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황기환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관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활약한 애국지사 황기환.
국가보훈부
2018년 7월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선보이자 시청자들은 주인공 유진 초이(최유진)에 열광했다. 배우 이병헌의 연기력과 매력도 한몫했으나 주인공의 독특한 인생 행로에 감동해 지지를 보낸 것이다.
노비 아들로 태어난 최유진은 부모가 주인에게 맞아 죽자 1871년 신미양요 때 들어온 미국 군함을 타고 태평양을 건넌다. 미군 해병대 장교로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활약해 무공훈장을 받은 뒤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돕는다.
제작진이 주인공을 설정하는 데 영감을 받은 인물은 독립운동가 황기환이었다.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미군에 입대해 참전한 것 말고는 극중 인물과 겹치는 대목이 거의 없으나 시청자들 사이에서 "그 시절 미군 장교가 되어 귀국한 한국인이 과연 있었을까"라는 의아한 반응이 나오자 그가 주인공의 실존 인물로 부각되며 관심을 모은 것이다.
공립협회 활동하다가 미군 입대해 1차대전 참전
국가보훈부 공훈록에 따르면 황기환은 1886년 4월 4일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1883년, 혹은 1888년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음 달 4일 탄생 140주년을 맞는다. 집안이나 부모, 어린 시절 등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1904년 증기선을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입항한 뒤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한 공립협회에 가입해 로스앤젤레스 근교 레드랜드지회장을 1906년까지 지냈다. 유학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어느 학교에서 공부했는지도 알려진 게 없어 독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뒤늦게 뛰어들면서 참전 군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황기환은 1918년 5월 18일 자원 입대해 유럽 전선에 배치됐다. 중상자를 구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아서 프랑스와 독일을 오갔다.
프랑스에서는 1919년 1월부터 전후 세계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파리평화회의가 열렸다. 당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할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회의 개최 직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것도 기대감을 품게 했다.
미국 유학파인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2월 1일 중국 상하이를 떠나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다. 3·1운동의 성과로 4월 11일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파리위원부(파리 한국대표부)를 설치하며 이틀 뒤 김규식에게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평화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전보로 발송했다. 부위원장에는 스위스 취리히대에 유학 중이던 이관용, 서기장에는 독일에 체류하던 황기환을 각각 임명했다. 이관용과 황기환은 5월 18일과 6월 3일 차례로 합류했다.
파리위원부는 청원서 제출을 비롯해 통신전(通信箋) 발행, 언론 기고 및 인터뷰, 서신 발송, 소책자 간행, 설명회 개최 등의 활동에 나섰다.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의 서한을 조르주 클레망소 파리평화회의 의장에게 전달하는가 하면 미국 상원에 '일본 억압에 놓여 있는 한국의 보호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제출했다.
파리위원부의 활동에 따라 유럽의 언론들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품기 시작했다. 1919년 3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133종의 프랑스 신문에 423건의 한국 관련 기사가 실렸고, 나머지 유럽 신문에도 48종 94건이 게재됐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사랑하는 한국 교회의 자녀들이 받는 핍박에 대해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의 생애를 누리기를 하느님께 간구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파리위원부에 보내왔다.
황기환은 1차대전 참전 군인이라는 경력을 내세워 승전국 대표들을 두루 만나 독립을 호소했다. 1919년 8월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맡은 김규식이 미국으로 건너가고, 같은 달 이관용이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 참가한 뒤 되돌아오지 않으면서 파리위원부 업무는 사실상 황기환 혼자 떠맡았다.
그는 프랑스 인권연맹이 1920년 1월 지리학회 강당에서 개최한 콘퍼런스에 참석해 '극동에서 위협받는 평화'란 제목으로 연설했다. 한국의 참상을 담은 슬라이드 필름을 상영하며 "한국은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베트남 독립운동가 호찌민도 참석했으나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던 탓에 발언권은 얻지 못했다.
파리평화회의는 패전국들의 영토와 식민지를 승전국들이 나눠 갖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인 데다 일본도 승전국의 일원이어서 한국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 출입도 허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황기환을 비롯한 파리위원부 관계자들은 한국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국제 연대의 기틀을 만들고자 온 힘을 다했다.
러시아 한인 노동자 35명 프랑스로 데려와
파리위원부 임무이자 성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포들의 권익 보호 활동이었다. 파리위원부는 유럽 한인사회의 씨앗을 뿌렸고 이는 유럽에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황기환은 1919년 9월 1일 리첸코란 이름의 러시아 동포에게서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유랑하던 한인 노동자 500여 명이 러시아 서부 최북단 도시 무르만스크의 철도회사에 고용돼 6년여 동안 일했으나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면서 해고돼 강제 송환될 처지에 놓였다는 호소였다.
러시아 내전에 개입해 이곳을 점령했던 영국은 동맹국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철수하는 길에 군함 산타엘레나호에 한인 노동자 200여 명을 태웠다. 황기환은 이 사실을 확인한 뒤 영국 외무부와 프랑스 노동부를 오가며 구명운동을 펼쳤다.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에도 편지를 보내 "당사자들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귀환시키는 것은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애초 프랑스는 황기환에게 체류를 원하는 한인 노동자를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본이 압력을 넣자 프랑스 법무부가 동양인 노동자 배척 분위기를 들어 난색을 표시하는 바람에 대부분 중국 칭다오로 송환됐고 35명만 프랑스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11월 11일 파리 동쪽 200㎞ 지점의 소도시 쉬프에 정착해 철도 복구, 전사자 묘지 조성 등의 업무에 투입됐다.

▲프랑스 한인 이주 100주년 조형물2019년 11월 1일 프랑스 쉬프에서 열린 프랑스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조형물을 제막하고 있다. 재불 조각가 백승수가 조국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한인들의 안타까움을 한쪽 날개로 형상화했다.
프랑스한인회
이들은 홍재하를 중심으로 재불한인회(2015년 프랑스한인회로 개칭)의 전신인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당시에는 프랑스를 법국이라고 했음)를 결성했다. 본격적인 유럽 이주 한인 1세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매달 급료의 일부를 파리위원부에 기탁했다.
황기환이 홍재하에게 보낸 감사 편지에 따르면 국민회는 1919년 11월 19일부터 1920년 5월 18일까지 6000프랑을 기부했다. 35명이 매달 930프랑(약 25만 원)씩 낸 셈으로 이주 노동자들로서는 적지 않은 돈이다. 이들은 영국의 한국친우회 창립을 위해 1860프랑을 송금하고 적십자회에도 기부했다.
재법한국민회는 1920년 쉬프에서 유럽 각지의 한인을 초청해 3·1절 기념식을 열었다. 독립신문과 신한민보는 이 자리에 한인 노동자 35명과 유럽 각국 유학생 10여 명, 영국 런던 거주 한인 10여 명, 파리위원부 인사 등이 참여했으며 황기환의 선창에 따라 "삼일절 만세, 국토 광복 만세, 재법한국민회 만세"를 외쳤다고 전했다.
황기환은 1920년 10월 3일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런던 주재 외교위원으로 임명됐다. 그해 10월 26일 영국에서 언론인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의 도움을 받아 한국친우회를 결성했다. 이듬해 6월 23일 프랑스에도 한국친우회를 발족했다. 해당국의 정치인, 학자, 언론인 등으로 구성돼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순국 100년 만에 '독립된 조국'으로 귀환
황기환은 "워싱턴 국제평화회의를 준비해야 하니 와 달라"는 이승만의 부탁을 받고 1921년 8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가 떠나자 유럽에서의 독립운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조직한 재법한국민회와 한국친우회가 역할을 대신하다가 1929년 서영해가 고려통신사를 설립하며 맥을 이어갔다.
황기환은 미국의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다가 1923년 4월 17일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가 37세에 불과했다. 결혼도 하지 않아 후손도 없었다. 정부는 독립운동 공적을 뒤늦게 인정해 1995년에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무덤의 위치도 알려지지 않았다가 85년 만에 극적으로 확인됐다.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목사는 2006년 교회 신도들의 묘지 위치가 적힌 명부를 우연히 발견한 뒤 주변을 샅샅이 뒤진 끝에 2년 만에 뉴욕 퀸스의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서 그의 묘를 찾아냈다. 50㎝도 안 되는 자그마한 비석에는 한글로 '대한인 황긔환지묘 민국오년 사월십팔일 영면'이라고 새겨져 있다. '민국오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5년인 1923년을 뜻한다.
▲미국 뉴욕의 황기환 묘비미국 뉴욕 퀸스의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있던 황기환 무덤의 묘비. 2008년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목사가 확인했다.
연합뉴스
국가보훈부는 2013년 '황기환 유해 봉환 추진단'을 꾸려 이장을 추진했으나 공동묘지를 관리하는 법인과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난관에 부닥쳤다. 두 차례의 소송과 끈질긴 설득 끝에 유해를 모셔와 2023년 4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7묘역에 안장했다. 순국한 지 꼭 100년 만이었다.
황기환 유해 봉환식의 슬로건은 '독립된 조국에서 다시 봅시다. See You Again, 4월 10일 유진 초이가 돌아옵니다'였다. '미스터 션샤인'의 여주인공 고애신(김태리)이 유진 초이에게 건넨 마지막 대사가 실현된 것이다.
▲독립된 조국으로 돌아오는 유진 초이황기환 애국지사의 유해 봉환식을 알리는 대형 현수막이 세종시 국가보훈처(국가보훈부) 청사에 걸려 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마지막 대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연합뉴스
▲황기환 지사 유해 봉환식2023년 4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의장대 부대원들이 미국에서 봉환된 황기환 애국지사의 유해를 묘역으로 옮기고 있다.
국립대전현충원
▲대전현충원의 황기환 지사 묘소2023년 4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7묘역에 안장된 황기환 애국지사의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유럽 한인 100년의 발자취>
<K파리지앙>
<프랑스에서의 한국 독립운동과 프랑스인들>
<공훈전자사료관>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