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0 사북> 스틸컷. 광부들이 광업소 언덕 아래로 밀어 떨어뜨린 경찰 측 지프차들.
엣나인필름
1980년 사북사건은 광부들의 이유 없는 난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적어도 1년 가까이 누적된 노조 파행과 이로 인한 광부들의 좌절감이 있었다. 1979년 노조지부장 선거에 대한 무효 결정 이후 재선거 지연 사태, 광부 2568명의 노조직선제 청원, 정보기관의 개입과 직선제 무산, 1980년 3월 노조지부장 직무대리와 회사 간 임금협상 일방 합의 등 광부들의 불만을 키운 여러 일들이 있었다(광산노조, <사북사태 발생에 대한 진상>, 1980, 23쪽).
그러나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1980년의 사북이 광부 항쟁의 필연적인 무대가 되어야 할 것은 아니었다. 노조직선제를 위한 사북 광부들의 운동이 폭발적인 항쟁으로 전화된 데는 사태를 악화시킨 공권력의 결정적인 폭압 장면이 있었다.
1980. 4. 21. 14:00경 사북지서장과 노조지부장 이재기가 약속했던 노조집회가 계엄당국에 의해 불허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노조원들은 노조사무실에 몰려가 노조부지부장 홍금종에게 항의하였다. 이때 현장에서 사진 채증을 하던 정선경찰서 소속 사복 경찰관이 광부들에 의해 발각되었다. 사복 경찰관이 노조사무실 1층 창문을 넘어 노조사무실 앞마당에 대기 중이던 경찰차량을 타고 달아나려 하자 주위의 광부들이 경찰차량을 가로막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3.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151쪽)
경찰들은 광부들을 향해 그대로 지프차를 몰았고 이때 노조원 원일오 등 서너 명이 차량에 치어 나뒹굴었다. 진술과 의료 기록을 종합하면 경찰 지프차의 바퀴는 광부 원일오의 허리와 골반을 타고 넘어가 방광 탈구 등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 그런데도 경찰차는 멈추지 않았고 그대로 달아났다. 사람들은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고 외치며 경찰 지프를 뒤따라 사북지서로 몰려갔다. 사북항쟁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신군부는 경찰이 관여된 최초의 폭력 사건을 감추는 대신, 그것이 촉발한 광부들의 집단 폭력을 확대해 사건의 서사를 바꾸고 책임의 소재를 이동시켰다. 그 때부터 광부들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아 난동을 저지른 통제 불능의 폭도로 재현 되었다. 그 바람에 사건의 핵심 당사자로서 공권력의 1차적인 책임과 그 이후의 잔혹한 국가 폭력마저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사북사건'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광업소 파괴나 노조지부장 부인 폭행과 같은 광부들의 폭력적 대응을 떠올린다. 물론 그것들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군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다. 사북사건에 대한 기억은 시작부터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뒤틀렸다.
기억 조작에 희생된 또 다른 피해자들
전두환 신군부는 사태를 촉발한 공권력의 책임을 의도적으로 가리고, 이후 벌어진 광부들의 폭력성을 더 크게 부각했다. 특히 성난 광부들에게 붙들린 채 공포에 질려 있는 노조지부장 부인의 모습을 이 사건 전체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내세우고 자극적으로 소비하게 만들었다. 사북 광부 전체를 폭도로, 사북항쟁 전체를 난동으로 몰아가기 위한 신군부의 치밀한 시나리오 안에 마치 사건의 주역 마냥 부각된 이들과 그 가족들이 평생 동안 겪을 치욕에 대한 고려는 애당초 없었다.
특히, 노조지부장의 부인과 자식들은 폭력의 피해자로서 보호받기는 커녕 그 치욕스러운 장면을 박제 당함으로써 또 다른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노조지부장의 아내와 그 가족을 위한 국가의 조치를 별도로 권고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국가는 김○○와 그 가족의 정신적 고통을 위로하고 관련자들 사이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3.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217쪽)
마치 남편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양인 듯 아내에게 전가한 고통의 책임은 그 못된 일을 저지르고 비겁하게 숨어버린 자들에게 있지만, 그 이후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노출된 어머니의 사진으로 인해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 겪게 된 평생의 굴욕에는 언론과 국가의 책임이 분명히 있다.
'교통사고'로 포장된 국가 폭력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신군부가 의도한 이런 기억의 조작이 꽤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북사건을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로 규정한 보고서조차도 이 사건의 도화선이 된 경찰 폭력을 "교통사고"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진화위가 발행한 조사보고서는 사북 사건의 발생 및 전개 과정을 설명하면서 "1980.4.21. 교통사고와 사태의 확대 과정"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80. 4. 21. 14:00 노조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전부터 광부들이 삼삼오오 노조사무실로 모여들었다. 당시 경찰 측 상황일지에 의하면, 정선경찰서 소속 정 사복 경찰(지휘부 2명, 경찰 66명)이 오전부터 노조사무실 2층과 정문 등에 배치되었다. (중략) 같은 날 15:00경 노조사무실 내에서 광부들 수십 명과 노조 부지부장 홍금종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고, 그 주위에서 정선경찰서 소속 사복경찰 김성한, 이운선, 최흥식 등이 사진 채증하다가 (중략) 광부들이 "저놈 잡아라"며 외치자 이운선은 위급함을 느껴 노조사무실 1층 창문을 넘어 건물 앞마당에 세워 둔 경찰 지프차(운전수 장인택 순경)에 올라탔고, 앞마당에 모여 있던 광부들이 경찰 차량을 에워싸고 진로를 막자 운전수 장인택 순경이 그대로 군중 사이를 경찰차로 밀고 나가면서 광부 원일오 등을 치어 중상을 입히는 교통사고가 발생하였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3.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159-160쪽)
인권을 다루는 20년 전의 문제 의식이 낮아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줄 수도 있겠지만, 얼마 전에 나온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문 역시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도 사북사건의 시발점을 또다시 "교통사고"로 적은 걸 보면 이 문제는 자못 심각하게 볼 필요가 있다.
1980. 4. 18. 노조 지부장 이재기의 퇴진을 요구하는 노조원들에게 이재기와 사북지서장 어윤철 경위는 4.21. 노조 집회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4.21. 노조 집회가 계엄사에 의해 불허되었고, 집결한 노조원들과 현장에 출동한 경찰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경찰 차량이 광부들을 치고 달아나는 교통사고가 발생하였다.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2024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20권, 581쪽)
이 문장 뒤에는 "교통사고 직후 경찰이 구호 조치도 취하지 않고 도주하자 광부들의 누적된 분노가 폭발하면서 주민들이 가세"했다는 부연 설명이 이어진다. 하지만 교통사고 처리에 대한 불만이 수천 명의 광부와 주민이 합세한 대규모 폭력 사태로 전화되었다는 설명은 인과 관계에 대한 해명 치고는 터무니없다. 결국 2024년판 국가 기관의 보고서도 신군부가 만들어낸 기억의 조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사북의 원일오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영화 <1980 사북> 스틸컷
엣나인필름
신군부의 기억 조작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집회 불허로 웅성거리던 노조사무실, 사복 경찰의 사찰 채증과 발각, 광부 무리를 향해 그대로 돌진한 경찰 지프, 바퀴에 깔리고 튕겨나간 광부들, 초주검이 된 광부들을 버려두고 달아난 경찰들, 그 뒤를 쫓아 사북 지서로 몰려갔던 수백 명의 광부들. 이것은 절대로 '교통사고'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국가폭력의 가학적인 장면이자 아비규환의 현장이다.
그런데 이것이 교통사고로 기록되는 순간, 광부 원일오에 대한 기억과 사건의 운명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 사건의 경우에는 피해자 조지 플로이드의 이름과 가해자 데릭 쇼빈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었지만, 1980년 사북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이름도, 가해자 경찰의 이름도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왜 어떤 사회에서는 공권력이 저지른 폭압을 분명히 단죄하고 희생자의 이름을 기록하는데, 왜 우리는 공권력의 폭압과 비열한 도주 행위를 '교통사고'로 취급하며 아무도 단죄하지 않는가?
1980년 4월 21일 사북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해 신군부는 많은 진실을 감추어 왔다. 그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첫 장면이자 아직 복원되지 않은 진실 중 하나는, 바로 경찰 지프차에 깔려 초주검에 몰린 광부 원일오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첫 장면을 온전히 복원하지 않는 한, 사북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여전히 신군부가 조작해 낸 허상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사북사태"만이 신군부의 언어가 아니다. 사북사건을 설명하면서 계속 등장하는 "교통사고", "역상사고"라는 말도 결국은 신군부의 언어다.
백인 경찰의 무릎에 눌려 희생당한 검은 약자 조지 플로이드를 기억하는 당신이, 경찰 지프차에 깔려 시름시름 앓다 죽어간 사북의 검은 광부 원일오는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결국 아픈 질문으로 이렇게 돌아온다.
"우리는 무엇을 잊도록 길들여졌는가?"
많은 사람들이 사북 사건의 첫 장면을 전혀 모르고 있거나, 과거사 조사관들에게 그 장면이 여전히 교통사고의 순간으로 남아 있는 한, 이 사건은 진실이 규명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왜곡된 역사는 언제든 진실을 짓누를 것이며, 기억되지 않은 폭력은 언젠가 더 잔혹한 형태로 되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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