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23일 밤 사북읍사무소에서 광부대표 40여명이 당국과의 타협안을 놓고 회의하고 있다.
정선지역사회연구소 제공
합동수사단이 쳐놓은 덫
그러나 도경국장의 약속과는 달리 강원도경은 합의 다음날인 4월 25일부터 주동 인물 명단을 파악하고 소재 추적에 나섰다. 주모자에 대한 내사는 4. 24 합의 이전부터 계속 진행되었으며, 주민 협조와 현장에서 찍은 주동자 사진 등을 놓고 여러 개의 '검거 대상자 명단'을 작성하였다.
4월 30일 '동해물산'(중앙정보부 강원지부의 위장 명칭)이 작성한 '사북 광부난동 사건 관련자 명단'은 총 130명을 주모자, 선동자, 극렬 행동대원 등으로 분류하고 전과 기록과 가족 성향까지 적어 놓았다. 보복의 디데이는 5월 초였다.
광부들이 작업장으로 복귀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던 1980년 5월 6일. 이원갑, 천만성 등 광부 대표 10여 명은 수습대책위원회 전체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저녁 7시에 사북읍사무소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합동수사단이 놓은 덫이었다. 착검한 M16 소총을 든 군인과 경찰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이원갑과 천만성 등은 전원 현장에서 체포되어 정선경찰서 합동수사단으로 연행되었다.
새벽을 짓누른 군홧발
1980년 5월 7일자 <합수단 수사상황> 보고 문건에 따르면, 5월 6일 밤 11시에 9명, 5월 7일 새벽 4시에 13명, 같은 날 새벽 6시에 8명 등 주모자 30명을 연행해 범죄 유형별로 4개 수사반에 분산하여 조사를 개시하였다.
5월 6일 저녁 1차 검거 작전 이후 합동수사단은 이미 작성해 놓은 연행자 명단을 토대로 사북 전역에서 무차별 연행을 시작하였다. 합수단 소속 군인과 경찰들은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새벽에 광부 사택을 급습했다.
을반 퇴근을 하고 새벽녘에 자고 있는데 사복을 입은 사람 세 명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나를 끌고 나갔습니다. 당시 집사람이 넷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형사들이 문을 갑자기 박차고 들어오자 깜짝 놀라서 아기를 낳았습니다.(중략) 나중에 들으니까 갑자기 애기가 쏟아지니까 내가 잡혀가도 나오지도 못하고 혼자서 배꼽 자르고 혼자서 수습을 했다고 합니다. (강윤호, 2006년 8월 1일 증언)
당시 장성경찰서 수사과 조사계 경장 이용재에 따르면, 정선경찰서에 도착한 광부와 주민들은 머리가 터지고 다리를 절룩거리는 등 연행되는 과정에서 폭행 당한 흔적이 뚜렷했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조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87쪽).
신군부가 은폐한 공간, 정선경찰서 임시조사실
연행된 광부들은 정선경찰서 강당의 임시조사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강당 건물 내부에 합판으로 임시 칸막이를 쳐 놓은 곳에 광부와 부녀자들이 하나씩 들어가 취조를 받았다. 당시 합동수사단에 파견 근무했던 1001보안부대원 박정환은 조사실을 개방적으로 만들기 위해 "칸막이를 베니어판으로 만들고 낮게 설치"했다면서 광부들의 증언과 부합하는 진술을 했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없도록" 개방적 구조로 설계되었다는 정선경찰서 임시조사실은, 계엄이 허락한 야만성에 점령 되자마자 지옥 같은 집단 고문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정선경찰서 임시조사실은 사북사건에서 신군부가 철저하게 은폐했던 공간이다. 그곳이 한국 현대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집단고문의 현장이었다는 것은 강윤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드러났다.
꿇어 앉힌 상태에서 1m정도 되는 각목으로 어깨를 패고, 쓰러지면 군화발로 얼굴을 밟았습니다. 내가 맞아서 바닥에 쓰러지면 조사실 바닥 벽 틈으로 옆 조사실에서 맞는 여자들을 잠깐 볼 수 있었습니다. 옆 조사실에 남자 형사가 "썅년아 묻는 말에 대답해"라고 욕을 하면서 발로 차고 여자는 양 손을 가슴에 모으고 발발 떨면서 나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머리는 산발하여 헝클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강윤호, 2006년 8월 1일 증언)
당시 760갱에서 선산부로 일하던 이완형도 집단고문의 현장으로 끌려갔다.
여기저기서 "아버지, 나 죽어요" 온갖 비명소리가 난무하고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어요. 나한테는 "주동자를 대라"며 "널 죽일 수도 있어. 넌 개 값도 안 돼"라고 욕을 하면서 꿇어 앉혀놓고 무릎 뒤에 각목을 넣어 허벅지를 밟아댔어요. 그리고 의자에 앉혀놓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코에다가 고춧가루물을 담은 주전자를 들이부었어요. (이완형, 2006년 9월 6일 증언)
사태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가장 먼저 이곳으로 끌려온 이원갑은 각목에 맞아 손가락이 꺾이고, 군홧발에 차여 갈비뼈가 튀어나오는 등 회복 불능의 손상을 입었다.
보안대원들의 성고문

▲영화 <1980 사북> 스틸컷
엣나인필름
합동수사단의 밀실에서는 여성들의 성을 대상으로 한 노골적인 만행이 집단적으로 저질러졌다. A씨는 5월 10일 저녁 무렵 사복을 입은 남자 서넛에 붙들려 노조지부장 부인 린치 혐의로 합동수사단에 연행되었다. 연행 당시 A씨는 임신 4개월째였다.
1.5m 정도 네모난 각목으로 전신을 맞았습니다. 엎드려놓고 세워놓고 때렸습니다. 지금도 허리, 다리가 아픈 게 그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윗옷을 벗겨 젖가슴을 쥐어뜯었습니다.(중략) 각목으로 "쑤셔라, 째라"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각목으로 젖가슴과 아랫도리를 툭툭 쳤습니다.(A, 2006년 7월 19일 증언)
B씨는 사택 방송으로 광부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5월 8일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단 채 합동수사단으로 연행되었다.
이미 정선경찰서 유치장에는 여자들이 약 50~60명가량 와 있었는데 여자들 중에는 머리가 터진 사람, 이빨이 부러진 사람,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습니다.(중략) 조사를 하면서 바른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저의 젖가슴을 우악스럽게 마구 잡아 제끼고... (B, 2006년 6월 8일 증언)
노조지부장 부인을 폭행했다고 지목된 또 다른 여성 C씨는 새벽에 집으로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연행되었다.
새벽 2시쯤 군인 넷이 와서 문을 두드리기에 문을 여는 순간 멱살을 잡아 한 사람은 손으로 입을 막고 또 한 사람은 목을 조르고 다른 사람은 몽둥이로 때리고, 군화발로 다리를 때리며 대기 중이던 버스에 실었습니다. (중략) 젖꼭지를 잡고 비틀어 살갗이 벗겨질 정도였지요. 아랫도리 털을 뽑고 몸을 마구 만지고 그랬습니다. (C, 2006년 8월 9일 증언)
합동수사단 수사1반에 소속되어 피의자 조사를 담당했던 김영주(당시 삼척경찰서 조사계 경장)에 따르면, 40~50여 명의 부녀자들에 대한 조사는 보안대원들이 고문을 통해 "기선을 다 제압한 뒤"에 쉽게 이루어졌다고 했다.
1군사에서 파견된 보안대요원이 길이가 약 1m의 호스를 들고 남녀를 불문하고 광원들의 전신을 때리고 각목을 두 다리의 오금 사이에 넣고 짓밟았으며, 이러한 폭행으로 인하여 실신자가 부지기수로 속출하였습니다. 실신하면 큰 바케스로 물을 붓고 또한 정선군 보건소에 긴급 배치된 의사 간호사들이 응급치료를 하게 한 후 계속하여 가혹행위를 포함한 수사를 하였습니다. (김영주, 2006년 12월 7일 증언)
하지만, 가려진 칸막이 안에 봉인된 여성 피해자들의 참혹한 진실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다.
신군부가 은폐한 시간, 사북의 5월
1980년 5월의 사북은 신군부가 철저하게 은폐했던 시간이다. 광주 시민들이 금남로 거리에서 계엄군의 총칼에 쓰러져 가던 그 시간에, 사북 광부들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정선경찰서 임시조사실에서 합동수사단의 집단고문에 무너져 가고 있었다.
사북사건 합동수사단 단장은 1001보안부대장 손영래였다. 부단장은 김익상(원주지청 검사)과 여판술(중앙정보부 강원지부 수사과장)이었고, 수사주무는 안영섭 강원도경 수사과장과 박기학 1001보안부대 중령이 맡았다. 이들은 사북사건 합동수사단 수사 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을 목격한 바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의 최종 지휘자는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이었다. 그해 7월, 전두환은 사북사건 수사에 참여한 합동수사단 간부 및 관계자들에게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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