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02 19:50최종 업데이트 26.04.0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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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죄는 정치적 비중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릴 만한 죄목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쉽게 걸릴 수 있는 죄목이다. 대중과 국가 간의 힘의 균형이 파괴돼 대중의 지위가 취약해지면 누구라도 이 구렁텅이에 떨어질 수 있다.

국무총리 소속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 위원회'가 펴낸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1948년 12월 3일~27일에 12차례 열린 계엄고등군법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 군법회의에서 민간인 871명에 대해 일률적으로 구(舊)형법 제77조 위반 내란죄를 이유로 유죄 판결을 선고하였다"고 설명한다.

구형법으로 불리는 일본 형법 제77조는 "정부를 전복하거나 국토를 참절하거나 기타 조헌(朝憲)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하여 폭동을 한 자"를 내란죄로 처벌했다. 현행 대한민국 형법 제87조에 나오는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이 일본 형법에서는 "조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표현됐다. 일본 조정의 법률에 맞서는 것이 '조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규정했던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4·3 재판에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내란죄 규정에 저촉돼 유죄 선고를 받은 제주도민들이 1948년 12월의 3주 동안에만 871명이었다. 위 보고서에 의하면, 그중 100명은 사형선고, 102명은 무기징역을 받았다. 내란죄를 덮어쓰기도 쉬웠고 그 때문에 처형되기도 쉬웠던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통계다.

그렇게 살벌한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내란범이 된 소년이 1948년 당시 15세였던 강택심이다. 제주 북서부 해안과 한라산의 사이에 애월읍 금덕리가 있었다. 이곳에 살던 강택심은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는 참변을 겪으면서부터 자신을 내란범으로 몰아가는 상황에 휘말려 들어갔다.

마을이 불탄 뒤 외가가 있는 애월면 하귀리에 피신한 그는 거기서 또 다른 재앙을 입었다. 그에 관한 언론보도들에 따르면, 40대 초반인 그의 어머니는 '산간 폭도'들을 도왔다는 모함을 받고 끌려갔다. 그의 어머니가 자신의 누나와 자주 다툰 일로 인해 앙심을 품고 있었던 임시직 경찰보조원이 모함의 장본인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끌려간 뒤 총살됐다. 총을 든 쪽으로부터 "도망가라"는 말을 듣고 등을 돌렸다가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빨갱이 아님을 증명하려 자원입대

제주4.3평화공원 내 기념관의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4.3사건의 희생자들.김동이

참변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강택심 본인도 어머니의 운명을 따라갔다. 강택심을 겨냥해 "일본군이 버리고 간 총알을 주워다 빨갱이에게 줬다", "무장대에게 군자금 10원을 제공했다"는 등의 거짓 제보가 있었다. 16세가 된 1949년 초반에 그는 그런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석 달간 고초를 겪었다. 소 힘줄 채찍과 몽둥이로 매일 얻어맞았다.

그러고 나서 석방될 때였다. 그때야 자신에게 유죄가 선고된 사실을 통보받았다. 그해 4월 3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내란방조죄 등으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된 사실을 경찰서를 나오면서 알게 됐다. 본인에게 알리지도 않고 궐석재판이 진행됐던 것이다. 자신이 일반 전과자가 아닌 대역죄인이 되어 있는 현실을 16세 소년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란죄 전과자가 된 사실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것은 몸 상태였다. 고문의 결과로 오른쪽 가슴이 왼쪽보다 부풀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또 왼쪽 고막이 찢어져 제대로 들을 수도 없었다.

강택심이 경찰서에 있는 동안에 4·3 유격대가 처한 난관 중 하나는 탄약 부족이었다.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식량 문제는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반공정권의 주장처럼 북한군이나 남로당 본부의 지원을 받았다면 탄약 문제도 겪지 않았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기에 총알 문제를 심각하게 겪었다.

이와 관련해 그해 4월 1일 주한미군사령부가 작성한 기밀문서가 위 4·3 보고서에 인용돼 있다. 이에 따르면, 미군은 유격대의 탄약 보유 실태를 이렇게 분석했다.

"한국군으로부터 노획한 경기관총 3정과 박격포도 탄약 부족으로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생포된 반도들에 따르면, 현재 탄약 저장량은 M-1 소총 실탄 800발, 카빈소총 실탄 90발, 일본제 99식 소총 실탄 400발에 불과하다 한다. 노획한 미제 무기의 탄약은 토벌대로부터 탈취하는 것이 유일한 공급원이다. 그러나 반도들은 99식 소총의 경우, 실탄 2000발 정도의 재장전 설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반도들이 본토나 북한으로부터 병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도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

유격대가 한국군 탄약이나 미군 탄약을 확보하려면 토벌대로부터 탈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 탄약은 그렇지 않았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67년에 펴낸 <한국전쟁사 제1권: 해방과 건군>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6만 이상의 일본군은 탄약을 산중에 묻어둔 채 철수했다.

그런 탄약 일부가 유격대 수중에 들어갔다. 그래서 소년 강택심이 일본군 탄약을 주워 유격대에 제공했다는 허위 제보가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육지 남로당이나 북한군이 유격대에 탄약을 제공했다면, 강택심은 다른 모함을 받았을 수도 있다.

어머니를 잃은 충격을 달랠 시간도 없이 그 자신도 석 달간 고초를 겪고, 그 고초가 끝나자마자 내란죄 전과자라는 멍에를 썼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강택심은 또 다른 위험을 예감했다. 그는 남과 북이 충돌하는 상황이 내란죄 전과자에게 불리하다는 점을 직감했다. 그래서 내린 선택이 국군에 자원입대하는 것이었다.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하려 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92세가 돼서야 벗게 된 멍에

"76년 만에 억울한 누명 벗었다"...4·3 생존 수형인 무죄YTN

강택심처럼 반미나 반이승만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전국 곳곳에서 학살됐다. <역사와 현실> 제54호에 실린 정병준 목포대 교수의 논문 '한국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학살 사건의 배경과 구조'를 보면, 전쟁 발발 당일에 이승만 정권이 북한군에 신경을 집중하지 않고 항일운동권 및 진보세력으로도 신경을 분산시켰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경찰 문서 등에 근거한 이 논문에 따르면, 내무부 치안국장(경찰청장)이 제주도경찰국장에게 전화통신문을 통해 '요시찰인 전원을 즉시 구속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6월 25일 오후 2시 25분이다. 이 긴박한 상황에도 반이승만 세력을 붙잡는 데에 에너지를 소모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란 전과자인 강택심이 자원 입대하지 않았다면 목숨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게 입대해 위험을 피하기는 했지만, 그의 입대는 또 다른 상처를 남겼다. 전쟁 중에 그는 포탄을 맞아 다리 부상을 당했다. 이로 인해 훗날 그는 한쪽 다리를 포기해야 했다.

한국전쟁 뒤 그는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다친 다리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험은 통과했지만, '4·3 빨갱이 전과자'라는 이유로 최종 관문을 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새로운 터전을 찾아 육지로 건너갔다. "제주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는 것이 언론에 보도된 그의 회고다.

세월이 80년 가까이 흐른 2025년 5월 22일, 강택심은 제주지방법원의 재심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서울 거주자인 그의 편의를 위해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사법연수원에서 출장 재판을 한 제주지법 제4형사부는 "너무나 긴 통한의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이 피고인의 억울함을 푸는 작은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검찰이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하고 무죄까지 구형했으므로, 이 재판으로 강택심의 내란죄 누명은 벗겨졌다. 16세 나이로 내란범 오명을 쓰고 일평생 고향을 떠나 살았던 그가 92세가 돼서야 멍에를 벗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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