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3.15 11:51최종 업데이트 26.03.15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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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사조직인 하나회가 숙청된 것은 김영삼 정부 1년 차인 1993년이다.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을 지탱하던 세력이 군부에서 숙청되기까지는 6월항쟁으로부터 6년이 걸렸다. 그런데 하나회 숙청 이전에 또 다른 인적 청산이 있었다. 독재정권을 떠받치던 사법부 지도부는 1988년에 대폭 물갈이됐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이일규(1920~2007) 대법원장이다.

이일규가 대법원장에 임명된 것은 서울올림픽 개막(1988.9.17.)을 앞둔 1988년 7월 20일이다. 그를 임명한 것은 노태우 대통령이지만, 이는 노태우의 뜻은 아니었다. 이일규는 노 정권이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다.

그해 6월 중순까지만 해도 노태우는 전두환 때 임명된 김용철 대법원장을 유임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사법개혁을 열망하는 6월항쟁 직후의 국민 여론을 거역하는 것이었다. 노태우의 계획은 야당과 법조계뿐 아니라 소장 판사들까지 동요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한 사법파동을 견디다 못한 김용철은 6월 17일에 사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자 노태우는 형사지방법원장 출신인 정기승 대법관을 원장으로 승진시키는 대안을 내놓았다. 이 역시 반발을 초래했다. 대법원을 개혁해야 할 상황에서 기존 대법관에게 사법부를 맡기는 것도 문제이지만, 정권의 앞잡이 비슷했던 형사지방법원장직을 역임한 인물에게 새로운 시대를 맡기는 것도 문제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노태우는 그런 여론을 무시하고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가 역풍을 만났다. 이는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7월 2일에 일어나게 만들었다. 다음날 <한겨레> 톱기사는 반란표의 진원지로 집권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지목했다.

이런 홍역을 거친 노태우가 할 수 없이 꺼내 든 카드가 전직 대법관(대법원판사) 이일규다. 이일규가 지명되자 여론은 급반전됐다. 7월 4일 자 <경향신문>은 "매우 잘된 일"이라는 법조계의 평가를 전했다. 박정희·전두환 치하에서 사법부 지도자로 성장한 인물 중 하나를 대법원장으로 뽑아야 했던 당시 국민들이 볼 때 이일규는 '현실적인 최선책'이었다.

"이일규 전 대법원판사는 '대꼬챙이 판사'라는 그의 별명이 말해주듯 법을 원리원칙대로만 해석·적용하는 전형적인 법관"이라는 위 신문 또 다른 기사는 그가 여론의 지지를 받은 이유를 이렇게 알려준다.

"그는 대법원판사 시절 민청학련 사건, 고영근 목사 긴급조치 위반사건, 김철기 씨 국가모독 사건, 박세경 변호사 계엄포고령 위반사건 등 공안사건에서 양심적인 소수의견을 많이 내 '정부 측의 눈'에 벗어났었다."

'정권으로부터의 사법부 독립'

1989년 12월 11일 대법원에서 열린 법원장 회의에서 이일규 대법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이일규는 여론의 전폭적 지지와 더불어 어느 정도는 정권의 자포자기 속에 대법원장이 됐다. 그런 그가 국민 여망에 부응하고자 수행한 첫 번째 과제는 대법관 교체다. 전두환 정권의 폭정을 사법적으로 합리화시켜 주던 대법관들이 짐을 싸게 만드는 것이 그의 첫 임무였다.

대법관들의 임기가 있는데도 그런 교체가 가능했던 것은 1988년 2월 25일부터 시행된 현행 헌법의 부칙 때문이다. "이 헌법에 의하여 선임 방법이나 임명권자가 변경된 공무원과 대법원장 및 감사원장은 이 헌법에 의하여 후임자가 선임될 때까지 그 직무를 행하며"라는 부칙 제4조가 교체를 가능케 했다.

전두환 정권이 만든 1980년 헌법 제105조 제2항은 "대법원판사는 대법원장의 제청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한 데 비해, 현행 헌법 제104조 제1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한다.

이처럼 임명 방식을 바꿔 전두환 시절의 대법관들을 숙정하고자 했던 6월항쟁 직후의 열망을 노태우 정권은 거역하려 했다. 그랬다가 여론의 역풍을 만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일규에게 사실상 전권을 넘겨주게 됐던 것이다. 정권의 의중과 관계없이 전혀 엉뚱한 인물이 임명됐으니, 이때의 대법원장직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일규는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권이 일시적으로 무력해진 상황에서 사상 처음으로 행정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대법관 진용을 짰다. 유례없이 막강해진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활용해 그는 기존 대법관 13명 중 9명을 배제했다. 노 정권은 그가 내놓은 명단에 따라 국회에 임명동의안을 제출한 뒤 임명을 마무리했다.

이일규가 제청한 명단에 대해 1988년 7월 8일 자 <경향신문>은 "외풍 없이 치른 독자적 인선", "사법부 독립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전기"라는 여론의 평가를 전했다. 이 신문은 "가히 개혁이라 할 만한 것"이라며 대법관이 대폭 교체된 것, 재야 법조인 4명이 기용된 것, 전라도 4명과 경상도 3명 등으로 지역 안배가 이뤄진 것, 관례를 깨고 검찰 출신이 1명만 기용된 것 등을 높이 평가했다.

종래에 볼 수 없었던 이 같은 대법관 구성은 사법부가 정권의 눈치를 덜 보게 만드는 사법부 독립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국민으로부터의 사법부 독립'이 아닌 '정권으로부터의 사법부 독립'을 상당 부분 진전시킨 것은 이일규 대법원의 업적이다.

유신 체제하에서 보여준 용기와 신념

2019년 7월 25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권우성

문재인 정부의 지원과 여론의 응원 속에 검찰 개혁의 사명을 안고 검찰총장직에 앉은 윤석열은 도리어 검찰 개혁을 훼방하고 검찰 공화국까지 추구했다. 그는 그런 일을 추진할 소신과 신념이 애당초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일규가 이룬 업적 역시 인사권과 여론 지지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개혁 주체의 소신과 신념도 철저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일규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그래서 1988년의 사법개혁이 가능했다.

그의 소신과 신념을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는 조작 사건인 인민혁명당 사건(인혁당 사건)이다. 1964년의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인민혁명당이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조종했다는 사건이고, 1974년의 제2차 사건은 인혁당 재건위원회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반정부투쟁을 조종했다는 사건이다. 53세 때인 1973년에 대법원판사가 된 이일규가 맡은 것은 두 번째 사건이다.

1975년에 대법원은 피고인들에 대한 중형 선고를 확정지었다. 8명에게는 사형선고, 7명에게는 무기징역, 4명에게는 징역 20년, 4명에게는 징역 15년형이 부과됐다. 이때 이일규는 재판이 위법하므로 2심 판결을 파기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제출했다. 그해 4월 8일 자 <동아일보>는 그의 의견을 이렇게 요약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의 항소심인 원심판결은 검찰관의 공소사실의 진술도 없이, 또 제1심에서의 신문과 중복된다 하여 피고인의 신문을 생략한다 하여('생략하겠다며'로 읽어야 할 듯)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시행하여 결심(結審)하였는 바, 이는 공소사실에 대한 변론을 거쳤다고 할 수 없으니 이는 변론 즉 사실심리를 아니하고 재판을 한 재판절차에 위법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고, 따라서 원심 판결은 파기를 면할 수 없다고 본다."

이일규는 억울한 누명을 쓴 피고인들이 제대로 진술을 해보지도 못한 채로 재판절차가 진행되는 것에 이의를 품었다. 그래서 2심 판결의 파기를 과감히 주장했다. 이런 용기와 신념을 유신 체제하에서 보여줬기에, 1988년에 하늘에서 대법원장직이 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독재정권의 폭정은 사법부와의 공조를 전제로 했다. 판사봉을 든 사법부가 돕지 않았다면 독재정권들은 정치범이나 양심수들을 교도소가 아닌 지하실이나 동굴 같은 사설 감옥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정권 운영을 힘들게 만들고 민심 이반을 가속화시키는 첩경이다. 사법부의 협조는 독재정권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이일규는 대법원이 독재정권과 제휴하던 시절에 '이러면 안 된다'는 소수의견을 내어 사법부와 정권 양쪽에 경종을 울렸다. 이는 '사법부는 정권으로부터 독립해 국민에게 예속돼야 한다'는 이치를 따르는 것이었다. 이일규의 신념과 소신은 독재정권 시절의 사법부가 밑바닥으로 완전히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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