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1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이 대통령은 5·18 정신과 부마민주항쟁의 헌법 전문 수록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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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민주주의 투쟁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마산'의 앞 글자가 '부산'의 앞 글자와 더불어 헌법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17일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5·18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부마민주항쟁을 헌법에 함께 수록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다고 발언했다. 부마민주항쟁 경남·마산·부산 동지회를 비롯한 7개 단체는 19일 성명서를 통해 환영의 뜻을 표하면서 국회의 초당적 협력을 촉구했다.
현행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국민은 ······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구를 통해 이승만을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부마항쟁이 헌법 전문에 들어가면, 박정희도 그런 식으로 환기된다. 대통령이 이러면 안 된다는 점을 헌법 조문을 통해 웅변하는 두 번째 인물이 되는 것이다.
부산과 더불어 마산이 박정희의 정치적 무덤이라는 점은 부마항쟁에 대한 그의 대응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그간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을 뿐, 부마항쟁에 대한 박 정권의 진압 방식은 잔혹했다. 박 정권은 민심 이반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이판사판식의 폭력적 행태를 보였다.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가 발간한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는 당시의 끔찍한 광경들을 보여준다.
부마항쟁 최초의 희생자로 인정된 당시 51세 건설노동자 유치준은 경남 마산시 산호동 길거리에서 10월 19일 새벽 5시경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남매일신문> 기자가 이에 관해 회사에 보낸 문건이 위 보고서에 인용돼 있다.
"변사자 발생. 대림여관 앞 도로변(새한자동차 영업소 바로 앞)에서 50여 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 편, 키 160cm 가량.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역력('역력'에 삭제의 의미로 두 줄이 그어짐) 분명함."
코뿐 아니라 입에서도 피가 흐르고 눈이 퉁퉁 붓다가 쓰러져 죽었다.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한 진압 수준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진압이 아니라 살해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타살 흔적이 역력하다고 판단했던 위 기자는 '역력'을 지우고 '분명함'으로 수정했다.
시민뿐 아니라 경찰들도 구타당해
18일 저녁부터 산호동 일대에서는 군경의 시위 진압이 있었다. 이때 민방위 모자에 작업복 차림으로 공사장 바깥에 나갔던 안치준은 그런 참변을 겪고 노상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의 희생이 "부마민주항쟁과 무관하게 발생하였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판단됐다"고 보고서는 말한다.
그날 저녁 다른 데서 시위에 참가한 곽동효는 전투경찰의 곤봉에 머리를 맞았다. 그는 "두개골이 튀어나온 상태에서 피를 흘리며 도망쳐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버스 안내양과 승객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헤아릴 수 있다. 경찰의 추적이 무서워 병원에 가지 못한 그는 머리에 된장을 바르며 집에서 치료했다.
시위와 관계없이 길을 걷던 최홍일은 그날 저녁 8시경 계엄군에 붙들렸다. 길바닥에서 무릎이 꿇린 그는 소총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머리를 두들겨 맞았다. 이로 인해 안경알이 깨지고 유리 조각이 눈 밑에 박혔다.
항쟁 첫날인 16일부터 이틀 연속으로 시위에 참여한 전길홍은 사복경찰 4명과 경찰 방패조에 붙들렸다. 그 자리에서 그는 방패로 찍히고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그런 뒤 경찰 버스로 끌려갔다. 거기서도 구타를 당해 "앞니 3개가 부러지고 콧등이 함몰"됐다.
고등학생 서회인은 17일 밤중에 귀가하다가 경찰을 만났다. 경찰은 그의 얼굴에 사과 모양의 최루탄을 던졌다. "경찰이 던진 사과탄이 얼굴에서 폭발하여 코·눈·귀·이마가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고 파편이 박힌 채 기절"했다고 보고서는 말한다.
경찰 3명이 시민 1명을 폭행하는 장면을 촬영하던 김탁돈 기자는 경찰에 붙들려 "소나기 퍼붓듯" 하는 구타를 당했다. 경찰은 그를 양쪽으로 30미터가량 늘어선 경찰기동대원들 틈으로 지나가게 만들었다. 30미터 정도의 그 '터널'을 지나는 동안에 "주먹과 발길질·몽둥이질 세례"가 이어졌다.
일반 시민뿐 아니라 경찰관들도 구타를 당했다. 부산 경찰관인 이춘성·이상근·유수열·최광택이 겪은 참변이 보고서에 이렇게 요약돼 있다.
"18일 17시경 광복동에서 공수부대원이 시민을 무릎 꿇리고 생나무 몽둥이로 구타하는 것을 목격하고 제지. 경찰 신분증을 제시했으나 지휘관(대위)이 트럭 안의 군인 10여 명에게 '야! 조져. 저 새끼들 필요 없어'라고 명령. 이후 10여 분간 계엄군은 참나무 몽둥이로 머리 부위 등 전신을 내려치고, 넘어지자 군화발질 등 집단 폭행."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의 승리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 시내에 등장한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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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뒤인 1980년 1월 28일 작성한 '항소이유보충서'에 따르면, 박정희는 부마항쟁 현장을 둘러보고 청와대를 찾은 김재규 앞에서 강경 대응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 옆의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가 데모대원 100~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거들었다. 이들의 태도가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 군경의 진압 방식이었다.
이 같은 비상식적인 모습은 박 정권이 부마항쟁을 얼마나 불길한 시선으로 바라봤는지를 역설한다. 발포니 300만 학살이니 하는 미친 발언들이 나온 것은 상황을 정상적으로 수습할 자신감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부산과 더불어 마산은 박정희가 이성을 잃게 만든 도시다.
1960년에 마산에서 시작된 시민혁명을 바라보며 정치문제에 뛰어들었던 군인 박정희는 19년 뒤 부산과 더불어 마산에서 시작된 또 다른 시민혁명을 바라보며 정치적 최후를 자초했다. 두 도시는 박정희 장기독재가 끝났음을 알리는 성화가 점화된 곳이다.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의 승리가 헌법에 수록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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