냈다.

"델시 상표의 사무용 가방을 들고 한 건장한 사내가 방으로 들어왔읍니다. 운동화를 꺼내어 신고서, 뭔가 삐딱하니 꼬나 보더군요. 거리의 어느 구석에 있을 깡패, 전형적인 어깨 타입의 풍모였읍니다. 눈은 불안정하고, 뻐기면서 걷는 인간 백정 같았읍니다. 몸무게는 거의 90kg에 육박할 것 같고, 키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읍니다. 잃어버린 전설에 나오는, 뒷뜰에서 식칼을 가는 그 누구일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읍니다. 이 사람에게 그래도 빛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눈동자에 어리는 장난기 같은 그림자, 그것뿐입니다."

이 책에 실린 1985년 12월 19일자 서울지방법원 공판기록에 따르면, 김근태는 법정에서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매일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라고 폭로했다. 이 지독한 고문을 온갖 기술을 발휘해 가며 지휘한 인물이 장난기 어린 눈빛의 소유자다.

김근태가 그 눈빛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직책은 뭔지를 알아낸 것은 3년 뒤다. 당시 <한겨레> 기자였던 문학진 전 국회의원은 1999년에 펴낸 <백범 김구처럼>에서 그 주인공을 찾아내기 위한 김근태의 노력을 이렇게 서술했다.

"김씨는 작년 6월 30일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난 뒤 이 고문 기술자를 찾아내기 위해 여러 곳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이름만 모를 뿐 인상착의며 말씨가 뇌리에 또렷이 박혀 있는 그를 확인해낼 수 있는 방법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찾아질 수 있을 것 같아, 남민전·전노련·민추위·반제동맹당 사건 등의 관련자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6개월여를 탐문한 끝에 김씨는 거의 100% 가까운 심증을 얻었다. 그것은 그 고문 기술자의 이름이 이근안, 현직이 경기도경 대공분실장이라는 것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김근태가 이근안의 사진을 확보함에 따라 "거의 100%"가 "100%"로 굳어진 것은 1988년 12월 20일이다. 다음날 <한겨레> 1면에는 이근안의 실명과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1988년 12월 21일 자 <한겨레> 신문 1면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근안에게 누가 훈장을 주었나

그달 24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24일부터 검찰은 이근안 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이때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 이근안은 10년 넘도록 집 근처 창고 뒤에 숨어 지내다가 1999년에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자수하고 그해 11월에 구속기소됐다.

형량이 확정된 것은 2000년 9월이다. 대법원은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을 확정했다. 2006년에 출소할 때 그는 "그 시대에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었습니다"라는 출소 소감을 밝혔다.

2008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2012년에 목사직에서 면직됐다. 그는 세상에 대한 반성 없이 한동안 하나님 뒤에 숨어 살려 했다. 목사직뿐 아니라 훈장도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수사를 맡아 '고문 기술자'로 널리 알려진 이근안 전 경감이 25일 숨졌다. 향년 88세. 이 전 경감은 2023년 초 부인을 잃고 서울에서 홀로 지내왔으며 최근 건강이 악화해 요양병원에 입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2012년 자서전 출판기념회 당시 이 전 경감. 연합뉴스

그런데 이근안은 자기 개인의 일이 아닌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김근태에게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 그때 복수해라"고 말했다. 그가 숨는 바람에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그의 발언 속에는 고문행위에 대한 그의 인식이 반영돼 있다. 자신의 고문행위가 반민주적 국가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어느 정도는 의식했기에 나온 발언이다.

이근안에 대한 비판의 상당 부분은 그에게 봉급을 줘가며 무고한 사람들을 짓밟은 대한민국 국가로 돌아가야 한다. 대한민국이 그의 훈장을 박탈하는 과정에서는 그의 왼쪽 가슴에 훈장들을 달아준 대한민국 자신에 대한 반성도 수반되는 게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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