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4일 진주 공군교육사령부 최용덕 장군 동상 제막식의 모습.
공군교육사령부
스물한 살 때 중국군 장교직을 내던지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그는 중국군 복귀 뒤에는 이 일자리를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1932년 4월에는 조선혁명당에, 그 뒤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여했다.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에 들어가 총사령부 참모처장 등으로 복무했다.
중국군 눈치를 의식하며 독립운동을 수행했던 최용덕은 1946년 7월 26일 귀국 뒤에는 미군이라는 새로운 상전의 눈치를 살피며, 또 한국군 내의 친일파들을 의식하며 공군창설 운동을 전개했다. 그와 함께 공군을 창설한 7인 중 김정렬·박범집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서 확인된다.
친일파들을 배제해 놓고 공군 창설에 나섰다면 좋았겠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최용덕은 미군정 및 친일파들과 부대끼며 공군 창설을 주도했다. 미군정 하인 1948년 5월에 항공부대 창설에 참여하고 동년 9월 5일 육군 항공기지사령부 출범에 참여한 그는 공군 독립을 위한 적극적 활동을 추진했다. 공군본부가 2007년에 발행한 최용덕 전기인 <항공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 창석 최용덕의 생애와 사상>은 이렇게 설명한다.
"1948년 9월 5일 미군으로부터 L-4형 연락기 10대를 인수하고 출범한 항공부대의 창석과 김정렬 등 간부들은 공군 창군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함은 물론 미 군사고문단 측과도 교섭을 벌였다."
해방 직후뿐 아니라 정부수립 직후에도 미국은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이런 시기에 최용덕과 공군 지도부는 이승만과 미국 양측을 설득해가며 1949년 10월 1일에 공군 독립을 성사시켰다. 이 시기에 최용덕이 국방부차관이었던 점도 이 운동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 뒤 공군사관학교 교장과 공군기지사령관 등을 거쳐 1952년에 공군참모총장이 된 그는 한국 항공기의 국산화에도 이바지했다. 그의 총장 퇴임 7개월 전인 1954년 4월 3일에 '부활호'라는 이름이 수여된 이 국산 항공기가 제작된 일차적 원동력은 참모총장의 의욕이었다. 위 책의 설명이다.
"창석은 '우리 손으로 제작한 항공기가 우리 공역을 날아야겠다'고 한 바 있다. 또한 평소에 '죽기 전에 우리가 제작한 비행기를 타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다'라고도 말하였다."
최용덕의 흔적은 국산 항공기 1호뿐 아니라 공군 장병들의 머릿속에도 입력돼 있다. 공군이 부르는 군가 가사의 상당수는 그의 작품이다. 위 책의 서술이다.
"1951년, 한국전란으로 인하여 군가의 보급이 많지 않았을 때 문장에 조예가 깊은 창석은 사관생도에게 어울리는 품위 있고 평이하면서도 씩씩한 '공군사관학교 교가'와 공군 장병들을 위해 '공군가'를 작사하였다. 특히 공군가는 육군·해군의 행진곡 풍보다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창석이 작사한 곡은 공군가, 공사 교가, 은익의 노래, 공군행진곡(추정), 비행행진곡(추정) 등 다수가 있으며"
'부활호'를 하늘에 띄운 뒤 참모총장직에서 내려온 최용덕은 총장고문으로 있다가 1956년에 전역했다. 그 뒤 4·19혁명 직후의 허정 과도내각에서 체신부장관을 지낸 뒤 중화민국 주재 대사로 나갔다가 1962년에 외교부 고문이 됐다.
1969년 8월 15일, 최용덕은 향년 71세 나이에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 그는 독립군 출신이 공군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다행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역사를 대한민국 공군에 선사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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