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판과 턴테이블음악과 시집으로 충전하는 시간
이인자
도서관을 여행하다 보면 운명처럼 만나는 책이 있다. 드라마 <그해 우리는>의 대본집이 그랬다. 오래 전 헤어졌던 남녀가 과거의 시간을 하나씩 복기하며 서로를 다시 발견해 가는 이야기였다. 그 대본을 읽고 있자니, 자꾸 꺼내고 싶은 나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이를테면 지금 머무는 도서관이 있는 동네 천호동, 그 골목길에 얽힌 미로 같은 추억 말이다.
나는 천호동의 좁은 골목이 키운 아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그 길들은 우리의 광활한 놀이터였다. 그곳은 좀처럼 정복 되지 않는 미로였다. 가끔 길을 잃고, 막다른 길에 갇히기도 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동안 익힌 몸의 감각들이 원래 있던 골목으로 무사히 데리고 갈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동과 호수로 길을 익혔다면, 골목에 사는 우리는 길을 몸으로 기억했다.
도서관의 서가 사이를 걷다 보면, 가끔 어린 시절 거닐던 골목길이 생각났다. 비슷한 대문과 지붕이 각기 다른 사람들을 품고 있듯이, 비슷하게 보이는 책들 속에도 저마다 다른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책은 새로운 골목으로 향하는 길
책은 곧 길이었다. 막다른 골목 안에 갇혔을 때 책은 새로운 골목으로 향하는 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독다독' 고분다리시장점 같은 도서관을 더 많은 골목 사이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새로운 골목으로 향하는 길을 만날 테니 말이다.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축복이다. 그것만으로도 그 동네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일까. 이날, 이 도서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마치 이 도서관 때문에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어느새 시장 골목은 저녁거리를 사러 나온 사람들과 상인들의 목소리로 더 활기를 띠었다. 도서관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은 나가고, 바깥 소리만이 밀려 들어왔다. 밀려온 소리 중에는 우리 엄마의 목소리도 있는 듯했다. 어느덧 마늘과 간장 속에서 멸치가 뒤척이는 냄새도 코에 가득 고였다. 청각과 후각이 시간을 잊은 모양이다.
4년 전 냉면을 먹으러 가자던 엄마는 이제 냉면이 맛있는 줄 모르겠다고 하신다. 엄마의 잔소리보다 내가 엄마에게 하는 잔소리가 더 늘어났다. 노상에 펼쳐진 채소들은 봄바람을 맞은 탓인지 잎사귀들이 시들시들해 보였다. 엄마에게 요즘 유행한다는 봄동 비빔밥이라도 만들어 드릴까 싶어 봄동 한 소쿠리를 샀다.
봄동이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꼭 쥐었다.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는 엄마의 집으로, 그해 우리가 뛰어놀던 골목의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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